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기행] 주전과 주화의 틈에서 갈팡질팡하다… 남한산성 맹자기행을 가다

남한산성으로 맹자학당 역사기행을 가다

최영숙 | 기사입력 2015/07/06 [22:02]

[역사기행] 주전과 주화의 틈에서 갈팡질팡하다… 남한산성 맹자기행을 가다

남한산성으로 맹자학당 역사기행을 가다

최영숙 | 입력 : 2015/07/06 [22:02]

 

▲ 수어장대     ©최영숙

 

'유명조선(有明朝鮮), 주전(主戰)과 주화(主和)의 틈에서 갈팡질팡하다'라는 주제로 심우일 맹자학당 훈장의 안내에 따라 남한산성 맹자기행을 나섰다.

 

'유명조선'이란 '명나라에 있는 조선' 혹은 '명나라에 속한 조선'을 의미한다. 대개 명나라가 멸망(1644년)한 이후인 17세기 후반 비문부터 등장하기 시작했다. 비록 전쟁에 패해 청나라에 머리를 숙였을지언정, 조선의 정신적 정체성은 여전히 명나라에 속해 있음을 대내외에 표방한 서글픈 흔적이다.

 

지난 2015년 6월 27일 오전 8시, 소래고등학교를 출발한 답사단은 삼전도비(청태종공덕비)를 시작으로 남한산성 남문, 수어장대, 서문, 연주봉옹성, 북문, 옥정사지, 현절사를 거쳐 마지막으로 김상헌 묘역까지 이어지는 치열한 역사의 현장을 밟았다.

 

병자호란(丙子胡亂)은 1636년(인조 14) 12월 2일, 청나라 태종이 명나라를 본격적으로 공격하기 전 배후의 안전을 확보할 목적으로 조선을 침략하며 발발했다. 청군의 진격은 파죽지세였다. 12월 9일 압록강을 건넌 청군은 선양을 떠난 지 불과 열흘 만에 개성을 지나 서울 근교까지 당도했다. 이에 인조와 조정은 12월 14일 밤, 급히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

 

이후 45일간 성안에서 격렬히 항전했으나 추위와 굶주림, 왕실이 피난했던 강화도의 함락, 포위를 풀기 위한 근왕병의 작전 실패 등이 겹치며 한계에 다다랐다. 결국 1637년 1월 30일, 인조는 산성을 내려와 삼전도에서 청태종을 향해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 즉,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이마를 땅에 찧는 치욕적인 의식을 행하며 항복했다. 병자호란은 동아시아 사에서 명청교체기를 상징하는 일대 사건이었으며, 조선으로서는 수십만 명의 백성이 포로로 끌려가 그 사회적·정신적 피해가 유례없이 막심했던 비극이었다.

 

답사단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380여 년 전 병자호란의 역사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 2007년 6월 17일 인조 제향을 드리다     © 최영숙

 

청나라 군대가 압록강을 건넜던 1636년 12월 9일 자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살펴보았다.

인조 33권, 14년(1636 병자 / 명 숭정 9년) 12월 9일(기묘) 1번째 기사 왕세자가 인열왕비의 소상제를 행하다. 새벽에 왕세자가 인열왕비(仁烈王妃)의 소상제(小祥祭)를 숙녕전(肅寧殿)에서 행하였는데, 백관이 돈화문(敦化門) 내정(內庭)에 동서로 나뉘어 서열대로 섰다.

국가의 존망이 풍전등화와 같았던 날이었음에도 실록의 첫 기사에서는 어떠한 전조나 위기감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누란지위(累卵之危, 달걀을 쌓아 놓은 듯한 위태로운 형세)의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청나라의 진격 속도는 실록을 읽는 것만으로도 숨이 가쁠 만큼 빨랐다.

 

 인조 33권, 14년(1636 병자 / 명 숭정 9년) 12월 13일(계미) 1번째 기사 도원수 김자점이 적병이 안주에 이르렀다고 치계하자 이에 대해 논의하다.

 

▲ 인조가 들어갔던 남한산성 남문     ©최영숙

 

 인조 33권, 14년(1636 병자 / 명 숭정 9년) 12월 14일(갑신) 3번째 기사 최명길에게 강화를 청하게 하고 상(임금)은 남한산성에 도착, 강도(강화도)로 가기로 결정하다.

상이 돌아와 수구문(水溝門)을 통해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향했다. 이때 변란이 창졸간에 일어났으므로 시신(侍臣) 중에는 간혹 도보로 따르는 자도 있었으며, 성 안 백성은 부자·형제·부부가 서로 흩어져 그들의 통곡 소리가 하늘을 뒤흔들었다. 대가가 새벽에 산성을 출발하여 강도로 향하려 하였다. 이때 눈보라가 심하게 몰아쳐서 산길이 얼어붙어 미끄러워 말이 발을 디디지 못하였으므로, 상이 말에서 내려 걸었다. 초경(初更, 밤 7~9시사이)이 지나서 대가가 남한산성에 도착하였다.

