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해의 시집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김민지(김순기) | 입력 : 2018/01/31 [11:01]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영하 12도란다. 2018년 1월 10일 날씨다. 영하라는 말에 몸부터 반응하면서 마음도 춥다. 그런데 그 영하의 날씨를 뚫고 거실로 쏟아져 들어온 햇살은 따뜻하고 방전된 마음을 충전시킨다.
햇살 닿은 거실 바닥에 다리를 쭈욱 펴고 벽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이선희의 ‘인연’이 해바라기의 ‘내 마음의 보석 상자’가 이문새의 ‘광화문 연가’ 등 노래가 햇살에 꼬물거리며 거실을 가득 메운다. 참 행복하고 편안한 시간이다. 비록 오후에 출근하지만.
믹스 커피를 타서 책꽂이로 향했다. 내 시선이 머문 곳에 유난히 빨간 표지의 책이 눈에 띄었다. 박노해의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라는 시집이다. 맨 뒷장에 2011년이라고 메모되어 있으면서 ‘힘을 얻다. 이 시집을 읽으면’ 라고 쓰여 있다.
시집 치고는 깨나 두껍다. 페이지가 556P이다. 다시 읽었다. 햇살이 나를 찾아와 유혹한 날, 아주 편안한 자세와 마음으로.
책 소개에 ‘세계화 모순의 현장에 뛰어들어 그 슬픔을 직접 발로 체험한 박노해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정직한 절망, 분쟁의 현장을 바라본 객관적인 상처와 깊은 슬픔을 그대로 드러냈다. 특히 이번 시집은 넓은 시공간을 배경으로 세계 곳곳을 직접 돌며 시인이 체험하고 바라본 세계의 민초들의 삶을 풀어내고 있어, 깊은 울림을 전한다.’라고 했다.
책에서 첫 번째로 시작하는 시다.
-길이 끝나면-
길이 끝나면 거기
새로운 길이 열린다
한쪽 문이 닫히면 거기
다른 쪽 문이 열린다
겨울이 깊으면 거기
새 봄이 걸어나온다
내가 무너지면 거기
더 큰 내가 일어선다
최선의 끝이 참된 시작이다
정직한 절망이 희망의 시작이다
‘나무가 그랬다’라는 시는 내가 좋아하는 시다. 이 시를 읽고 등산을 가서 나무를 보면 이 시에서 말한 것처럼 나무가 나한테 그렇게 인생의 한 수를 던져주는 느낌이었다.
-나무가 그랬다-
비바람 치는 나무 아래서
찢어진 생가지를 어루만지며
이 또한 지나갈거야 울먹이자
나무가 그랬다
정직하게 맞아야 지나간다고
뿌리까지 흔들리며 지나간다고
시간은 그냥 흘러가지 않는다고
이렇게 무언가를 데려가고
다시 무언가를 데려온다고
좋은 때도 나쁜 때도
그냥 그렇게 지나가는 게 아니라고
뼛속까지 새기며 지나가는 거라고
비바람 치는 산길에서
나무가 그랬다
나무가 그랬다
햇살이 시간에 떠밀려 거실에서 사라지고 있다. 다음 날 다시 똑같은 자세로 박노해 시집을 읽었다. 또 햇살이 사리지고 있다. 햇살이 떠난 자리에 침묵이 혼자 우두커니 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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