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6월4일 갯골을 따라 줄지어 서 있던 소금창고 40동 가운데 38동이 파괴됐다. 옛염전 일대를 소유하고 있던 (주)성담이 골프장을 추진하면서 소유지 내 소금창고 38동을 무단으로 철거한 것이다. 문화재 등록 심사 사흘전 일이었다. 남은 2동은 시유지에 속해 간신히 철거를 피할 수 있었다. 시흥 시민들은 기억속에 언제나 늘 있던 소금창고가 하루 아침에 파괴되자 분노했다. 대책위가 꾸려지고 (주)성담이 운영하는 시화이마트의 불매운동까지 벌였지만 이미 사라져버린 소금창고를 어쩔 수 없었다.
기억속에 남은 소금창고의 흔적은 옛 염전 일대 허허 벌판과 무너져 버린 잔재 뿐이었다. 사라지고서야 소중함을 깨달았다. 남아 있는 기록마저 소중했다. 최영숙 작가의 소금창고 사진이 주목받은 것은 단순히 없어진 것에 대한 기록이기 때문은 아니다. 한 동, 한 동 이름을 붙여주고 밤이고 낮이고 수없이 찾아가 계절의 변화, 날씨의 변화, 세월의 변화를 고스란히 담아낸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소금창고를 시작으로 무덤, 사라진 마을, 그리고 시흥을 담아내고 있는 최영숙 작가를 만났다.
목포에는 이난영이 있는데 시흥에는 뭐가 있지?
최영숙 작가의 활동에는 ‘목포의 눈물’을 부른 가수 이난영을 빼놓을 수 없다.
“하루는 친구들하고 목포 유달산에 갔는데 젊은 여성들이 있었어. 슬리퍼를 신고 온게 동네 사람들 같았어. 근데 자기들끼리 하는 얘기가 노래방에서 목포의 눈물을 부르는데 한 명이 가사를 보고 불렀다고 자존심 상해하는 거야. 가사를 외우질 못했다고. 근데 그 순간 질투가 확 나는 거야. 나는 시흥에서 30년 넘게 살았어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 젊은 친구들이 목포의 눈물 가사를 못외웠다고 자존심 상해 하잖아요. 유달산이 뭔데? 이난영이 뭔데?” 스스로도 그게 왜 질투가 났는지 모르겠다며 웃었지만 그날의 일이 삶의 전환점이 됐다. 사진으로 소금창고를 담게 된 이유다.
한 가지에 애정을 주기 시작하면 끝까지 간다는 그녀는 소금창고를 찍기 시작하면서 밤낮없이 갯골을 찾았다. 옛염전 일대 골프장이 들어서기 전, 지금처럼 갯골생태공원이 자리잡기 전이다. 옛염전 일대는 허허벌판이었고, 길은 소금을 실어나르던 갯고랑길 밖에 없었다. 옛염전 일대 45만평 속에서 오롯이 소금창고와 최영숙 작가만이 있었다. 사진을 찍었지만 사실은 소금창고와의 대화였다. 갯골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갈대와 모새달이 스런거리는 소리, 드넓은 평원 속에 사진에 집중하다보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개인적으로 힘든 시기였지만 40동의 소금창고 하나하나 찍다 보면 마음이 편안해 졌다. 밤이고 낮이고 소금창고가 궁금했다는 최영숙 작가는 비가 오면 비가 오는데로, 눈이 오면 눈이 오는데로, 안개가 끼면, 보름달이 뜨면 소금창고가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다. 그렇게 밤이고 낮이고 소금창고를 찾았다.
“사진을 찍으면서 인생을 배워. 달빛이 너무 밝으면 오히려 사진이 안나와. 그러다 달빛도 어스름해져갈 때, 그때서야 모습을 드러내는 거야. 그때 찍었던 사진이 이거야."
"무덤가에 있으면 그렇게 마음이 편했어"
그녀의 사진은 주제가 확실하다. 소금창고, 무덤, 사라지는 마을. 공통점은 모두 사라지는 것들이다.