실록에 묘사된 12월 14일의 기록은 처참하기 이를 데 없다. 엄동설한의 날씨에 얼어붙은 산길을 임금이 직접 걸어야 했을 정도였고, 피난길에 흩어진 백성들의 통곡 소리가 하늘을 찔렀다. 성안에 갇힌 뒤에도 조정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인조 33권, 14년(1636 병자 / 명 숭정 9년) 12월 15일(을유) 2번째 기사 최명길이 적진에서 돌아와 강화에 대한 일을 계달하면서 적이 왕제(王弟) 및 대신을 인질로 삼기를 요구한다고 하였다. 이에 능봉수(綾峯守) 칭(偁)을 왕의 아우라 칭하고 판서 심집(沈諿)을 대신의 직함으로 가칭(假稱)하여 보낼 것을 의논하였다.

인조 33권, 14년(1636 병자 / 명 숭정 9년) 12월 16일(병술) 4번째 기사 가짜 왕제와 대신을 보낸 것이 탄로나 박난영이 오랑캐에게 죽임을 당하다.

조선은 이미 정묘호란(1627년) 때 가짜 왕자를 보내 속이려다 들통났던 과오를 똑같이 되풀이했다. 이 미숙한 외교적 기만책 때문에, 청나라 진영에서 조선을 위해 목숨을 걸고 중재하던 역관 박난영이 허망하게 희생되었다. 더욱 서글픈 것은 청나라의 수석 통역관으로 있던 조선인 출신 정명수가 이 가짜 왕제와 대신의 정체를 밝혀냈다는 점이다. 결국 사태는 악화되어 가짜가 아닌 진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볼모로 가야 하는 비극으로 이어졌다.

 

▲ 남한산성     ©최영숙

 

성안에서는 끝까지 싸우자는 주전파(척화파) 김상헌과, 현실을 직시하고 화친을 맺자는 주화파 최명길의 대립이 극에 달했다.

인조 33권, 14년(1636 병자 / 명 숭정 9년) 12월 17일(정해) 4번째 기사 예조 판서 김상헌이 화의의 부당함을 극언하다.

인조 33권, 14년(1636 병자 / 명 숭정 9년) 12월 18일(무자) 4번째 기사 전 참봉 심광수가 최명길을 벨 것을 청하다. 하교하여 전승의 결의를 다지다.

상이 행궁의 남문에 거둥하여 백관을 교유(敎諭)하였다. 전 참봉 심광수(沈光洙)가 땅에 엎드려, 한 사람을 목 베어 화의를 끊고 백성들에게 사과할 것을 청하였다. 상이 하문하기를, “그 한 사람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최명길입니다” 하자, 상이 유시하기를, “너의 뜻은 내가 이미 알고 있다” 하였다. 이때 최명길이 반열(班列)에 있다가 그 말을 듣고는 바로 자리를 피하였다.

끝까지 목숨을 바쳐 의리를 지키자는 주전파의 서슬 퍼런 기세 속에서, "최명길의 목을 베라"는 척화파 심광수의 상소를 바로 곁에서 듣고 슬그머니 자리를 피해야 했던 최명길. 그가 서 있던 주화파의 자리가 얼마나 고독하고 위태로웠는지를 실록은 생생히 보여준다. 당시 인조는 이 전쟁의 원인을 두고 다음과 같이 한탄했다.

 

"내가 덕이 없어 이 같은 비운(否運)을 만나 노로(奴虜)가 침략하였다. 정묘년에 변란이 생겼을 때에 임시방편으로 강화를 허락하여 치욕을 달게 받아들였으나 이는 부득이한 계책으로서 마음은 역시 편치 않았다. 이번에 오랑캐가 대호(大號, 황제의 칭호)를 참칭하고 우리나라를 업신여기므로 내가 천하의 대의를 위해 그들의 사자(使者)를 단호히 배척하였으니, 이것이 화란이 발생하게 된 원인이다."

 

▲ 남한산성 암문     ©최영숙

 

인조가 스스로 '화란의 원인'이라 칭했던 역사적 전조들을 확인하기 위해, 호란 발발 8개월 전의 실록을 복기해 보았다.

인조 32권, 14년(1636 병자 / 명 숭정 9년) 2월 16일(신묘) 1번째 기사 용골대, 마부대 등이 서달의 차인을 거느리고 오다.

인조 32권, 14년(1636 병자 / 명 숭정 9년) 2월 21일(병신) 1번째 기사 홍익한이 금한(후금의 한)을 배척하고 명분을 세울 것을 상소하다.

"그대의 나라를 위한 정성을 가상하게 여긴다. 사신을 참하라고 진달한 것은 이른 것 같다. 형세를 보아가며 처리해도 늦지 않다" 하였다.

