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에게서 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포동 월곶에서 방산대교로 가기 전 백로 무리가 장관을 이루고 있으니, 시간 될 때 꼭 사진으로 남겨보라는 제보였다. 시흥의 풍경을 기록하는 본 기자를 위해 특이하거나 아름다운 풍경이 보일 때마다 소식을 전해주는 지인들의 관심은 늘 고맙고 감사한 일이다.
2012년 6월 28일 새벽 5시 30분경, 포동 구염전으로 향했다. 현장에는 백로들이 무리를 지어 쉬고 있었다. 최대한 기척을 숨기며 조심스럽게 다가갔으나, 작은 인기척에도 백로들은 일제히 하늘로 날아올랐다. 고요했던 염전은 불청객의 등장으로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새들이 모두 날아갔다. 미안했다. 그러함에도 사진을 담는 사람은 또 한 번 이 녀석들의 멋진 비상을 보고 싶었다.
백로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갈대숲에 몸을 숨겼다. 저 멀리 소래산이 눈에 들어왔다. 10분쯤 지났을까, 경계를 서듯 백로 한 마리가 공중을 선회하기 시작했다. 모자를 눌러쓰고 최대한 은폐했으나 녀석들의 경계망을 피하지 못했는지, 40여 분이 지나도록 무리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하릴없이 가방에서 시집을 꺼내 읽었다. 시력을 잃은 손병걸 시인의 시집 《나는 열 개의 눈동자를 가졌다》였다.
나는 열 개의 눈동자를 가졌다
-손병걸
직접 보지 않으면
믿지 않고 살아왔다
시력을 잃어버린 순간까지
두 눈동자를 굴렸다
눈동자는 쪼그라들어 가고
부딪히고 넘어질 때마다
두 손으로
바닥을 더듬었는데
짓무른 손가락 끝에서
뜬금없이 열리는 눈동자
그즈음 나는
확인하지 않아도 믿는
여유를 배웠다
스치기만 하여도 환해지는
열 개의 눈동자를 떴다
백로를 기다리는 머나먼 시간 속에서 가슴에 커다란 울림을 주는 시를 만났다. 시집 한 권을 거의 다 읽었을 무렵, 백로 몇 마리가 다시 시야에 들어왔다. 그러나 기대했던 큰 무리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갈대숲에서 일어나려다 잠시 중심을 잃고 기우뚱하는 바람에 갈대가 흔들리자, 녀석들은 화들짝 놀라 다시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때마침 상공으로 헬리콥터 한 대가 굉음을 내며 지나갔다. 편히 쉬고 있던 백로들의 평화로운 새벽을 방해했다는 미안함과, 녀석들이 이곳에 다시 돌아오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리겠다는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멀리 월곶역의 모습이 보였다.
| ▲ 사라진 소금창고 방향을 바라보다 © 최영숙 |
|
방산대교를 지나 포동 벌판을 바라보았다. 과거 소금창고들이 늘어서 있던 자리는 이제 소금창고 대신 갈대들만 무성하게 우거져 있었다.
포동 펌프장 방향으로 발길을 옮겼다. 드넓게 펼쳐진 내만 갯벌을 바라보니 비로소 눈과 마음이 편안해졌다. 개발의 바람 속에서도 이 한결같은 자연을 여전히 마주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 ▲ 가뭄이 극심한 매화(도창)저수지의 모습 © 최영숙 |
|
이어 시흥의 8개 저수지 중 가뭄 피해가 체감상 가장 심각한 매화(도창)저수지로 향했다. 저수지 물속과 가물어 드러난 바닥 곳곳에 폐사한 물고기들이 널려 있었다. 참담한 풍경이었으나, 사진으로 기록할 뿐 기자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어 무력감이 몰려왔다.
| ▲ 가뭄으로 물이 빠진 물왕저수지에 초승달이 뜨다 © 최영숙 |
|
물왕저수지 역시 가뭄으로 물이 바짝 빠져 있었다. 물이 빠진 저수지 한가운데에는 마치 초승달 모양을 닮은 작은 섬이 솟아 있었다.
마지막으로 관내 연꽃테마파크를 찾았다. 현장 관계자에게 이 극심한 가뭄이 연 재배에는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물었다. 재배 관계자는 오히려 일조량이 풍부해 꽃의 개화 시기가 평년보다 보름 정도 빨라졌고, 연근 발육에는 최상의 조건이 형성됐다고 답했다. 용수는 지하수와 물왕저수지의 물을 끌어다 쓰고 있지만, 그럼에도 대지를 적실 비는 충분히 내려야 한다며 걱정 어린 심정을 내비쳤다.
테마파크 한쪽에는 선명한 빛깔의 홍연이 피어나 있었다.
일반 논의 벼들 사이사이로 연잎들이 군데군데 솟아오른 모습이 이채로웠다. 마치 푸른 바닷속을 유영하는 해파리 무리를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때마침 어린아이들이 단체 견학을 와 테마파크를 활기차게 채우고 있었다.
마치 오선지 위에 음표를 그리듯, 연꽃들이 저마다의 높낮이로 피어 있었다.
노란 황금어리연꽃도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일반 어리연꽃은 꽃잎 가장자리에 깃털 모양의 털이 없지만, 황금어리연꽃은 깃털 같은 정교한 털이 나 있어 독특한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수수한 일반 어리연꽃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새벽 5시 30분에 시작된 여정은 어느덧 오전 11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시흥은 50년 넘게 살아온 삶의 터전이지만, 언제 어디를 바라보아도 늘 새로운 아름다움을 주는 곳이다. 조금만 문밖을 나서면 깊은 갯골과 바다가 펼쳐지고, 물왕저수지와 호조벌, 연꽃테마파크까지 슬라이드 필름처럼 아름다운 풍경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2012년 6월 28일은 생동감 넘치는 아침 갯골의 풍경과, 104년 만의 극심한 가뭄으로 고통받는 시흥의 두 가지 얼굴을 동시에 마주한 의미 깊은 하루로 기록됐다.
 |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