봉긋솟은 무덤 위로 파랗게 자란 잔디 위에 앉아 주변에 우거진 나무 그늘 아래 새소리를 듣고 있으면 마음이 편했다는 최영숙 작가. “친구 무덤이 매화동에 있었는데 일 끝나면 거기로 찾아가는 거야. 친구야 잘 지냈니? 인사하면서 술 한 잔 따라주고 나도 몇 잔 마시고 그러고는 계속 거기 앉아 있는 거야. 그러고 앉아 있으면 옆에서 뻐꾸기 우는 소리도 들리고 그래. 그러면 그렇게 마음이 편안해 지더라고. 그래서 그렇게 자주 갔어. 누워서 책도 보고 한참 놀다 오는 거야.”
그러다 무덤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고 노무현, 고 김대중 등 유명 정치인부터 사회운동가, 연예인까지 뉴스의 부고란에 나오는 유명인들의 장례식은 거진 취재한다. 또한 지역 내 지인의 장례식도 취재해 기사를 올린다. 장례식 이후에도 1주기, 5주기, 10주기 등 기념식도 웬만해선 빠지지 않고 간다. 꾸준히 취재를 다니다보니 이제는 현장에서 알아보고 인사하는 경우도 있다. 그녀가 장례식 기사를 빠지지 않고 다니는 것은 한 사람의 일생을 장례식에서 말해주기 때문이다. 처음엔 무덤사진을 찍다가 자연스럽게 장례식 사진도 찍게 되었다. 장례식장에 있으면 고인을 떠올리며 하는 이야기들을 들을 수도 있다.
또 하나 주목하는 것은 사라지는 마을이다. 시흥은 최근 대규모 택지지구 사업이 계속 이뤄지고 있다. 아파트를 세워 인구는 늘었지만 그 자리에서 오랜 기간 터를 잡고 살아왔던 사람들과 자연부락은 사라졌다. 그것이 안타까워 마을의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장현지구의 광석동 마을, 은계지구의 계수동 마을, 현재 아파트가 올라가고 있는 소래산 아래 웃대야리 일대 마을들… 개발로 사라져 가는 마을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커다란 카메라 장비를 매고 마을에 들어가면 마을 어귀에 나와 있는 어르신들이 호기심을 보이며 말을 걸기도 한다. 그러다 말이 이어지면 당신이 마을에서 살아온 이야기들을 듣는다.
“한 번은 어떤 어르신이 그러더라고. 맹랑하게 여자 혼자 다닌다고. 누가 50이 넘은 나에게 그런 말을 해주겠어.” 어르신의 입에서 나오는 보석같은 말들을 기록으로 남겼다. 강렬했던 전쟁의 기억, 가난의 시대를 버텨온 시간, 순간순간 삶의 질곡과 고통. 오래산 자의 지혜일까. 짧은 문장으로 압축해 내는 재치와 그 와중에 뼈를 때리는 촌철살인이 있다. 그래서 좋다. 어르신들을 인터뷰할 때는 시대에 대한 정리가 필요하다. 순식간에 전쟁 때로, 그러다 어느 순간 박정희 시대로 시대가 왔다 갔다 한다. 특히 이념 갈등이 전쟁이 되었던 시대를 살아왔기에, 그리고 아직 그 전쟁이 끝나지 않았기에 기록에 신중해야 한다. 역사는 현재 진행 중이지만 기록은 오랫동안 남는다. 자손들을 위해서라도 기록에 신중을 기한다. 가장 인상깊은 이야기도 전쟁 때 이야기다. “과림동에서 들었는데 인민군들이 후퇴하고 그럴 때 많이 죽었나봐. 시체가 많았대. 대추가 날 때였나봐. 가을이지 그러니까. 대추를 따서 주머니에 넣어뒀는데 그걸 다 못먹고 죽었대. 근데 그게 애잔하잖아. 그 이야기를 누가 시로 썼어."
