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 내린 날, 사라져 가는 시흥의 마을들을 걷다

-최영숙의 발길따라 가는 풍경 -

최영숙 | 기사입력 2010/12/30 [05:28]

첫눈 내린 날, 사라져 가는 시흥의 마을들을 걷다

-최영숙의 발길따라 가는 풍경 -

최영숙 | 입력 : 2010/12/30 [05:28]
▲ 등을 달고 있는 회화나무     ©최영숙

 

올해 처음으로 함박눈이 내렸다. 그동안 발길이 오래도록 머물렀던 마을들을 다녀왔다.

 

정이 가장 많이 들었던 장현택지개발지구 내 둔터골로 향했다. 이제 둔터골에는 더 이상 사람들이 살지 않는다. 600년 된 회화나무가 조등을 달고 서 있었다. 나무들도 사람의 온기를 먹고 산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모두 떠난 마을을 홀로 덩그러니 지키고 있는 모습에 왜 이리도 마음이 저리던지, 잠시 울컥했다. 저 노구의 나무가 개발 이후에도 살아남아야 할 텐데, 이렇듯 기운을 쭉 빼고 있는 모습이 안쓰러웠던 것이다.

 

마을 분들이 사시던 모습이 떠올랐다. 우물에서 빨래하시던 할머니, 지팡이를 짚고 내려오시던 어르신, 눈싸움하던 꼬마들. 이사를 가며 기르던 개를 떠나보낼 때, 진땀을 흘리던 백구가 생각나 눈물짓던 마을 어른까지. 그 많은 사연을 묻어두고 모두 어디로 떠나셨을까. 옮겨간 터에서는 모두 잘 지내고 계시는지 궁금했다. 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주민들이 모두 떠난 둔터골에는 600년 된 회화나무만이 마을을 지키고 있었다.

 

 

▲ 둔터골 눈 내리다     ©최영숙


건물 잔해들이 쌓인 마을에 눈이 내리며 또 다른 풍경을 만들고 있었다. 눈이라는 것, 사람을 함빡 속인다는 생각을 했다.
 

▲ 둔터골  마을 사라짐     ©최영숙


사람이 살았던 기척조차 보이지 않는다. 멀리 회화나무라도 없으면 딴 동네에 왔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말없이 둔터골 마을을 내려왔다.
 

▲ 두일마을 버스 지나다     ©최영숙


안두일로 왔다. 안두일 마을도 주민들이 많이 떠났다. 버스는 끊임없이 오고 갔지만 타는 승객도, 내리는 승객도 없었다. 정류소 표지만이 이곳이 예전에 정류장이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 안두일 눈 내리다     ©최영숙


예전에 마을에 들어서면 저 처마 밑에는 권 씨 성을 쓰시는 어르신 부부와 마을 분들이 앉아 계시곤 했다. 이제 사람들은 떠나고 눈발만 날렸다.
 

▲ 안두일의 미나리깡     © 최영숙


내년 봄에도 저 미나리밭에서는 푸른 미나리가 자랄까 궁금해졌다.
 

▲ 안두일 순복음교회 사라짐     © 최영숙


안두일 입구에 크게 서 있던 순복음교회가 사라졌다. 잔해만 남은 모습이 마음을 한없이 쓸쓸하게 했다.
 

▲ 을미마을을 들어서다     © 최영숙


을미마을도 마을은 사라지고 전봇대에 확성기만 달려 있었다. 마을의 소식을 전해주던 확성기는 이제 세트장의 소품처럼 매달려 있었다.
 

▲ 묘재 전봇대 늘어서다     ©최영숙

 

묘재로 왔다. 이곳은 둔터골보다 개발 속도가 더 빨랐다. 아예 마을이 통째로 사라졌다. 이곳이 묘재였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은 전봇대에 걸려 있는 이정표뿐이었다. 마을은 평지가 되었고 전봇대는 기울어 있었다.
 

▲ 묘재 피흘리개 고개의 나무들     ©최영숙


조남동 묘재마을에서 골월로 넘어가는 피흘리고개에 왔다. 이 고개에는 전설이 내려온다. 
 
임진왜란 때 방어군 총지휘관인 신립장군이 휘하군대를 '삼천병마골'(현 조남동 남왕마을 서쪽)이라는 곳에 진을 치고 적정을 살피고 있었다. 왜군들은 현 '피흘리고개'라고 이르는 이 고개에 진을 치고 대치했다. 신립의 군대가 적진을 살필 수 없어서 묘안을 짜는데 한 여인이 썩 나섰다. "제가 적진에 홀로 들어가서 '다자귀야'하면 출동하시고 '더자귀야'하면 이곳에 진을 지키십시오." 하며 적진으로 들어가면서 '더자귀야',  '다자귀야'를 번갈아 불렀다. 
 
적장에 이 여인을 잡아 "너는 누구인데 '더자귀야', '다자귀야'를 부르냐?"고 물었다. 여인은 두 아들 이름인데 지금 어디 있는지 몰라서 부르고 있다고 했다. 적장은 "지금 군사들이 곤히 자는데 시끄럽게 하지 말고 물러나라."고 했다. 여인은 나오면서 더 큰소리로 "다자귀야. 다자귀야."를 외쳤고 신립의 군대는 일제히 기습을 감행해서 왜적을 쉽게 물리칠 수 있었다. 그 때 적의 흘린 피가 얼마나 많았는지 그때부터 '피흘린고개' 또는 '피홀고개'라고 부른다고 전해진다.

▲ 묘재를 바라보다     © 최영숙


피흘리고개를 기점으로 묘재 방향은 택지 개발에 포함되었고 골월은 제외되었다. 공사 중임을 알리는 팻말이 서 있었다.

▲ 피흘리 고개길의 견공들     ©최영숙


전설을 아는지 모르는지 고개에는 개들만 있었다. 반갑게 다가오는 녀석들에게 줄 것이 없어 미안했다. 사람이 그리웠는지 껑충 뛰어올라 몸을 비볐다. 굶주린 기색이 없는 것으로 보아 건너편 골월 마을에서 마실 나온 녀석들인 듯싶었다. 차에 치일까 걱정되어 멀리 보내야 했다.
 

▲ 산현상회  임정자 할머님   © 최영숙

 

하지만 아직 떠나지 못한 어르신도 계셨다. 산현상회의 임정자(79) 할머니. 뇌출혈로 쓰러진 아들과 함께 사시는 할머니는 공장 사람들도, 마을 사람들도 모두 떠난 마을을 지키고 계셨다. "세상에 이곳처럼 마음 편한 곳이 없는데 어디로 가나" 하셨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을 반갑게 맞아주시는 고운 모습에서 살아오신 세월이 보였다. 가게를 나서며 과자를 사려 하자, 할머니는 "날짜가 지나서 못 먹어. 바꾸러 오라고 해도 오지를 않네. 다음에 천천히 오래 있다 가"라며 손을 흔드셨다.

 

왜 할머니를 뵙는데 둔터골의 회화나무가 생각나는지. 이 겨울을 무사히 잘 나실 수 있을지 걱정하며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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