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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2월 19일 오전 7시, 맹자학당은 심우일 훈장님의 길 안내로 7명의 제자와 함께 열 가지 주제를 가지고 강화도로 출발했다.
맹자학당은 2008년 1월 17일 맹자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모여 만든 작은 학습동아리이다. 1대 임경묵 훈장님에 이어 2대 심우일 훈장님이 지도하고 있다. 소래고등학교 도서관에서 매월 격주 홀수 화요일 7시 30분에 수업을 하고, 그날 배운 맹자 사상 속의 화두에 대하여 토론을 하는 작은 모임이다.
첫 번째로 전등사의 정족산사고로 왔다. 정족산사고는 전등사 서쪽에 있었으며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곳이다. 강화도에서 사고가 운영되기 시작한 것은 1595년(선조 28)이었다. 임진왜란으로 춘추관과 충주, 성주의 사고가 불타고 유일하게 남은 전주사고의 실록이 해체·보관 과정을 거쳐 강화부 관아 건물에 보관되었던 것이다. 그 후 그것은 다시 영변의 보현사와 객사를 거쳐 1603년 새로 설치된 강화도 마니산(摩尼山)사고로 옮겨졌다. 정족산사고는 1653년(효종 4) 마니산사고에 화재가 일어남으로써 건립이 추진된 것으로 보인다.
1660년(현종 1) 정족산성이 완성되고 실록을 성내의 사고로 옮기면서 장사각과 함께 선원각이 세워졌다. 그러나 실제로 이 사고로 실록이 옮겨진 것은 1678년(숙종 4)이었다. 이후 실록이 새로 만들어지는 대로 1부씩 보관하였고, 그 밖에 왕실 족보를 비롯한 여러 정부 문서를 함께 보관하였다. 현지의 관리는 수호 사찰인 전등사에서 맡았다. 1910년 이후 보관 서적들은 규장각 도서들과 함께 조선총독부 학무과 분실로 모여 함께 관리되었고, 지금의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도서로 이어졌다.
조선왕조실록은 1997년 훈민정음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 조선왕조실록이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조선 후기의 무신 양헌수가 병인양요 때 삼랑성 전투에서 프랑스 군대를 격퇴했기 때문이다. 당시 군사로 백두산 포수들을 선발했다고 한다.
두 번째 방문지는 시흥 호조방죽의 형 격인 선두방죽이다. 선두방죽은 이곳에 '배머리 나루'라는 포구가 있었는데, 이를 한자화한 이름이라고 했다. 선두포뚝은 선두리와 화도면 사기리 사이의 갯골을 막은 둑으로, 1706년(숙종 32) 강화유수 민진원이 쌓았다고 한다.
선두방죽은 시흥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맹자학당 훈장이자 소래고 교사인 심우일 선생님은 2004년경 시흥의 호조벌이 《승정원일기》 기록을 통해 경종 1년인 1721년 무렵에 완공되었음을 확인했다. 경종 1년 12월 6일에 “안산과 인천 두 읍의 경계에 둑을 쌓아 논으로 만들 만한 곳이 있는 까닭으로 감관을 정하고 군정을 고용하여 일을 시작하여 지금 이미 완성하여 끝냈으니, 서울 근처에서 이렇게 수백 석을 얻는 논을 얻었으니 진실로 다행한 일입니다.”라는 《승정원일기》의 기록을 찾아낸 것이다.
그전까지는 막연하게 정조임금이 사도세자의 능행길 경비로 쓰기 위해 축조했다는 설들만 무성했으나, 정확한 역사적 기록을 찾은 것이었다.
심우일 선생님은 "강화의 선두방죽보다 15년 후에 완공된 호조방죽을 쌓을 때, 선두방죽을 쌓았던 기술자들이 와서 쌓았다."고 설명해 주었다.
문장가로 이름 높았던 조선 후기의 문신 이건창(1852~1898) 선생이 살았던 생가로 왔다. 선생은 고종 3년(1866)에 15세의 어린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고종 11년(1874)에는 서장관으로 발탁되어 암행어사 등을 지냈다.
그의 저서 《당의통략》은 파당과 친족을 초월하여 공정한 입장에서 당쟁의 원인과 전개 과정을 기술한 명저로 평가받고 있다. 매천 황현은 이건창의 무덤을 찾아 "홀로 누웠다고 어찌 슬퍼하랴 / 살았을 적에도 무리와 떨어져 있었는걸"이라는 시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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