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2월 22일(화) 오전 11시, 시흥시 장곡동 매꼴어린이공원에서 ‘인선왕후 동상(좌상)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인선왕후(仁宣王后)는 본관이 덕수(德水) 장씨(張氏)이며, 휘호는 경렬명헌(敬烈明獻)이다. 아버지는 신풍부원군(新豊府院君) 장유(張維)이며, 어머니는 우의정을 지낸 김상용의 딸이다. 인선왕후는 1618년(광해군 10) 12월, 시흥 장곡동 안골마을(현재 동양아파트 자리)에서 출생하였다. 이후 1631년 14세의 나이에 봉림대군(鳳林大君: 효종)과 혼인하여 풍안부부인(豊安府夫人)에 봉해졌다.
병자호란 후에는 소현세자 내외, 봉림대군과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8년간 심양에서 기거하였으며, 그곳에서 훗날의 현종을 낳았다. 소현세자가 먼저 귀국했으나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 후, 한 달 뒤 봉림대군이 귀국해 세자로 책봉되었다. 장씨는 1646년 3월 세자빈으로 책봉되었고, 인조가 승하한 뒤 효종이 왕위에 오르자 정식으로 왕비가 되었다.
효종 못지않은 강렬한 북벌론 지지자였던 인선왕후는 왕과 더불어 매우 검소한 생활을 했다. 궁중의 굿판을 근절하고 금주령을 내리는 한편, 이불의 색을 적색과 청색 두 가지로 통일하여 전시에 군복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철저히 대비했다. 이렇게 아낀 재원은 모두 북벌 계획을 지원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러나 1659년, 효종이 종기 치료 중 침을 맞다가 과다출혈로 재위 10년 만에 승하하면서 북벌론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아들 현종이 즉위한 후 인선왕후는 왕대비로서 ‘효숙(孝肅)’의 존호를 받았으나, 세력이 커진 조정대신들에 의해 점차 실권에서 멀어졌다. 소생으로는 현종과 6명의 공주를 두었으며, 남편의 못다 이룬 북벌 계획을 가슴에 품은 채 1674년(현종 15) 57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현재 인선왕후가 태어난 장곡동 안골마을 벽면에는 그의 초상화가 아름답게 그려져 있다.
이날 행사는 내빈 소개와 감사패 증정, 덕수장씨중앙종친회 장경웅 회장의 기념사 및 축사에 이어 장엄한 제막식 순으로 진행되었다.
장경웅 회장은 기념사를 통해 “오늘 덕수장씨 인선왕후 탄신 397주년을 맞아 시흥시청에서 공적 예산을 들여 ‘인선왕후의 뜰’을 조성해 주시고, 황후님의 조형물 건립에 힘써주신 김윤식 시장님과 윤태학 시의회 의장님을 비롯해 함진규 국회의원님, 인선왕후 본가의 직계손인 현대컬러그룹 장양수 사장님, 장경우 전 국회의원님, 그리고 먼 길을 찾아와 주신 내빈 여러분께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며, “왕릉은 여주에 효종대왕과 함께 상하릉으로 봉해졌으며, 매년 6월 23일 효종대왕 기신제에 덕수장씨 종친회에서 아헌관으로 봉사하고 있다. 오늘 인선왕후의 생애를 되돌아보고 그분의 높은 덕목을 기리며 다시 한번 존경과 영광을 올린다”고 전했다.
인선왕후는 시흥시의 대표 축제인 ‘시흥갯골축제’에도 등장한 바 있다. 당시 장곡동을 대표하여 인선왕후로 분장한 장곡중학교 학생이 거리 퍼레이드를 펼쳐, 시흥시민과 장곡동 주민들에게 역사 속 인물을 더욱 친근하게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처럼 시흥시에서 인선왕후와 그의 아버지 장유가 남긴 역사적 그늘은 무척 깊고 넓다.
