| ▲ '월곶' 소금창고를 사진에 담는 사람들 ©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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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호 월곶 소금창고'는 방산대교를 건너 오른쪽 방향에 홀로 서 있었다. 날이 어두워지면 화려한 네온사인이 반짝이는 월곶 도심을 바라보고 서 있는 이 창고를 나는 ‘월곶 소금창고’라 부르게 되었다.
눈이 내리면 습관처럼 이곳으로 향했다. 그럴 때면 월곶 소금창고 앞에는 카메라를 든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너른 벌판에 산재해 있던 수많은 소금창고가 모두 파괴된 후, 그 풍경을 기억하는 이들은 원형 그대로 유일하게 남겨진 월곶 소금창고로 주섬주섬 모여들었던 것이다.
| ▲ '월곶' 소금창고로 소풍 나온 사람들 ©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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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고 앞 저수지에 물이 차면 사람들은 그물을 들고 물고기를 잡곤 했다. 물고기가 그물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사람들은 파라솔 아래 모여 앉아 서로에게 술잔을 건네며 한때의 여유를 즐겼다.
| ▲ '월곶' 소금창고의 석양과 구름 ©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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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로 해가 지고 있었다. 창고의 날렵한 지붕 선이 구름과 맞닿은 풍경은 시시각각 그 색과 모양을 바꾸었다.
멀리서 보면 당당히 서 있는 듯하지만, 가까이서 본 창고는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다. 걱정이 앞섰다. 소금창고 파괴 1주년을 맞아 쓴 글에서도 이곳만큼은 보존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기록자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셔터를 눌러 그 모습을 남기는 것뿐이었다.
| ▲ 생명력이 넘치는 갈대에 쌓인 '월곶' 소금창고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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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되어 짙은 녹음 속에 슬쩍 몸을 감춘 소금창고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답답했던 눈길이 시원하게 트였다
| ▲ '월곶' 소금창고 앞에 핀 사데풀 ©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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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는 갈대와 더불어 민들레를 닮은 사데풀, 강아지풀 등 눈에 익숙한 우리 꽃들이 지천으로 피어 있었다. 자잘한 꽃들이 오래된 창고 앞에서 재롱을 부리는 어린아이처럼 피고 지는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도 큰 즐거움이었다.
| ▲ 월곶 소금창고 입구의 야생화 꽃밭 ©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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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면 창고로 들어서는 길은 꽃길이 되었다. 군락을 이룬 야생화 덕분에 눈이 환해질 정도였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은 이곳에서 늘 새로운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이 자잘한 야생화들의 이름을 찾고 싶어 지인에게 사진을 보내고, 식물 도감을 샅샅이 뒤져보았지만 끝내 이름을 알아내지 못했다. 눈에 익숙하면서도 이름을 모르는 것이 비단 이 꽃뿐일까 싶었다. 세상의 수많은 존재 중 제 이름을 제대로 불리고 있는 것이 얼마나 될까. 이름을 몰라 그저 ‘야생화’라는 통칭으로 부르는 마음이 못내 미안했다.
| ▲ 인천 소래습지생태공원에서 바라본 '월곶' 소금창고의 모습 ©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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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래습지생태공원에서 바라본 42호 월곶 소금창고는 먼바다로 떠나는 배들과 함께 흘러가는 듯 보였다.
| ▲ 작은배, 월곶 소금창고, 소래산이 일직선에 서다 ©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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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 3일, 소금창고 파괴 1주년을 하루 앞두고 이곳을 찾았다. 멀리 소래산이 보이고, 창고 곁에는 이제 풀들만 듬성듬성 돋아난 작은 배 한 척이 놓여 있었다. 버려진 배와 사람들의 관심 밖에서 언제 주저앉을지 모를 소금창고 한 동은 보는 이의 마음을 쓸쓸하게 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오직 묵묵히 지난 시절과 다가올 세월을 지켜보는 저 소래산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 서면 내일을 기약할 수 없기에, 현재의 풍경은 더욱 소중하게 다가왔다.
| ▲ 가뭄으로 갈라진 저수지와 월곶 소금창고 ©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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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뭄으로 거북등처럼 쩍쩍 갈라진 저수지 바닥을 보았다. 제 살을 터뜨려 형상을 만들어낸 이 바닥과 위태롭게 서 있는 창고는 닮은 듯하면서도 달랐다. 갈라진 바닥은 물이 차면 다시 물고기들을 품어주겠지만, 소금창고는 한 번 무너지면 그것으로 영원한 이별이기 때문이다.
