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소금창고, 남겨진 포동 갑문의 미래를 묻다

-아직도 우리에게는 지켜내야 할 것이 있다-

최영숙 | 기사입력 2012/03/20 [15:40]

사라진 소금창고, 남겨진 포동 갑문의 미래를 묻다

-아직도 우리에게는 지켜내야 할 것이 있다-

최영숙 | 입력 : 2012/03/20 [15:40]

 

▲ 하늘에서 바라본 시흥 갯골     ©최영숙

 
길을 나섰다.  오늘도 오래전부터 갯골 길을 따라 드나들었던 물길은 여전했다.

▲ 늘어서 있던 소금창고들     ©최영숙


늘 보아왔던 익숙한 풍경이기에 예사로 지나치는 것들이 있다. 소금창고가 그러했다. 어리석은 믿음은 언제든 그곳에 가면 같은 모습으로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믿음과 상관없이 소금창고는 파괴되었다. 소금창고가 파괴되고 나자, 이곳에서 더 이상 파괴될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 2005년 붉은 융단이 깔린 듯한 칠면초 군락     ©최영숙

 
월곶으로 가기 전 방산대교를 지나려면 붉은 융단을 깔아놓은 듯한 칠면초와 해홍나물 군락을 만날 수 있었다

 

▲ 2008년 8월 사라진 칠면초 군락     ©최영숙

 

2007년 소금창고가 파괴되고 2008년도에는 포동갯벌의 칠면초들이 거의 모두 사라졌었다. 2008년 8월 21일, 김호준 생태연구팀장을 필두로 시 공무원과 사회단체에서 원인 조사에 나섰었다. 김호준 팀장은 염분의 농도가 높거나 병충해에 의한 고사를 염두에 두고, 이렇게 광범위하게 칠면초들이 죽은 일에 대해 좀 더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내놓았었다. 그러나 정확한 원인을 밝힐 수는 없었다.

▲ 2009년 다시붉게 타오른 칠면초 군락     ©최영숙


2007년 사람들이 파괴한 소금창고는 복원되지 않았지만, 자연은 달랐다. 칠면초가 사라지고 1년 후, 시흥갯벌에는 다시 붉은 칠면초와 해홍나물들이 붉은 융단을 깔고 있었다. 자연의 복원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 2005년 1월 25일 수문     ©최영숙


소금창고들이 늘어서 있던 시절에 수문은 그저 스쳐 지나는 풍경에 지나지 않았다. 우선 눈길을 사로잡는 소금창고들이 무수히 많았기 때문이었다. 2012년 3월 20일 안성남 씨를 만나 사진을 보여주고 자세한 이야기를 여쭤보았다. 일상적으로 수문으로만 알았던 이것은 물을 빼주는 '퇴수문' 역할을 했다고 한다. 빗물이 넘치거나 염전에서 쓰고 남은 물들을 빼주는 역할이었다.

▲ 함수통과  '솔장다리'꽃     ©최영숙


구염전에 있는 함수통 또한 마찬가지였다. 해안지 모래땅에서 서식하는 '솔장다리'꽃이 만발한 함수통은, 소금창고가 사라지고 남은 자리에서 이제는 또 다른 정취를 보여주고 있었다.

▲ 2005년 포동 갑문과 소금창고의 모습     ©최영숙

 

2005년에 기록된 사진에는 소금창고와 함께 포동 갑문이 있었다. 익숙한 풍경이기에 눈길이 편안했다. 하지만 이 사진 속의 소금창고는 2007년 파괴되어 사라졌다.

▲ 2012년 수문 파괴하다     ©최영숙


2007년 6월 4일 소금창고가 파괴되었을 때, 막강한 자본의 힘은 근대문화유산이 될 수 있었던 공간을 한 번에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2012년, 지극히 합법적인 공사라는 이름 하에 그나마 남겨졌던 근대문화유산인 수문들이 파괴되는 것을 목도했다.

