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6월 23일 오후 6시 30분 소래고등학교 도서관에서 심우일 선생님의 맹자 마지막 수업이 있었다.
시작은 2010년 3월 2일 시흥고등학교 임경묵 선생님의 지도로 진행된 '맹자집주서설' 강의가 첫 수업이었다. 지나온 시간만큼 소소한 변화도 많았지만 수업 장소만큼은 처음과 마무리를 같이했다.
맹자학당은 2009년 10월 첫 모임을 시작으로 한 달에 두 번 1,3,5주 수요일 저녁 7시에 임경묵 샘에 이어 심우일 선생님 지도로 소래고등학교 도서관에서 맹자원전을 읽고 토론했다. 또한 매년 역사적으로 본받을만한 지행합일을 한 학자와 관련된 역사적인 인물기행도 했다.
2010년 8월 22일 성호이익 기행, 2011년 1차 워크샵(홍천), 2012년 2월 19일 강화도 정제두 기행, 2012년 7월 14~15일 남명 조식 선생 기행, 2013년 6월 29~30일 소백산 삼봉 정도전 기행, 2014년 6월 28~29일 곰배령 백동수 기행, 2015년 6월 28일 남한산성 등을 다녀왔다. 지금까지 맹자원전 강의에 참여한 시민은 총 100여명이고 고정적으로 참여한 회원은 20여명이었다.
2010년 3월 2일 첫 수업에서 임경묵 선생님은 변혁적이고 진취적인 맹자를 표현하면서 '청바지를 입은 맹자'라고 했었다. 또한 맹자를 배우면서 호연지기를 기를 수 있다고 했다. 맹자를 처음 만나는 마음속에 불이 확 일게 했다.
아쉽게도 임경묵선생님 개인적인 사유로 더 함께 할 수 없었다. 2010년 5월부터 끝까지 심우일 선생님이 맹자를 맡아서 가르쳤다.
맹자는 기원전 372년에 태어나 기원전 289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공자는 춘추시대에 살았고 맹자는 전국시대에 살았다. 2388년 전의 인물인 것이다. 그 당시의 시대상이나 인물들이 현대에도 생생하게 살아나는 것을 보면 사람 사는 것은 별반 변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맹자를 보면 또박또박 말대꾸하는 제자들을 만날 수 있다. 맹자를 읽는 즐거움이었다.
맹자의 제자들처럼 2300여년이 지나서 배우는 맹자학당의 시간은 격론의 장이었다.
맹자에 나오는 반구저기(反求諸己)는 어떤 일이 잘못되었을 때 남의 탓을 하지 않고 잘못된 원인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아 고쳐 나간다는 뜻이다.
이 단어가 나오면 맹자학당 선생님과 제자들을 자신의 삶에서 만난 반구저기의 예를 이야기했다. 다양한 직업과 삶의 방식이 다른 사람들은 각자의 삶과 타인의 삶에서 터득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깊은 공감을 나눴다. 맹자의 수업은 늘 이랬다. 가장 좋은 강점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깊은 속내를 들을 수 있고, 말 할 수 있는 공간이 있겠는가? 참으로 귀한 시간들이었다.
수업은 늘 이렇게 토론이 깊어져서 정치, 경제, 사회 쪽으로 넘어가면 책이 한 쪽이 넘기기 힘든 날도 있었다. 그렇게 해서 맹자 한 권을 마치는데 6년이 넘게 걸렸다.
고정적으로 나오는 20여명의 학생들은 개인사정이 있으면 가끔 빠질 수 있었지만 무보수로 가르치면서 6년이 넘게 심우일 선생님은 늘 그 자리에서 제자들을 기다렸다. 나중에야 그것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었다. 맹자학당이 그렇게 긴 시간 수업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심우일 선생님 덕이 가장 컸다. 맹자 수업이 끝나는 날, 제자들이 꼭 저녁 대접하고 싶다는 말에도 저녁을 사주었다. 죄송하고 감사했다.
30대부터 70대까지의 제자들은 맹자를 마치며 감사패를 드렸다.
감사패 맹자학당 훈장 심우일
스승님께서는 2009년 10월 15일 맹자를 시작하던 그 마음으로 2016년 6월 23일 마지막 수업까지 ‘맹자집주’ 원전 강좌를 통해 재충전의 기회를 제공하고 삶의 지표가 될 힐링 강의를 진행하였기에 맹자 제자들의 하나 된 축원의 마음을 담아 감사패를 드립니다. 스승님의 크나큰 사랑과 실천하시는 가르침을 잊지 않겠습니다. 2016년 6월 23일 맹자학당 제자들
맹자학당에 다닌 제자들이 그동안의 소회를 다음과 같이 남겼다.
이상애 소래고등학교 사서는 “유익했었던, 숙제가 없는 공부를 해서 좋았던, 사람들이 좋았던, 성장 할 수 있어서 좋았던, 나올 때마다 행복했던, 어쨌든 마무리했던, 이 시간을 함께 할 수 있어서 좋았던, 가고 싶은 시간이었던, 얼레벌레 끼었다 끝까지 왔던, 그 많은 수식어가 붙었던 맹자(孟子) 수업시간이 이젠 추억 속으로 들어갔습니다.”고 했다.
