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배산 아래 아늑함 - 광석동 [둔터골]

<연재>할아버지에게 듣는 마을이야기

심우일 | 기사입력 2008/08/16 [16:25]

범배산 아래 아늑함 - 광석동 [둔터골]

<연재>할아버지에게 듣는 마을이야기

심우일 | 입력 : 2008/08/16 [16:25]

시흥시청에서 동북쪽으로 약1km 지점에 [범배산]이 있다. 그 산 아래 위치한 자그마한 농촌 마을로 들어선다. 맑은 하늘의 뭉게구름과 녹색의 초목들이 정겹다. 무더위는 기승을 부리며 연실 땀을 훔치게 한다. 마을길을 따라 걸으며 길가의 포도나무와 옥수수에 시선을 멈춘다. 논과 밭의 곡식들이 아주 잘 익어간다. [참나무 고개]옆의 과수원에는 복숭아가 주렁주렁 탐스럽게 매달려 있다. 옛 가옥들이 친근함을 준다. 집 앞 마당에는 경운기도 있고, 고추 말리는 모습도 볼 수 있다. 한우도 있다. 누런색의 황소다. 왠지 힘이 솟구친다. 마을회관에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이 모여서 세상을 이야기 하신다. 아늑함과 평온함이 느껴지는 마을 분위기다. 이 마을은 시흥시 광석동의 [둔터골]마을이다.

▲ 시흥시청 방향에서 바라본 [둔터골] 마을 모습  -  멀리  보이는 산이 [범배산]  © 심우일




■ 마을 이름 유래

마을 이름은 우리말로 [둔터골]이다. 이를 한자로 표기하면 [둔대곡 屯垈谷]이다. 또한, 1900년대 초까지만 해도 [하하리 下下里]라고 불렀다. 이를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둔대곡]이라고 표기 한 것은 [대 垈]가 [터]를 뜻하고, [곡 谷]은 [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하리]라고 한 것은 인근 마을인 [하상리][하중리]처럼 [하직곶하리]를 줄여 부른 데서 기인한다.

[둔터골]이라는 마을 이름의 의미는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 왔을 때, 높은 둔덕에 위치한 마을]이라고도 하며, 또한, [군사들이 진을 치고 주둔했던 마을]이라고도 한다. 이외에도 [돌이 많은 마을]에서 유래되었다고도 하지만 어느 것 하나 정확한 근거는 없다.


▲ 새주소 표지판에 [둔대곡]이라고 적혀있음     © 심우일



■ 마을의 평안을 위해서

‘나라와 마을의 평안을 위해서 매년 고사를 지냈어’ 라고 전경의(81세)할아버지는 말씀하신다. 바로 당고사(堂告祀)이다. 음력 10월에 좋은 날을 택하고, 집집마다 쌀 한 되씩 걷어서 지낸다. 마을에서 연세가 있으면서 복이 많은 당주(堂主-당고사를 준비하는 사람)를 1명 선정하여 당고사 음식을 준비하도록 한다. 당고사는 마을의 주된 출입구 3곳에 서있는 장승에게 고사를 지내면서 시작한다. 이어서 [큰우물]과 [고래우물(아래우물)]에 지내고, 마지막으로 [당재]에 올라 당집에 음식을 차려놓고 당할아버지와 당할머니에게 고사를 올린다. 마을 사람들은 절도하고 소지(燒紙-소원하는 바를 조그만 종이에 적어서 불에 태우는 것)를 하며, 무당을 불러 굿을 하고 마친다. 당고사가 끝나면 제수로 사용했던 쇠머리를 이용하여 음식을 온 동네 사람들이 나눠 먹었다. 이렇게 하면서 마을의 안녕도 기원하고 마을 주민간의 동질성을 확인했다.


▲ 당고사를 지내던 [당집] 모습     © 심우일



■ 마을의 전설

마을 중간에 아주 오래된 나무가 한 그루 있다. 마을과 고락을 함께 해온 회(檜)나무이다.

이 나무를 심으면 가문과 마을이 번성하고 잡귀신을 몰아낸다고 하여 우리나라 곳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신목(神木)인데, 이 마을 주민들이 이 나무를 심은 뜻도 예외가 아니리라.

마을 사람들은 이 회나무를 아주 신성시했다. 나뭇가지를 일부러 부러트리거나 썩어 부러진 나뭇가지를 집에 가져다 땔감으로 사용 하지도 않았다. 1945년 여름에 회나무의 큰 나뭇가지 하나가 바람에 부러졌는데, 마을 어르신들은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려고 부러졌다고 하여 ‘해방 바람에 부러졌다’라고 말씀하신다.