▲ 2008년 수문     ©최영숙


930년대에 조성된 소래염전의 역사와 함께 포동 구염전에 있던 소금창고, 수문, 타일, 함수통, 포동 갑문 등은 80여 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것들이다. 현재 시흥갯골은 '시흥갯벌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만약 수문이 고스란히 남겨졌다면, 포동갯벌과 염전 그리고 수문까지 이어지는 소래염전의 역사를 설명할 때 이야기가 얼마나 풍성해졌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 수문 완성하다     ©최영숙


옛 수문을 보존하면서 새롭게 수문을 설치했다면, 80여 년의 세월을 간격 두고 세워진 두 개의 수문을 동시에 볼 수 있었을 것이다. 현대의 토목기술은 충분히 최소한의 공사로 옛 수문을 보존하며 새 수문을 만들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 2004년 '절대금지' 소금창고 앞 쪽의 수문    ©최영숙


2012년 3월 수문이 파괴되는 것을 보았다. 수문이 허물어져도 아무것도 할 수 없이 오직 기록만 하고 있는 스스로에게 무기력함과 참담함을 느꼈다. 그러함에도 현재를 기록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는 생각에 다시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담았다.

 

▲ 10년 구름에 갇히다     ©최영숙

 

보통의 갑문들은 바닷물이 들어오는 것을 막고 방죽 안의 물을 빼주는 배수 기능을 담당한다. 그러나 이곳은 그 역할이 달랐다. 소금을 생산하는 염전에서의 포동 갑문은 오히려 바닷물을 가둬두는 역할을 했다.

 

염부로 일했던 안성남(50) 씨의 증언에 의하면 "포동 갑문은 밀물 때 갑문을 열어 서해의 바닷물을 받아 저수지에 가두었다. 대형 펌프로 좀 더 작은 대양저수지로 바닷물을 올리고, 대양저수지에서 다시 양수기로 염판으로 물을 올려주었다"고 했다.

 

▲ 2010년 8월 포동 갑문 위에 오르다     ©최영숙


2010년 8월 포동 갑문으로 왔다. 구름이 맞닿아 있는 듯했다. 손잡이를 잡고 포동 갑문 위로 올라갔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던 풍경과는 또 다른 모습이 펼쳐졌다. 갯벌과 함께 포동 구염전의 너른 벌판이 한눈에 들어왔다.

 

▲ 2010년 포동 갑문 앞에 타래붓꽃피다     ©최영숙


타래붓꽃이 핀 뒤로 포동갑문이 보였다.

▲ 안개속의 포동 갑문     ©최영숙


포동갑문과 포동벌판이 안개에 젖었다.

▲ 2004년 천개의 시선 앞의 함수통     ©최영숙


이제 이곳에 남겨진 근대문화유산은 포동갑문과 함수통, 타일들이 남겨져 있다.

▲ 솟대 세우다     ©최영숙


시에서는 이곳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시흥갯골길에 솟대를 설치했다.

▲ 자전거를 타다     ©최영숙


정자도 지었다. 

▲ 관망대에서 바라보다     ©최영숙


정자에 올라서 보았다. 갈대숲과 갯골이 보였다.

▲ 시흥갯골생태공원 조성사업 계획도     ©최영숙

 
'시흥갯골생태공원 조성사업 계획도'를 보면 사업기간: 2003~2012년까지 총사업비 700억원(조성비330, 토지매입비370)으로 산림생태관찰지구, 습지생태관찰지구, 자연에너지관찰지구, 염전체험자, 중심시설지구 등을 조성한다고 계획되어 있었다.

▲ 2009년 포동 갑문     ©최영숙

 
 새롭게 건물을 짓고 시설물들을 설치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들이 역사를 말해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롭게 만드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우리의 후대도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우리 현대인도, 미래의 후대도 영원히 다시 만들 수 없는 것은 오직 80여 년 전에 세워진 이 포동 갑문뿐이다.