청나라의 핵심 인물인 용골대와 마부대가 사신으로 왔을 때, 조선의 조정은 사신의 목을 베어야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청나라가 보낸 국서를 수취하길 거부했다. 서달이 일시에 한목소리로 말하기를, "명나라가 덕을 잃어 북경만을 차지하고 있다. 우리들은 금나라에 귀순하여 부귀를 누릴 것이다. 귀국이 금나라와 의를 맺어 형제국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금한이 황제 자리에 오른다는 말을 들으면 반드시 기뻐할 것이라고 여겼었다. 그런데 이처럼 굳게 거절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하였다. 이에 제관이 군신 간의 대의로써 물리치자, 용호가 성이 나서 고산 등의 봉서를 도로 가져가며 말하기를, "내일 돌아가겠다. 말을 주면 타고 갈 것이고 주지 않으면 걸어서 가겠다" 하였다.

 

▲ 남한산성에서 휴식을 취하는 시민들     ©최영숙

 

이때 조선의 반응은 다음과 같았다.

인조 32권, 14년(1636 병자 / 명 숭정 9년) 2월 25일(경자) 1번째 기사 태학생 김수홍·유학 이기형 등이 금 사신을 참하라고 아뢰다.

인조 32권, 14년(1636 병자 / 명 숭정 9년) 2월 26일(신축) 2번째 기사 용호 등을 접견하는 문제로 의견이 대립되자, 용호가 성이 나서 돌아가다. 이에 박난영을 보내어 용호를 따라 모화관에 가서 굳이 만류하였다.

 

용호가 말하기를, "우리들은 별서(別書)를 받지 않기 때문에 가는 것이다. 만일 열어 보기를 허락한다면 마땅히 도로 들어가겠다" 하였다. 마침내 다시 무신 및 역관을 보내어 부르기 위하여 벽제(碧蹄)까지 따라갔으나 용호 등이 끝내 오지 않았다. 그들이 성을 나갈 때에 구경하는 관중이 길을 메웠는데, 여러 아이들이 기와 조각과 돌을 던지며 욕을 하기도 하였다.

 

▲ 남한산성에서 바라본 삼전도비가 있는 방향. 제2롯데월드가 보여서 가름하기가 좋았다.     © 최영숙

  

조선은 청나라의 국서 받기를 거부했고, 조정과 유생들은 청나라 사신의 목을 베라 외쳤다. 분노한 청나라 사신들이 도성을 나설 때 백성들과 아이들은 돌을 던지며 욕설을 퍼부었다. 게다가 명나라를 돕고 청나라에 대비하라는 내용이 담긴, 평안감사에게 보내는 조정의 비밀 문서까지 청 사신단에게 빼앗기는 최악의 외교적 허점마저 노출했다. 이때 돌팔매를 맞으며 분노를 삼켰던 용골대는 정확히 9개월 후, 대군을 이끄는 선봉장이 되어 조선의 강토를 유린하고 백성들을 도륙했다.

 

외교적 결례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조선의 사신들은 청나라 태종의 황제 즉위식에서 치명적인 외교적 결례를 범하게 된다.

 

1636년 4월, 청나라 태종은 황제를 칭하며 국호를 대청(大淸), 연호를 숭덕(崇德)으로 정했다. 조선은 청태종의 황제 즉위식에 당시 심양에 체류하고 있던 사신 나덕헌과 이곽 등을 참석시켰다. 그런데 각국 사신들이 황제에 대한 대례를 거행할 때, 나덕헌과 이곽은 홀로 무릎을 꿇는 것을 거부하며 버텼고 이에 청태종은 격노했다. 청나라는 이를 조선 국왕이 일부러 무례를 범한 것이라 판단하고 준엄한 국서를 들려 보냈다. 그러나 춘신사(春信使) 나덕헌과 회답사(回答使) 이곽은 귀국길에 이 국서를 몰래 열어본 뒤, 두려운 마음에 국서를 잡물 속에 버리고 도망쳐 왔다.

 

한 나라를 대표하는 사신이 세계 정세와 스스로의 국력을 헤아리지 못한 채, 온 천하가 지켜보는 황제 즉위식에서 감정적으로 황제를 모욕하고 국서를 파기한 행위는 국가를 크나큰 도탄에 빠뜨렸다. 이는 사신으로서의 도리와 외교적 책무를 저버린 실책이었으며, 결과적으로 불과 8개월 후 인조가 청나라 태종 앞에 무릎을 꿇고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의 치욕을 당하며 항복하게 만든 결정적 단초가 되었다.

 

▲ 푸른 숲으로 둘러싸인 남한산성 성벽 길 ©최영숙

 

당시 실록은 사신들의 비겁한 대처와 조정의 분노를 이렇게 기록했다.