인선왕후의 아버지 장유는 조선의 4대 문장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시흥 조남동에 위치한 그의 묘소와 신도비는 1986년 3월 3일 시흥시 향토유적 제2호로 지정되었다. 장유는 나이 서른이 되기 전, 네 딸을 불과 스무 날 만에 모두 잃는 참척(慘慽)의 고통을 겪고 ‘어린 것들의 죽음을 애도하며’라는 제하의 시를 남겼다.
"내 나이 삼십도 안 돼 인생의 슬픔 여러 번 겪네.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까 스무 날 만에 네 아이를 잃어야 하다니. 맏딸은 아홉 살이 지났고 막내딸은 겨우 돌박이이며 둘째딸은 막 일곱 살인데도 슬기로워 알지 못하는 것이 없었네. 가장 잊지 못할 앤 아철이니 불쌍케도 생김새가 기이해 때로는 성을 내며 책장을 어지럽히고 대추 배 내놓아라 귀찮게도 굴었지 평소 눈 앞에서 보던 것처럼 생생히도 마음 속 깊이 남아 있는데 손바닥 안에 있던 네 구슬 하루아침에 다른 사람이 빼앗아 갔네. 예쁜 꽃술처럼 참으로 귀엽기도 했는데 비바람에 남은 것이 없는 텅 빈 가지. 내버려 두고 억지로 마음을 펴고 눌러 보지만 생각할수록 스스로를 지탱하기 어려워 상여에 실어다 빈산에 묻으니 네 무덤 서로 보루처럼 의지하네. 하늘을 향해 통곡하노라니 뜬구름도 날 위해 더디 가네. 악덕을 쌓아 재앙을 불렀으니 어디를 향해 원망할 것인가 동문오 같은 이를 생각해 보면 정 떼지 못하는 일 부끄러워라".
시절의 한이 서린 시를 읽다 보면, 사랑하는 네 딸을 한꺼번에 잃고 피눈물을 흘렸을 아버지의 슬픔이 가슴에 고스란히 전해진다. 인선왕후는 이 모진 아픔을 겪은 후에 태어난 딸이었다. 그러니 아버지 장유에게 인선왕후가 얼마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한 자식이었을지 깊이 상상이 가고도 남는다.
장유는 장곡동에 은거한 지 6년째 되던 32세 때, 그간 은거지에서 집필한 글을 모아 문집 《묵소고갑(默所稿甲)》 4권 2책을 편찬하고 자서(自序)를 지었다.
조선 최고의 문장가였던 아버지의 재능을 이어받아서인지, 인선왕후 역시 시집간 딸들에게 수많은 한글 편지를 남겼다.
보물로 지정된 《인선왕후언간(仁宣王后諺簡)》은 인선왕후가 다섯 공주 등에게 내린 한글 편지로, 둘째 숙명공주에게 53건, 셋째 숙휘공주에게 16건 등 총 70건에 달한다. 이 편지들은 당시 부녀자들과 국문 소설의 관계, 중국 소설의 언해 시기 등을 연구하는 데 매우 귀중한 국어학적·역사적 사료가 되고 있다.
이번에 건립된 인선왕후 좌상의 뒷면에도 딸들에게 보낸 편지글들이 정성스레 새겨져 있다. 특히 숙휘공주에게 보낸 편지에는 시집간 딸을 그리워하는 친정엄마의 절절한 사랑이 그대로 묻어난다.
인선왕후는 외손자 또한 자주 궁으로 불러 사랑을 쏟았다. 다음은 아파서 집으로 돌려보낸 외손주를 걱정하며 숙명공주에게 보낸 자상한 편지다.
한 나라의 기품 있는 국모였지만, 딸과 손주 앞에서는 그저 따뜻하고 자상한 어머니이자 할머니였던 인선왕후의 편지글은 현대의 우리에게도 무척 다정하고 친근하게 다가온다.
인선왕후의 능은 경기도 여주에 위치한 영릉(寧陵)이다. 남편인 효종대왕과 함께 왕과 왕비의 무덤을 위아래로 배치하는 동원상하릉(同原上下陵)의 양식으로 조성되어 나란히 영면에 들어 있다.
<저작권자 ⓒ 시흥장수신문(시민기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시흥기록, 인선왕후, 장곡동 관련기사목록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