마을, 사람 그리고 나무
마을을 기록하다보면 필시 만나는 것이 사람이다. 그 사람이 그 마을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가 마을의 역사이다. 그래서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재미있다. 또 하나 만나는 것은 마을의 오래된 나무이다. 몇 백년을 살아남아 몇 대의 일생을 지켜본 나무에는 전설과 추억과 향수가 깃들어 있다. 그래서 개발로 마을이 사라져도 나무 한 그루만은 남겨 그 마을을 기억하고자 한다.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장현지구 개발로 사라진 광석동 둔터골에는 600년이 넘은 회화나무가 있었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당제를 지내기도 했고, 나무를 신성하게 여겨 부러진 가지도 집에 가져가지 않았다. 떠나야했던 사람들은 이 나무만은 그곳에 남기를 바랐다. 사람들이 모두 떠난 후에도 그 나무는 그곳에 있었다.
최영숙 작가는 당연히 해마다 그곳에 들러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어느날 나무가 불에 타서 사라졌다. 그후 그 마을에 살던 사람들 중 갑자기 누가 사망하기도 하고 어르신은 풍을 맞았다고 했다. 나무에 대한 미안함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그래서 결국 작년에 나무가 없어진 그 자리에 마을 사람들이 모여 마지막 당제를 지냈다고 한다.
최영숙 작가의 애정은 사진을 찍고 기록으로만 남기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이어진다. 소래산 아래 두산 아파트 건설 공사가 진행되는 현장에 목련꽃이 만개한다고 하여 일명 ‘백만송이 목련나무’가 있었다. 최영숙 작가의 백만송이 나무를 살리자는 기사를 시작으로 시민모임이 만들어졌고, 시와 건설사가 협의해 이 나무는 이식해 보존하기로 결정됐다. 최영숙 작가는 시민모임의 활동, 이식과정, 목련나무의 상황 등을 계속해서 기록해 나갔다. 지난해 뜨겁고 가물었던 여름 더위를 이식해 뿌리도 채 내리지 못한 채 견디고 있는 나무가 안타까워 계속해서 찾았다.
작년 어느 여름날 필자와 만났던 최영숙 작가는 “우리 동네 새로 심은 나무에는 링겔을 꽂아 영양제인지 물인지 몰라도 달아놓더라”는 말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밤 늦은 시간이었음에도 그 사진을 찍어야 한다며 기꺼이 달려갔다. 그 사이 수액은 사라졌는데 대야동 목련나무도 그렇게 관리를 해야 한다며 안타까워 한 적이 있었다.
소금창고, 무덤, 그리고 사라지는 마을들… 최영숙 작가가 애정하고 사진에 담고 기록에 남겼던 것들은 어찌된 일인지 죄다 사라지는 것들이다. 더 오래 보존했으면 하는 마음이 강했던 목련나무도 작년 여름을 견디기 힘들었는지 나무에 버섯이 피고 죽어가고 있더라는 말을 전하며 “어쩐지… 내가 좋아했던 것들은 꼭 사라지는 것 같아서 쓸쓸해.”라고 말했다.
그래서 모든 기록 활동에 최선을 다한다. 처음 애정을 주고 사진을 찍었던 소금창고가 하루아침에 철거되어 사라졌듯, 다른 것도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번 갔던 장소는 몇 번이고 찾아간다. 1년 뒤, 2년 뒤, 계절이 바뀌면, 눈이 내리면, 달빛이 밝으면… 어떤 모습이라도 담아 두려 한다.
“지금 내가 찍는게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찍어. 지금 나도 마지막일 수도 있잖아.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같은 장소에 가서 찍지만 사진은 매번 다르다. 모습이 달라지지만 변하지 않는 것은 최영숙 작가가 쏟은 애정이다. 사라진 마을, 소금창고, 나무들. “그럼에도 아름다워. 그래서 슬픈 것 같애."
*이 기사는 마을잡지 슬슬에도 게재되었습니다 <저작권자 ⓒ 시흥장수신문(시민기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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