인조 32권, 14년(1636 병자 / 명 숭정 9년) 4월 26일(경자) 2번째 기사 금나라의 참호(황제 칭호) 문제로 춘신사·평안 감사·비변사 등이 의견이 대립하다.

 

나덕헌·이곽 등의 장계의 사연과 등출한 적서(賊書)의 말을 보니 가슴이 찢어져 통곡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저 적이 참호를 가지고 사신을 구박하는 날 칼에 엎어져 의(義)에 죽는 일은 이 무리들에게 기대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연일 구박을 받으면서 고악(鼓樂)의 소리를 참여하여 들은 일은, 중호(衆胡)들에게 견제되어서 자유롭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고 어찌 감히 스스로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참람하고 설만한 글에 이르러서는, 풀로 봉하고 단단히 싸서 즉시 열어 보지 못하고 통원보에 와서야 비로소 열어 보고 몰래 버려두었다고 핑계를 대고 있습니다. 이때를 당하여 특별한 거조를 하지 않는다면 예의의 나라인 우리나라가 다 금수의 지역으로 들어가게 되어 끝내는 인심을 수습하고 사기를 고무시킬 수 없을 것입니다."

 

나덕헌과 이곽은 국서를 몰래 열어보고 필사본만 남긴 채 원본을 버리는 중대한 과오를 범했다. 이 국서에는 "조선이 왕자를 보내 사죄하지 않으면 대군으로 침략하겠다"는 최후통첩이 담겨 있었다. 국서를 접한 조정은 격분하여 나덕헌 등을 유배 보냈고, 척화론자(斥和論者)들은 주화론자(主和論者)인 최명길(崔鳴吉)·이민구(李敏求) 등을 격렬히 탄핵했다. 조선 조정이 명분 논쟁으로 골든타임을 허비하는 사이, 청나라 태종은 그해 11월 "왕자와 척화론자들을 압송하지 않으면 침략하겠다"고 거듭 위협했다.

 

이미 병자호란은 예견된 일이었다. 청나라는 조선을 침략할 구실을 완성해 가고 있었는데, 조선은 국가 존망의 위기 앞에서도 오직 명분과 '의(義)'만을 찾고 있었다. 이것은 사마귀가 제 힘을 모르고 거대한 수레를 막아선다는 '당랑거철(螳螂拒轍)'의 고사와 다름없었다. 역사의 수레바퀴가 굴러오고 있었건만, 군사적 실력이 없던 문신들은 명나라를 부모의 나라로 섬겨야 한다는 절대적 사대주의로 위기를 해결하려 했다. 제 힘이 아닌 명분론에만 기대었던 대가는 참혹했다.

 

그 폐해는 고스란히 아무 죄 없는 백성들에게 돌아갔다. 청나라 병사의 칼날에 죽고, 굶어 죽고, 노예로 끌려간 수많은 이름 없는 백성들이었다. 당해낼 수 없는 침략이었다면 유연한 외교적 수단으로 백성의 피해를 최소화했어야 했다. 명분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문신들은 소신에 대한 보답으로 후대의 추앙을 받았을지언정, 민초들은 이리저리 쓸려가며 도륙당했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참으로 철저하고도 융통성 없는 사대주의였다.

 

조정이 외교적 관계를 개선할 수 있는 기회를 걷어차 버린 결과, 조선은 청나라 황제의 즉위식이 끝난 지 불과 8개월 만에 병자호란을 맞이했다. 남한산성에 갇힌 인조에게 마침내 청나라의 항복 권유가 당도했다.

 

▲ 남한산성에서 단체사진을 담다     ©최영숙

 

인조 34권, 15년(1637 정축 / 명 숭정 10년) 1월 2일(임인) 2번째 기사 귀순하라는 내용의 황제의 글과 그에 대한 의논. 홍서봉·김신국·이경직 등을 오랑캐 진영에 파견하였다.

“대청국(大淸國)의 관온 인성 황제(寬溫仁聖皇帝)는 조선(朝鮮)의 관리와 백성들에게 고유(誥諭)한다. 짐(朕)이 이번에 정벌하러 온 것은 원래 죽이기를 좋아하고 얻기를 탐해서가 아니다. 본래는 늘 서로 화친하려고 했는데, 그대 나라의 군신(君臣)이 먼저 불화의 단서를 야기시켰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사신이 왕을 만나지 못하게 하여 국서(國書)를 마침내 못 보게 하였다. 그런데 짐의 사신이 우연히 그대 국왕이 평안도 관찰사에게 준 밀서(密書)를 얻었는데, 거기에 ‘정묘년 변란 때에는 임시로 속박됨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정의에 입각해 결단을 내렸으니 관문(關門)을 닫고 방비책을 가다듬을 것이며 여러 고을에 효유하여 충의로운 인사들이 각기 책략(策略)을 다하게 하라.’고 하였으며, 기타 내용은 모두 세기가 어렵다."