장군들이 긴 칼을 옆에 찼다면, 이곳의 창고들은 구불구불한 갯벌을 거느리고 있었다. 42호 월곶 소금창고는 그렇게 모진 겨울을 견뎌내며 자리를 지켰다.
| ▲ '월곶' 소금창고에 52년만에 가장 큰 정월 대보름달 뜨다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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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2월 9일은 52년 만에 가장 큰 보름달이 뜨는 날이었다. 날이 어둑해질 무렵 나는 다시 42호 소금창고로 향했다. 소금창고가 즐비했던 예전에는 어디서나 달을 맞이할 수 있었지만, 이제 단 세 동만이 남았기에 나는 월곶 소금창고로 방향을 정했다.
스산한 바람에 갈대들이 흔들렸다. 달이 뜨기 전까지 홀로 이곳에 있다는 생각에 자꾸만 주위를 돌아보게 되었다. 마침내 보름달이 떠올랐다. 바람 부는 갈대 숲 위로 솟아오르는 달을 보는 것은 경이로운 경험이었다. 이 순간을 위해 삐거덕거리는 창고 곁에서 추위를 견뎠다. 방산대교의 불빛이 달빛과 세를 겨루고 있었지만, 보름달을 허락한 시간은 불과 10분뿐이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다시 길을 나섰다.
돌아 나오는 길, 서쪽 하늘에 별이 떠 있었다. 하지만 땅 위의 아파트 불빛이 별빛을 압도하고 있었다. 세상의 인공적인 불빛이 하늘의 빛을 흐리게 하는 시절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 방산대교 가로등 불빛에 일렁이다 ©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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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산대교 아래 내만 갯골로 바닷물이 가득 찼다. 다리를 비추는 가로등 불빛이 물결을 따라 요요하게 흔들렸다. 붉게 일렁이는 바닷물에서 강한 생명력이 느껴졌다.
방산대교를 건너기 전 바라본 창고의 모습은 또 달랐다. 칠면초들이 바닷속 해파리처럼 드문드문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소금창고가 파괴된 지 2년이 되었다. 잔해들이 흩어진 채 속절없이 시간이 흘렀다. 2009년 6월 4일, 월곶 소금창고는 서서히 어둠 속으로 잠기고 있었다.
| ▲ 월곶 소금창고 앞에 백로 날아들다 ©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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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고 앞 저수지에는 백로들이 무리 지어 날아들었다. 물고기와 게는 물을 만나고, 아파트는 물속에 비치고, 사람들은 통발을 치고, 백로는 그 사이를 오갔다. 삶의 한 부분이 충족되면 위험도 함께 찾아오지만, 이곳에 있으면 그것조차 서로를 살리는 ‘상생’임을 알 수 있었다.
방산대교를 지나며 습관처럼 창고 쪽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어느 날, 소금창고가 보이지 않았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아 무작정 달려갔다. 현장은 처참했다. 시흥에서 유일하게 옛 모습을 간직했던 42호 월곶 소금창고마저 무참히 무너져 있었다. 멀리 소래산만이 그 광경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 ▲ 꽃은 다시 피어나고 소금창고는 무너졌다. ©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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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대대적인 파괴 작업 당시 포클레인이 들어갈 수 없어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던 42호 창고였다. 허탈함과 미안함이 동시에 밀려왔다. 폐염전의 허허로움을 가장 잘 보여주던 마지막 창고가 사라진 것에 대한 상실감, 그리고 수없이 사진을 찍으면서도 무너지는 것을 막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가슴을 짓눌렀다. 사물과도 오래 눈을 맞추면 마음이 스며든다는 것을 이곳에서 비로소 깨달았다.
| ▲ '월곶' 소금창고의 오래된 풍경같은 사람들 ©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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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추억이 된 풍경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창고 앞에서 고기를 잡던 사람들, 다정한 밀어를 나누던 연인들, 풀밭에 기대 가위바위보를 하던 중년의 커플까지.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유독 느리게 흐르던 시간이 이곳에 있었다.
창고는 무너졌지만 저수지 앞 작은 배는 여전히 그 자리에 떠 있었다. 어디로도 떠나지 못하는 그 배는 이제 새들이 잠시 쉬어가는 간이역이 되었다. 소금창고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던 그 시절의 공기는 이제 이곳에 없다.
사라지는 풍경을 담는 이에게 상실감은 늘 곁에 있는 친구와 같다.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한데, 그 친구가 다가오면 우울함은 여전히 깊어진다.
2009년 정월 대보름달이 그토록 아름다웠던 42호 월곶 소금창고도 결국 무너졌다. 내년 보름달이 뜨면 나는 또 이곳을 떠올릴 것이다. 살아온 내력대로라면 분명 그 자리에 서 있어야 할 창고가 사라진 빈 풍경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아직 닿지 않은 미래의 쓸쓸함이 벌써 가슴을 흔들고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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