 

시흥갯골 길을 걷다 보면 우리의 근대문화유산들이 그야말로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 2006년 함수통     ©최영숙


세월의 흐름과 함께 함수통은 이제 스스로 또 다른 정취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 2005년 타일들 제3경인고속도로 건설 전의 구염전     ©최영숙

 

그저 흔해 보이는 저 타일들도 현재 남겨진 소금창고 앞에 가져다 놓기만 하면 이미 한 시대를 증언하는 유물이 되는 것이다. 무엇을 새롭게 짓는 것보다, 실제로 염부들이 소금을 걷어내던 땀과 손길이 묻어있는 이 타일들이 더욱 소중하다.

 

염전도 사라졌는데 소래염전에 깔았던 이 타일을 이제 어디서 구할 것인가. 현재 이곳에 남아있는 것들이 전부인 것이다. 세월이 지날수록 이 타일들은 가치를 더할 것이다. 가치는 그것을 이해하고 존중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나온다. 시흥갯골과 연결된 사람들의 역사가 숨어있는 이 귀중한 유물들보다 더 귀한 것이 또 무엇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광한루원과 왕버들     ©최영숙

 

2009년 광한루원에 갔었다. 광한루원 연못 앞에 왕버들나무가 가지 하나를 돌기둥에 척하니 올려놓고 방문객들의 하례를 받고 있었다.

 

이 왕버들나무는 1582년(선조 15년) 오작교 축조와 함께 심어졌다고 한다. 430여 년이 된 나무인 것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춘향가는 그로부터 130년 뒤인 영조 때의 판소리이니, 춘향전이나 춘향가의 근간을 이루는 이야기 속에 이 광한루원과 130여 살 된 왕버들나무도 함께 들어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자가 이몽룡의 말고삐를 맸던 곳이 바로 이곳이 아닐까 하는 실없는 상상도 해보았다. 춘향전 속의 인물들이 금방이라도 걸어 나올 듯했다.

 

▲ 춘향 영정     ©최영숙


광한루원에는 춘향의 사당이 있었다. 

▲ 지리산 자락에 있는 춘향 묘     ©최영숙

 

더욱 놀라운 것은 지리산 자락에 춘향의 묘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만고열녀성춘향지묘'라는 묘비명과 함께 가묘가 조성되어 있었다. 춘향의 묘에는 무엇이 묻혔을까 궁금했다. 춘향전 책이나 춘향가를 완창한 명창들의 CD를 넣었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남원에 가면 춘향전의 인물들이 가상 속 인물이 아니라, 실제로 그 시대를 살았던 인물들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소설 속 인물인 춘향, 이몽룡, 월매, 방자, 향단, 변사또가 마치 생생히 살아 숨 쉬는 역사 속 인물처럼 느껴지는 곳이 바로 남원이었다.

 

판소리 속 유령 같은 인물까지 생생하게 살려낸 것이다. 문화에 대한 깊은 자긍심을 바탕으로 이를 문화상품으로 연계해 내는 남원 주민들의 지역 사랑이 참으로 놀라웠다.

 

▲ 제 82회 춘향제 포스터     ©춘향제 홈페이지

 

제82회를 맞았던 남원 춘향제는 ‘남원에 빠지다’라는 주제로 열렸다. 축제의 연혁을 보며 감탄했다. 축제는 일제강점기 때 시작되었던 것이다. 1931년 춘향사당을 짓고, 단오(춘향과 이도령이 처음 만난 날)에 처음 제사를 지냈다. 1950년 명창대회, 춘향 선발 등으로 문화축제의 면모를 갖추었다. 한국전쟁 중 춘향 영정이 없어지자, 1962년 이당 김은호가 춘향 영정을 다시 그려 봉안하였다.