 

청태종의 항복 권유 서신이 당도하자, 조정에서는 이성구(李聖求)가 장유(張維)·최명길·이식(李植) 등 문장가들에게 답서를 작성하게 할 것을 청했다. 성안의 사정은 날이 갈수록 참혹해졌다.

 

 

      인조 34권, 15년(1637 정축 / 명 숭정 10년) 1월 14일(갑인) 2번째 기사 얼어 죽은 군          졸이 나오다. 당시 날씨가 매우 추워 성 위에 있던 군졸 가운데 얼어 죽은 자가 있었다.

인조 34권, 15년(1637 정축 / 명 숭정 10년) 1월 18일(무오) 1번째 기사 예조 판서 김상헌이 최명길이 지은 국서를 찢고 주벌을 청하다.

인조 34권, 15년(1637 정축 / 명 숭정 10년) 1월 25일(을축) 1번째 기사 성첩이 탄환에 맞아 모두 허물어지다. "대포 소리가 종일 그치지 않았는데, 성첩(城堞)이 탄환에 맞아 모두 허물어졌으므로 군사들의 마음이 흉흉하고 두려워하였다."

성안의 사정은 여의치 못했다. 군사들은 동사하고 식량은 바닥났다. 청태종은 항복을 권유하는 한편, 홍이포로 남한산성을 맹렬히 공격하며 조선을 압박했다. 마침내 1월 28일, 조정은 왕조의 공식 문서들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인조 34권, 15년(1637 정축 / 명 숭정 10년) 1월 28일(무진) 5번째 기사 문서를 모아 태우다. 제사(諸司)의 문서를 거두어 모아 모두 태웠다. 문서 가운데 간혹 적(賊)이라고 호칭한 등의 말이 탄로 나는 것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 삼전도비     ©최영숙

 

 그리고 1월 30일, 마침내 산성의 문이 열렸다.

인조 34권, 15년(1637 정축 / 명 숭정 10년) 1월 30일(경오) 2번째 기사 삼전도에서 삼배구고두례를 행하다. 서울 창경궁으로 나아가다.

 

용골대(龍골대)와 마부대(馬夫大)가 성 밖에 와서 상의 출성(出城)을 재촉하였다. 상이 남염의(藍染衣, 푸른색 융복) 차림으로 백마를 타고 의장(儀仗)은 모두 제거한 채 시종(侍從) 50여 명을 거느리고 서문(西門)을 통해 성을 나갔는데, 왕세자가 따랐다. 백관으로 뒤처진 자는 서문 안에 서서 가슴을 치고 뛰면서 통곡하였다.

상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하였다.

 

왕세자와 빈궁 및 두 대군과 부인은 모두 머물러 두도록 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장차 북쪽으로 데리고 가려는 목적에서였다. 상이 물러나 막차(幕次)에 들어가 빈궁을 보고, 최명길을 머물도록 해서 우선 배종(陪從)하고 호위하게 하였다. 상이 소파진(所波津)을 경유하여 배를 타고 건넜다. 당시 진졸(津卒)은 거의 모두 죽고 빈 배 두 척만이 있었는데, 백관들이 다투어 건너려고 어의(御衣)를 잡아당기기까지 하면서 배에 오르기도 하였다.

 

상이 건넌 뒤에, 한(汗, 청태종)이 뒤따라 말을 타고 달려와 얕은 여울로 군사들을 건너게 하고, 상전(桑田, 잠실 일대)에 나아가 진(陣)을 치게 하였다. 그리고 용골대로 하여금 군병을 이끌고 행차를 호위하게 하였는데, 길의 좌우를 끼고 상을 인도하여 갔다. 사로잡힌 자녀들이 바라보고 울부짖으며 모두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 하였는데, 길을 끼고 울며 부르짖는 자가 만 명을 헤아렸다. 

병자호란이 남긴 피해는 실로 막대했다.

인조 34권, 15년(1637 정축 / 명 숭정 10년) 2월 1일(신미) 1번째 기사 백관들이 모두 대궐 안에 들어가다. 이때 몽고(蒙古) 사람들이 그대로 성중(城中)에 있었다. 백관들은 모두 대궐 안에 들어가 있었는데, 여염(閭閻)이 대부분 불타고 넘어져 죽은 시체가 길거리에 이리저리 널려 있었다.

인조 34권, 15년(1637 정축 / 명 숭정 10년) 2월 3일(계유) 1번째 기사 호조가 경성의 백성들의 구휼책을 아뢰니 윤허하다.