이 나무 바로 아래 [큰우물]이 있다. 이 우물의 물을 마시면 늙지 않는다고 하여 일명[불로초 우물]이라고도 하며, 약수로 여기고 마셨다. 지금도 온 동네 사람들이 이 우물을 이용했던 흔적이 역력하다. [회나무]와 [큰우물]이 마을 사람에게 생기와 희망을 불어 넣어주던 역할을 했음직하다.


▲ 마을 지킴이 [회나무] - 마을 사람들은 장현택지지구로 개발되더라도 보존을 원하고 있음     © 심우일



■ 아~ 두레여!

마을의 주업은 농사였다. 경작지는 간척으로 조성된 드넓은 [앞방죽][홍축][유축]의 들판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농사를 지으며 두레를 꾸몄다. 논에서 김매기 하며 오는 고된 노동을 음악으로 달랬던 것이다. 깃대를 높이 들고 꽹과리, 북, 장고, 소고를 치면서 한바탕 신나게 놀면서 일을 했다. 인근 [새재]마을과 [벼슬구이]마을의 두레와도 어울리며 함께 흥겹게 일을 했다. 아무리 봐도 일을 일로 여기지 않고, 음악과 함께 흥을 돋우며 일을 즐기는 고유의 미풍양속이 아닐 수 없다. 모내기 이후 고단하게 지속해온 김매기를 마지막으로 끝내면서 ‘호미씻기’를 한다. [범배산] 옆의 [개나리봉][당재]에 올라가서 온 주민이 하루 동안 먹고 마시며 논다. 인근 마을의 두레패도 초청하여 같이 흥겹게 논다. 공동체 문화의 전형이 아닐 수 없다. 이런 두레도 시대의 변화에 따라 사라진지 오래다. 김매는 기계와 제초제의 등장이 한 요인이 되었다.



▲ 마을의 주된 논농사 지역인 중의 하나인 [앞방죽들] 모습 - 두레패의 김매기 모습이 사라진지 오래다    © 심우일



이렇게 살았지

마을 앞 39번 국도는 일제시기에 신작로로 개설한 도로다. 집집마다 길을 닦으러 의무적으로 나가야 했다. 당연히 무보수다. 끼니용으로 메수수밥을 줘서 먹었을 뿐이다.

마을 앞의 [장현천]의 둑이 여름철 장마 때면 자주 터지고, 그 주변의 [앞방죽]들판이 온통 물바다가 되었던 적이 많았다.

[참나무고개]는 마을 사람들의 놀이터였다. 산소 때문에 잔디가 있어 놀기가 좋았고 넓었다. 축구도 하고 씨름도 했던 곳이다. 이대동(86세)할아버지는 ‘웃마을과 아랫마을로 나누어서 정월 대보름에 여기서 줄다리기를 했지, 집집마다 짚을 거둬가지고 굵은 동아줄을 만들어서 했어’라고 회상하신다.

마을의 당고사는 일제 시대에 탄압의 대상이었다. 당시의 수암면 소재 파출소에서 마을에서 당고사를 지내는 사실을 알고, 마을 주민들을 끌고 가서 수암의 [갯다리] 근처에서 치욕을 주면서 당고사가 사라졌다.

소사역(지금의 부천역)으로 가기 위해서 포동까지 걸어가서 버스를 탔다. 왜냐하면 일제시대 때에 부천에서 포동까지만 버스가 다녔기 때문이다.


 

▲ 마을 앞 39번 국도 - 이제 이 일대에 [시흥시청역]이 들어서게 됨    © 심우일

■ 정든 마을을 남기고
 
이 마을도 2004년 7월 장현택지개발지구로 지정되었다. 지금 보상이 진행 중이다. 가족처럼 다정하고 인심 좋았던 사람들과 마을을 아늑하게 감싸주며 안온함을 선사해주었던 [범배산]과도 헤어질 날이 멀지 않았다.

농촌의 평화스런 맛을 흠뻑 주는 마을 분위기에 개발을 아쉬워하는 듯한 매미의 요란한 울음소리가 더해진다. 어느 것 하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멋스러운 풍경들이다. 이제 [범배산]만 남고 아파트 세상이 다가온다. 그때도 지금과 같은 아늑함이 숨 쉴 수 있을까?

▲ [둔터골 마을]에서 바라본 [시흥시청]과 [새재마을] - 미래의 [둔터골 마을] 모습을 보는 듯함     © 심우일
쌀사랑 24/06/18 [09:54] 수정 삭제  
  저는 광석2동(둔터골에 살았읍니다 다름이아니라 지금은 없지만 마을에있던 600백년돈 회나무가 잇엇는대 그나무의 사진을꼭 시흥시 보호수에 올리고 십네요 생존에업어 안된대고하는데 내생각으로는 시흥시에서는 그만한나무기업을것으로생각합니다 그냥지나가기에는 너무 아쉬웁네요 문화원에서는 안된다고하는데 다시한번 잘생각해주시길 부탁드림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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