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겨울을 추억하면서 2.
-설경 속 오대산-
김민지(김순기) | 입력 : 2018/01/23 [10:38]
-지난 겨울을 추억하면서 2.
-설경 속 오대산-
어린아이처럼 잠이 쉽게 들지 않는다. 뒤척거리다 잠이 들고 깨기를 반복하다가 정작 기상 시간에는 늦잠이다. 서둘러 이것저것 볶아서 주먹밥을 만들고 메모지와 볼펜을 챙겨서 현관문을 나선다. 뉴스에서는 많은 눈이 내릴 것이라 한다.
입구에서 바라다본 오대산은 하얗다. 산 전체가 백색인 은빛으로 반짝인다. 나무들은 크리스마스트리로 변신하였다. 나무들이 눈을 뒤집어쓰고 꽃을 피웠다. 마술에 걸려 눈 나라에 온 기분이다. 눈길 가는 곳이면 어김없이 설경에 옴짝하지 못한다. 최면에 걸린 것처럼 입에서는 알 수 없는 말이 툭 터져 나온다. 아!
눈길을 걷다가 천수답을 떠올리게 하는 특이한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중대사’를 만났다. 산자락에 있는 인삼밭을 연상케 하는 절이다. 겨울산행은 바람과 눈 그리고 낮은 기온, 이 세 가지 조건이 맞아야 제격이라고 하는데, 지금 오대산이 세 가지 조건을 다 갖추었다. 이 설산을 걷는 동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영화 속 한 장면.
“당신이 슬픔이나 회한 같은 걸 하나도 지니지 않은 여자였다면 난 당신을 이토록 사랑하지 않았을 거요. 나는 한 번도 발을 헛디디지도 않고 오류를 범하지 않은 그런 사람을 좋아할 수가 없소. 그런 사람의 미덕이란 생명이 없으며 따라서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이니까. 그런 사람은 인생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한단 말이오.” 이 말은 '러브스토리’에서 설원 위에서 펼쳐지는 두 남녀의 사랑이야기 중 남자가 여자에게 건네는 대사이다. 겨울에 내리는 눈은 우리를 로맨틱한 꿈을 꾸게 한다.
어디선가 설산을 흔드는 스님의 독경소리를 따라가 적멸보궁 문밖에서 합장하고 비로봉으로 해서 상왕봉으로 올랐다. 어느 순간 눈앞에 내 키보다 서너 배나 되는 고사목이 된 주목이 조용히 누워 있다. 그 죽음의 흔적보다 그 위에 쌓이는 눈이 애증하다.
눈으로 지난날 생의 화려함을 다시 꽃피우려는지 눈송이가 주목으로 내려앉는다. 주목을 바라다보다가 일행과 거리가 생겼다. 걸음을 재촉하여 가다가 겨우살이를 보았다. 손이 닿을 수 없는 나무 꼭대기에 혹한의 날씨에도 푸른빛을 잃지 않은 겨우살이를 가까이서 처음 보았다. 나뭇가지에 붙어 있는 모습이 바다 식물 해초와 비슷하다. 겨우살이는 산새들의 먹이이면서 새들에 의해 다른 나무로 옮겨져 퍼진다.
우~우 하고 지나가는 바람이 나무들을 흔들어댄다. 겨울나무를 보면 승자의 모습이 아니라 초라한 패자의 모습 같다. 나무들은 겨울이 오면 자기의 약한 것을 순순히 인정하고 추위 속에서 살아남으려고 애쓴다. 새봄에 영광의 승리를 만끽하고자 약한 모습으로 서 있는 것은 아닐는지.
그 약함이 너무나 의연하고 대견하다. 나무 사이에서 두 팔을 벌리고 눈을 감았다. 세찬 바람이 뺨을 차갑게 때린다. 이대로 서 있으면 눈사람이 되어 오대산과 함께 할 것 같다. 오대산에서 행복했던 순간이 생의 한 컷으로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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