 

호조가 아뢰기를, “경성에 사는 백성이 가장 혹독하게 화를 당해 남아 있는 자라고는 단지 10세 미만의 어린이와 나이 70이 넘은 사람들뿐인데, 대부분 굶주리고 얼어서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어린이의 경우는 계사년과 갑오년의 예에 의거하여 남들이 길러 노비로 삼도록 허락하고, 늙은이는 본조에서 진휼하여 구제하게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인조 34권, 15년(1637 정축 / 명 숭정 10년) 2월 9일(기묘) 5번째 기사 대신과 최명길을 인견하여 명나라와의 문제를 논의하다. 사론 대신 및 이조 판서 최명길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요즈음의 일을 가도(명나라 군대가 주둔한 섬)에 비밀리에 통고하려고 하는데 어떻겠는가?” 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명나라는 언제나 우리나라와 오랑캐 사이에 틈이 생기도록 하려고 했는데, 지금 통고하면 필시 일을 낼 것입니다.” “지금 만약 이런 주장을 하면 조정의 이른바 사론(士論)이 반드시 벌떼처럼 일어날 것이니, 말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끝내 비밀리에 통보하는 것이 불가하다는 뜻인가?” 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불가합니다. 지금 백성들이 모두 화친을 배척한 사람에게 죄를 돌리는데, 지금 어떻게 섬과 통하여 다시 시끄러운 단서를 일으킬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 남한산성의 옛 모습     © 최영숙

 

전쟁이 끝난 직후 도성의 민심은 척화론자, 즉 화친을 배척한 이들에게 싸늘하게 죄를 돌리고 있었다.

 

조선의 항복으로 백성들은 가혹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세자와 대신들이 인질로 잡혀갔고, 엄청난 공물이 부과됐다. 무엇보다 비참했던 것은 '피로인(被擄人)'이었다. 붙잡힌 사람을 뜻하는 이 말은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일반 백성들까지 노예로 부리거나 몸값을 받아낼 요량으로 붙잡은 민간인 포로를 뜻했다. 이때 끌려간 피로인은 약 50만 명으로 추정된다. 10만 대군이 들어와 50만의 조선인을 잡아갔으니, 이는 전쟁이라기보다 거대한 노예 사냥이었다. 

 

남한산성의 군량미 공급을 담당했던 공조참의 나만갑은 그의 저서 『병자록(丙子錄)』에 그 참상을 생생히 기록했다.

 

"적진 가운데 조선 피로인이 절반이나 되는데 그들이 무엇인가 호소하려 하면 청나라 군사가 철퇴로 때려 그 참혹한 정상을 차마 볼 수 없었다." "서강(현재 서울 마포구 일대 한강의 지류)을 오가며 적진을 살펴보니 우리나라 사람 가운데 어떤 이는 벌써 살해당했고, 어떤 이는 화살에 맞아 아직 목숨이 끊이지 않은 상태고, 어떤 이는 전하(인조)를 쫓아오다가 잡혀가고, 또 어떤 이는 전하를 향해 두 손을 모아 비는 등 비참한 모습뿐이었다."

 

▲ 장유 무덤     ©최영숙

 

 전쟁이 끝난 후에도 비극은 멈추지 않았다. 포로로 끌려갔다 천신만고 끝에 돌아온 여인들을 사회는 '환향녀(還鄕女)'라 부르며 정절을 잃었다고 손가락질했다. 1638년(인조 16), 최명길은 최초로 이들의 이혼을 반대하며 환향녀 비하를 금지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이후 대문장가이자 효종의 장인이었던 신풍부원군 장유가 청나라에서 속환되어 돌아온 자신의 외며느리(한이겸의 딸 한 씨)의 이혼 문제로 예조에 청원을 넣었다. 예조에서 처결을 미루자 최명길이 다시 나섰다. 최명길은 "대소신료들이 정사를 잘못 보필하여 나라가 약해 부녀자들이 끌려간 것이지, 부녀자들이 악의를 품고 간통한 것이 아니다"라며 속환된 부녀들의 이혼을 허락해서는 안 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과거 임진왜란 때 포로로 잡혀갔다 돌아온 부녀들의 전례를 따라 이혼하지 않고 함께 사는 것이 마땅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장유는 정조를 잃은 부녀가 사대부 가문에서 조상의 제사를 모실 수 없으며, 누구의 자손인지 알 수 없는 아이를 가문의 대들보로 기를 수 없으니 이혼시켜야 한다고 완강히 주장했다. 최명길은 만약 이혼을 명하면 지아비들이 처를 속환해오지 않을 것이며, 수많은 여인이 타국의 원혼이 될 것이라며 끝까지 반대했다.

 

결국 장유가 사망한 후 그의 부인이 다시 상소를 올리자, 인조는 "꼭 한 사람만 허가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전례가 될 수 없다"며 장유 가문에만 재취를 허락했다. 장유의 며느리는 그렇게 끝내 이혼을 당했다. 평생을 아버지를 따르고, 남편을 따르고, 아들을 따르며 삼종지덕을 강요받았던 조선의 여인들. 나라가 힘이 없어 당한 수모의 책임을 온전히 홀로 져야 했던 그들이 돌아와 정착할 수 있는 땅은 어디에도 없었다. 삼부종사를 하던 여인들이 대체 그 거대한 폭력 앞에 무엇을 할 수 있었단 말인가.

