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현관문을 열고 나섰을 때, 비가 내리는 중이다. 길은 먼저 내린 눈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로 미끄러웠다. 약간은 불안한 마음으로 차에 올랐다. 그런데 남부 지방으로 내려 갈수록 하늘은 맑았다. 텅 비워가는 들판과 바람이 드나드는 산은 수묵화 이미지를 닮았다.
수렴리 ‘할매 바우’라는 표지판에서 파도 소리길을 시작하였다. 우선 ‘파도 소리길’이라는 명칭이 기대되면서 궁금증을 만들었다. 이내 해변으로 갔다. 수평선에 걸려 있는 배의 모습도 하늘에 걸려 있는 구름도 찰나의 시간에서 풍경을 그렸다 지웠다를 반복한다. 해변으로 막 들어섰을 때, 바다에서는 해녀 분들이 물질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바다와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경으로 머문다. 그것도 잠시 가슴 뭉클하게 하는 광경이 해변에 펼쳐져 있다. 그분들이 벗어 놓은 고무신들이다. 그 고무신에서 삶의 버거운 무게가 느껴진다. 얌전히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고무신이 파도 소리를 들으면서 어머니들의 자서전을 쓰고 있다.
바다에는 다양한 주상절리가 눈길을 끈다. 기울어지거나 누워있거나 위로 솟거나 한 주상절리가 바다와 만나 감상하기 좋은 풍경이다. 크고 작은 용암의 흔적들이 파도에 깎여서 작은 섬처럼 떠 있기도 하다. 파도 소리에 취해 걷다가 발을 멈추었다.
파도가 해변으로 달려와 몽돌과 부딪힌다. 이내 되돌아가는 파도에 몽돌은 답하듯 따그리~락 따그~리락 소리로 이제껏 들어본 적 없는 음을 낸다. 나도 파도를 따라 앞으로 갔다가 뒤로 도망치기를 여러 번 하면서 장난을 쳐본다. 몽돌의 음표는 잊을 수 없는 시간으로 나를 이끈다. 내가 걷고 있는 곳이 ‘파도 소리길’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이유를 깨닫는 순간이다.
참 아쉽다 파도와 장난치며 앞을 보니 우리 님들은 저 멀리 걷고 있다. 파도 소리길에서는 적어도 10분 이상은 그 소리에 귀 기울여하는데~~~바쁜 일상이 따라와 재촉하는가?
우리는 잠시 몸과 정신을 휴식하러 왔는데 앞으로만 나가기 바쁜 발걸음. 그 발걸음을 바위에서 생을 이어가는 소나무가 멈추게 한다. 바로 저것이 숙명이구나!
올여름 경주에서 큰 아이가 발굴 현장에서 일을 했다. 그때 경주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비가 안 내린다는 말과 기온이 다른 지역보다 높았다는 말. 다시 소나무를 보았다. 삶은 버티고 견디어 내는 것이라고 말하는듯하다. 바람에 흔들리는 것은 바위가 아닌 소나무다. 그 흔들림이 살아있다는 증거다.
문득 차 안에서 듣던 ‘어린 왕자’가 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한다고 말한다.
어른들에게 새로 사귄 친구 이야기를 할 때면, 그들은 가장 중요한 것은 전혀 묻지 않는다.
"그 친구 목소리는 어떠니? 그 애는 무슨 놀이를 좋아하니? 나비를 수집하니?"라는 말을 절대로 하지 않는다. 다만
"나이가 몇이니? 형제는? 체중은? 아버지의 수입은 얼마니?" 하는 것들만 묻는다. 그래야 어른들은 그 애를 잘 알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만약 어른들에게
"장밋빛 벽돌로 지은 예쁜 집을 봤어요. 창가엔 제라늄 화분이 있고, 지붕에는 비둘기가 있 어요."라고 말하면 그들은 그 집이 어떤 집인지 상상해 내지 못한다. 그러나
"십만 프랑 짜리 집을 봤어요." 라고 말하면 그제야 그들은
"야아, 참 좋은 집이구나!"
이것은 일상에서 흔히 듣는 말들이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은 어린 왕자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자연에 도취되기를.
단연코 주상절리의 끝판왕은 부채꼴 모양이다. 사방으로 펼쳐진 모습이 곱게 핀 한 송이 해국처럼 보인다고 해서 ‘동해의 꽃’이라고도 표현한다. 그 모양이 주름치마 같기도 하고 꽃봉오리도 닮았다. 오랜 세월의 흔적은 우리에게 감동도 주지만, 가치를 넘어 명품으로서 품위가 있다.
흔적의 뜻이 ‘어떤 일이 진행된 뒤에 남겨진 것. 또는 그런 자취’라고 한다. 오늘 우리와 마주친 신성대 시대, 어제, 오늘 그리고 찰나의 흔적들을 만나면서 힐링도 하고 상처도 받는다. 우리는 파도 소리길에다 어떤 흔적을 남기고 있나.
해변에 앉아서 몽돌을 만지작거렸다. 파도가 바다 바람이 만들어 놓은 몽돌에서 바다의 이야기가가 물씬 풍긴다. 해서는 안 되는 일인 줄 알면서도 몽돌 몇 개를 주어서 호주머니에 넣었다. 그들이 들려준 연주가 아쉬워서.
2017년 12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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