김영자 문화해설사는 “처음에 시작하였던 임경묵 선생님도 뵙고 마지막 열강으로 마무리하신 스승님의 만찬과 하루 종일 종종대며 감사패 준비하던 시간도 하나의 추억이 되었습니다. 함께한 모두가 소중했고 감사했습니다. 있는 그대로 자신의 생각을 펼칠 수 있도록 장을 펴주신 스승님! 주도적으로 모여 이렇게 재미있고 유익한 수업은 대한민국에서 맹자학당 밖에 없을 듯합니다.”고 했다.
박정란 대흥중학교 사서는 “ 처음 시작은 고3이었던 아들이 다니는 학교도서관에서 진행되는 수업이었기에 정당한 핑계거리고 정기적으로 학교에 가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아서 신청을 하였으나 맹자를 배우면서 만고불변의 세상의 도리와 이치를 깨닫는 시간이 되면서 좋은 분들과 함께한 유익하고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고 소감을 말했다.
정순옥 여성의 전화 대표는 “가슴이 울컥합니다. 함께여서 힘 받고 마음공부를 통해 휴식이었는데 감사드리고 많이 아쉽다.”고 했다.
서경옥 전 환경단체 사무국장은 “맹자학당 가는 길은 18살 소녀의 마음으로 설레는 하루였습니다. 많은 시간이 그리 길지 않게 느꼈던 것은 열심히 이끌어주신 스승님과 함께한 도반들이 있어서였습니다. 힘들고 지친 날들 희망과 길을 알려준 나날이었습니다. 함께해주신 여러분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고 했다.
박종남 문화해설사는 “학창시절을 돌아 볼 수 있게 해 준 귀중한 시간이었어요. 6년 6개월이란 지나고 보니 짧기만 한 시간이지만, 고전을 읽으며 함께 생각들을 나누고 일상을 정리하게 했던 소중한 시간들이었어요. 맹자학당에서 함께 했던 시간들은 가슴에 새겨져 지워지지 않을 추억으로 남겨봅니다.”
하명옥 씨는 “맹자는 제가 낯선 타지에서 유일하게 마음 붙이던 곳입니다. 7년 세월, 수업동안 나간 날 보다 못 나간 날이 더 많아 염치없었지만, 언제나 그 자리에서 반겨주시니 늘 감사했고, 맹자를 함께 읽고 이야기 나누는 일이 제게는 성찰이고 힐링이고 철학이었습니다. 시작은 맹자 때문이었으나, 후에는 사람 때문에 맹자시간이 기다려졌습니다. 못 나간 날도 늘 ‘맹자하겠구나’헤아리고 있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생면부지 사람에게 맹자를 공부하려는데 누구나 와도 된다고 해서요. 맹자에서 스친 여러 선생님들 모두 매순간 감사했고 존중합니다.”고 했다.
문희석 한의원장은 “맹자의 인연이 얼마나 소중한지 시간이 흐를수록 더 깊이 느껴집니다. 사람과 짐승이 다른 이유를 알고 양심과 영혼의 자유 그리고 인의의 기치를 드높였던 맹자의 호연지기를 함께 호흡했던 시간들이었습니다. 기나긴 여정을 이끌어주신 한 개 심우일 샘의 내공 또한 맹자 못 지 않았습니다. 앞으로도 배움을 그치지 않고 다 같이 전진하시기를 기원합니다.”고 했다.
최선옥 도서관 사서는 “ 저에게 맹자는 조심성 없이 너울너울 놀러 갔다가 끈끈이에 꼬옥 잡힌 기분이랄까요. 맹자의 따뜻한 기운 속에서 많이 배우고 감동 받았습니다. 끝으로 한참 뒤늦게 온 철없는 신입도 선선히 맞이해 주셔서 거듭 감사드립니다.”고 소감을 전했다
심우일 맹자학당 선생님은 “맹자는 <약밥>이었습니다. 나의 몸이 살아 숨쉬게 해주는 밥. 그리고 건강을 지켜주는 약. 이 두 가지를 다 가능하게 해줬던 그 약밥을 먹고 잘 잘란 것 같습니다. 맹자는 <귀명창>의 힘이었습니다. 소리를 잘 하는 <소리명창>은 그것을 들어주는 귀명창의 추임새 없이는 탄생할 수 없다고 합니다. 여러분의 열렬한 성원과지지, 그리고 참여로 이루어진 멋진 글 마당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누구 말대로 시원하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합니다. 섭섭함의 길모퉁이에서 세르반테스의 소설 한 장면이 그려집니다. 풍차를 향해 돌질해가는 돈키호테! 고맙습니다. 맹자 학우 여러분... 큰 절 올린다. 고 했다.
또한 맹자기행을 통해서 숨겨진 역사와 생생히 살아 숨 쉬는 현대의 역사를 바라 볼 수 있었다
6년 넘게 지내온 맹자와의 시간을 한 마디로 말하면 여민동락(與民同樂)이었다. 원 뜻은 임금이 백성과 함께 즐김이지만 맹자를 배우면서 스승과 제자가 한마음이 되어 삶을 되돌아보고 배움을 익힐 수 있는 귀하고 감사한 시간들이었다. 세상 살면서 여민동락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는 것, 삶의 큰 에너지였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야 더 많은 사유를 이끌어 낸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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