 

▲ 김상헌 묘에 잔을 올리다   비석에 유명조선이라고 쓰다 ©최영숙

 

답사단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당시 척화의 선봉에 섰던 예조판서 김상헌의 묘소를 참배했다. 맹자학당의 김광수 학동이 정성스레 잔을 올렸다. 김상헌은 1639년, 청나라가 명나라를 치기 위해 요구한 출병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청나라 심양으로 압송되어 4년 동안 감옥살이를 했다. 고국을 떠나며 그가 남긴 시조는 오늘날까지 깊은 울림을 준다.

 

"가노라 삼각산(三角山)아, 다시 보자 한강수(漢江水)야. / 고국산천(故國山川)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 시절이 하 수상(殊常)하니 올동말동하여라."

 

▲ 현절사     ©최영숙

 

성곽 기슭에 위치한 현절사(顯節祠)는 청나라에 항복하기를 끝까지 반대하다 심양으로 끌려가 참형을 당한 삼학사(윤집·홍익한·오달제)의 넋을 기리는 사당이다. 숙종 14년(1688년)에 그들이 끝까지 척화의 의리를 내세우던 곳인 남한산성 기슭에 이 사당을 지었으며, 숙종 19년에는 나라에서 ‘현절사’라 이름을 지어 현판을 내렸다. 숙종 25년에 이르러 3학사와 더불어 항복을 반대하던 김상헌, 정온 두 충신도 함께 모셨다. 조선은 왕조가 문을 닫는 순간까지, 몸은 비록 청나라의 신하가 되었을지언정 정신만큼은 명나라를 부모로 섬겼던 '유명조선'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극렬히 대립했던 주전파의 거두 김상헌과 주화파의 최명길이 훗날 청나라 심양의 감옥에 함께 수감되었다는 사실이다. 좁은 옥사에서 동고동락하며 두 사람은 마침내 서로의 방식이 모두 나라를 위한 충정이었음을 이해하게 된다. 그들이 감옥에서 주고받은 시에는 '경(經, 변치 않는 원칙)'과 '권(權, 상황에 따른 유연한 방편)'의 철학이 아름답게 담겨 있다.

 

김상헌의 시

 

성공과 실패는 천운에 달려있으니 / 成敗關天運

모름지기 의로 돌아가야 한다 / 須看義與歸

아침과 저녁을 바꿀 수 있을 망정 / 雖然反夙暮

웃옷과 아래 옷을 거꾸로야 입을쏘냐 / 未可倒裳衣

권은 혹 어진이도 그르칠 수 있으나 / 權或賢猶誤

경만은 마땅히 여러 사람이 어길 수 없다 / 經應衆莫違

이치에 밝은 선비에게 말하노니 / 寄言明理士

급한 때라도 저울질을 삼가라 / 造次愼衡機

 

최명길의 시

 

고요한 곳에서 뭇 움직임을 볼 수 있어야 / 靜處觀群動

진실로 원만한 귀결을 지을 수 있다 / 眞成爛熳歸

끓는 물도 얼음장도 다같은 물이요 / 湯氷俱是水

털옷도 삼베 옷도 옷 아닌 것 없느니 / 裘葛莫非衣

일이 어쩌다가 때를 따라 다를 망정 / 事或隨時別

속맘이야 어찌 정도와 어긋나겠는가 / 心寧與道違

그대 이 이치를 깨닫는다면 / 君能悟斯理

말함도 침묵함도 각기 천기로세 / 語默各天機

 

이 장엄한 화해를 보며 영의정을 지낸 이경여(李敬輿)는 다음과 같은 시로 두 사람에게 보내기를 다음과 같이 하였다. (『지천유사』)

 

두 어른 경ㆍ권이 각기 나라를 위한 것인데 / 二老經權各爲公

하늘을 떠받드는 큰 절개요(김상현) 한때를 건져낸 큰 공적일세(최명길) / 擎天大節濟時功

이제야 원만히 함께 돌아간 곳 / 如今爛熳同歸地

모두가 남관의 백발 늙은이일세 / 俱是南館白首翁 .

 

 

▲ 삼국시대부터 축조된 남한산성을 보다     ©최영숙

 

그로부터 360여 년이 지난 오늘날, 조선의 후손들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남한산성을 김진희 광주시 문화관광해설사의 깊이 있는 안내를 받으며 걸었다. 해설을 들으면서 답사하는 과정은 공간의 깊이를 더해주었다.

 

해설사는 "남한산성은 1963년 1월 21일 남한산성의 성벽이 국가 사적 제57호로 지정되었고, 1971년 3월 17일 남한산성은 경기도립공원으로 지정된 후, 2014년에 마침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세계문화유산 위원들이 남한산성을 방문했을 때, 신라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축조된 성벽의 층위들을 보며 탄성을 자아냈다. 등재 심사 당시 위원들이 머무는 숙소 창밖으로 산성이 바로 내려다보이도록 동선을 짜는 등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고 등재 비화를 들려주었다.