 

제44회(1974년)에는 명창의 등용문인 전국판소리명창대회가 시작되었으며, 첫 장원으로 조상현 명창이 뽑혔다. 제74회(2004년)에는 제1회 남원 세계허브산업엑스포가 함께 열렸다. 춘향과 산업엑스포가 어울리지 않을 듯하면서도, 현대적 흐름에 맞게 축제는 계속 진화했던 것이다. 제80회(2010년)에는 춘향이 살던 시대의 생활 및 풍류 체역인 ‘숙종시대 속으로’를 전통적으로 재현했다. 춘향제는 세월을 거치며 남원을 벗어나 세계 속의 축제로 나아갔다.

 

▲ 인천광역시 중구청의 일본영사관 터 표지석     ©최영숙

 

얼마 전에 인천광역시 중구청에 다녀왔다. 봄꽃으로 단장되어 있는 중구청 한구석에 작은 표지석이 있었다. 중구청 자리가 과거 일본영사관 터였던 것이다. 표지석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인천 개항 직후인 1883년 10월 31일 일본은 현재의 중구청 자리에 영사관을 신축하였다. 목조 2층 건물인 일본영사관은 구내에 경찰서, 소방서, 경죄재판소, 우편국을 두고 자국민과 관련된 여러 업무를 처리하였다. 1906년 2월 일제가 통감부를 설치함에 따라 '이사청'으로 개칭되었고, 국권을 완전히 빼앗긴 뒤로는 '인천부청'으로 사용되다가 현재 남아 있는 청사 건립 계획에 따라 1932년 철거되었다. -인천광역시 중구 관동 1가 9번지-"

 

▲ 중구청에서 설명을 듣는 사람들     ©최영숙


답사 온 사람들이 이곳의 역사를 귀 기울여 듣고 있었다.

▲ 2012년 2월 23일 포동 갑문을 지나치다     ©최영숙

 

만약 포동 갑문마저 사라진다면, 이곳에도 훗날 사진 한 장과 함께 표지석만 덩그러니 남을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흥갯골생태공원 조성 사업을 진행하면서, 총사업비 700억 원 중에 현재 남겨진 근대문화유산을 이전하거나 보존하는 예산은 없는 것인지 못내 궁금했다. 새롭게 만드는 것보다 소래염전의 숨결이 쓰인 근대문화유산들을 제대로 보존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80여 년 전의 포동 갑문 앞으로 자전거를 탄 사람이 지나갔다. 바닷물을 막는 일반적인 갑문이 아닌, 바닷물을 오히려 끌어모아 가두었던 포동 갑문의 앞날이 어찌 될지 걱정이 앞섰다.

 

▲ 2010년 8월 여름이 깊다     ©최영숙

 

이 포동 갑문을 현재의 자리에서 온전히 보존하는 것이 최선이겠지만, 그것이 정녕 어렵다면 시흥갯골생태공원 내부로라도 옮겨야 마땅하다는 생각을 했다. 포동 갑문이 그 자리에 서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이곳의 역사를 웅변하기 때문이다.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한 채 구염전에 흩어져 있는 함수통들 또한 당연히 수거해서 보존해야 한다. 공사가 진행되면서 함수통들이 흙 속에 그대로 묻히는 광경을 직접 보았기 때문이다.

 

더 늦기 전에 서둘러야 한다. 또 어떤 개발 논리로 근대문화유산들이 파괴되고 홀연히 사라질지 모른다.

 

▲ 2009년 포동 갑문 헹글라이더를 타는 사람을 만나다     ©최영숙

 

하루라도 빠른 시간 내에 보존 대책을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소금창고가 그러했고, 수문 또한 그러하다. 참으로 쓸쓸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직 반드시 지켜내야 할 마지막 유산들이 남아 있다. 지키지 못하고 잃어버린 후에 후회하는 현실이 진정으로 답답하고 슬프다.

 

그럼에도 우리가 시기를 놓쳐 또다시 파괴되는 광경을 보게 된다면, 지금까지 깊은 애정을 갖고 살아왔던 이 시흥은 결국 '아픈 이름'으로만 가슴에 남겨질 것이다. 진정,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 깊은 생각에 잠기는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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