 

답사를 마치고 돌아와 다시 실록을 읽으면서, 당시 조선의 국가 위기 관리 능력이 얼마나 취약했는가를 절감하게 된다. 수많은 전조와 경고등이 켜졌음에도 불구하고, 위정자들은 탁상공론과 설전으로 귀한 시간을 허비했다.

 

▲ 김사헌 묘로 가는 길에 익은 산딸기     ©최영숙

 

이날 답사에 참여한 이들에게 남한산성을 걸은 소회를 물었다.

 

남한산성을 답사한 맹자학당 심우일 훈장은 “더 이상 갈팡질팡하다 국난을 맞는 서글픈 역사가 반복되지 않았으면 좋겠구요. 또한 그러려면 우리가 실력을 키우기 위해 노력을 많이 해야겠죠”라며 소감을 전했다.

 

박정란 소래중학교 사서는 “맹자를 배우는 좋으신 분들과 두 번째 참여한 맹자기행, 치욕의 역사 현장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된 과거와 현재를 보며 다음 세대에 물려줄 미래를 함께 보았습니다. 김상헌 묘소로 가는 길에서 따 먹은 산딸기는 어린 시절을 생각나게 해주었습니다. 행복한 하루였습니다”라고 말했다. 시흥문화해설사 박종남 씨 역시 “남한산성 안에서 굶주림과 추위를 안고 적의 공격 앞에 두려워했을 조선의 백성, 그들의 모습이 떠올라 안타까웠습니다”라고 전했다.

 

▲ 숲길을 걷다     ©최영숙

 

김영자 소래고등학교 상담사는 “남한산성을 몇 해 전 두 번 정도 다녀왔다. 별 기대감 없이 맹자학당 학우들과 함께하는 것만으로 좋아서 무조건 따라나섰던 이번 여행은 남한산성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여행이었다. 해설사님과 우리 일행들이 두 시간 함께하며 들었던 이야기, 마지막 답사지로 갔던 김상헌 묘 가는 길의 산딸기는 어린 시절 먹던 그 맛이었다. 동행한 선생님들 덕분에 짧은 하루의 남한산성 기행은 오랫동안 기억 저장고에서 나를 행복하게 할 여행이었습니다”라며 미소를 지었다.

 

이상애 소래고등학교 사서는 학문의 본질에 대해 깊은 의문을 던졌다. “여러 번 갔던 곳을 기행을 통해 또 왜 가는지 묻는 분들도 계셨는데… 이번 남한산성 맹자기행을 통해 더 본질적으로 접근할 수 있었던 거 같다. '조선 시대 사대부들은 왜 학문을 했을까?' '그들이 말하는 의(義)라는 것이 이 나라 우리 백성이 우선인 의가 아닌데 의란 도대체 무엇일까?' 그와 같은 '본질을 떠난 논쟁이 의미가 있을까?' 『대학』에는 학문을 하는 이유를 밝은 덕을 밝힘에 있는 명명덕(明明德), 백성과 친함에 있는 친민(親民), 지극한 선에 머무르는 지어지선(止於至善),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라는데, 이번 기행을 통해 학문의 방법론과 목적에 대해 깊이 생각했다”고 전했다.

 

▲ 무망루     ©최영숙

 

수어장대 옆에 무망루가 있었다. 원래는 수어장대 2층에 있었으나 지금은 올라갈 수 없고, 대신 이곳에 세운 것이라고 한다. 무망루의 2층 누대는 영조 때인 1751년 유수 이기진이 지었고, 헌종 때인 1836년 유수 박기수가 중수한 것이다.

 

무망루는 병자호란 때 인조임금이 삼전도에 나아가 청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한 번 절할 때마다 이마를 세 번씩 조아려야 했던 삼배구고두의 치욕, 그리고 청나라의 심양에 끌려가 8년 동안이나 볼모로 잡혀 있다가 돌아와 북벌을 꾀하였으나 끝내 그 한을 풀지 못하고 승하한 효종임금의 원한을 잊지 말자는 뜻으로 영조께서 이름한 것이라고 한다. 무망루의 뜻은 '무망' 즉 '잊음이 없다', '잊을 수 없다'는 뜻이다.

 

역사를 잊지 않는 민족은 다시 그 전철을 밟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그 전철을 한 번 더 밟았다. 우리나라의 지정학적인 위치는 변하지 않는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위험은 끊임없이 밀려온다. 그렇다면 지금의 위정자들과 국민들은 과연 어떤가 생각해 보았다. 역사가 새삼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대처할 수 있을 때는 그나마 늦지 않은 것이다. 자신의 자리에서 굳건히 지켜보고 대응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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