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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추기경은 시대적 격변과 정권의 탄압, 계층 간의 갈등이 많았던 우리 사회에서 종교와 계층을 초월해 모든 국민의 존경을 받은 큰 어른이었다. 강한 자에게는 강하고 약자에게는 한없이 약한 마음을 가진 시대의 어른이었다.
그분을 떠나보내는 깊은 아쉬움은 사람들을 명동성당으로 모이게 했다. 김수환 추기경의 조문 행렬은 3~4시간을 기다리게 하는 3km가 넘는 줄을 만들었다. 명동의 건물들을 사람들이 둘러싸고, 인파로 이어진 길들은 다시 겹쳐졌다.
파주에서 온 김점숙 마리아(57) 씨는 “너무 쓸쓸하고 허전하다. 천국에 가셨지만 너무나 섭섭하다”며 묵주 기도를 하며 돌아가신 분을 위해 기도했다. 수원에서 올라왔다는 김 모니카(75) 씨는 “추기경님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위대하신 분이시다. 나라가 어수선할 때 돌아가셔서 마음이 아프고, 좀 더 우리와 함께 계셨으면 좋았을 텐데 너무 아쉽다”고 말했다.
또한 해남에서 올라온 개신교 장로라고 자신을 소개한 최형윤(63) 씨는 이렇게 많은 사람이 조의를 표하는 것이 “정당하다. 그분의 생애는 위대하다”라고 했다. 올해 미대에 들어갔다는 20대 청년에서 부모님을 따라온 10대 자녀들까지, 연령의 구분 없이 많은 사람이 앞을 향해 명동성당으로 발길을 옮겼다.
시간이 지나며 오후 들어 인파가 점점 늘어나자 경찰 기동대 인원도 더욱 보강되었다.
그러나 인파가 많은 것에 비해 조문 행렬은 지극히 조용하면서도 질서가 있었다. 기도를 하며 가는 사람들, 책을 보는 젊은이들, 가위바위보를 하며 걷는 어린이들까지 마치 오랜 세월을 함께 살았던 할아버지를 보러 가는 가족 같았다.
생전의 당신 모습인 “혜화동 할아버지”가 보이는 듯했다. 사람들은 경건했고 차분했다. 번잡함 속에서도 차분한 질서가 주는 평화로움마저 느낄 수 있었다.
2월 20일 오전 10시, 명동성당에서 장례 미사를 봉헌한다. 장지는 천주교 용인 공원 묘지 내 성직자 묘역으로 정해졌다. 2009년 2월 18일, 미리 찾은 김수환 추기경이 잠들 용인 공원 묘지는 고요했다.
용인 공원 묘지의 성직자 묘역에서 김수환 추기경이 잠들 빈 묘역을 바라보았다.
한 사람의 생애를 제대로 말하려면 생을 마쳤을 때를 보아야 한다고 했다. 종파를 초월한 종교계 인사들과 정치·경제인들의 조문, 그리고 몇 시간을 기다리면서도 묵묵히 그분의 마지막을 배웅하려는 사람들의 행렬은 그분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말없이 증명해 주고 있었다.
민중이 힘들 때 그들과 함께했고 떠나는 순간까지 빈손이었던 분, 마지막 가는 길에 자신의 각막을 기증하여 두 사람이 세상 빛을 보게 하고 훌훌 하느님 품으로 돌아갔다.
“평화는 내가 남에게 ‘밥’이 되어줄 때 이뤄진다”라고 했던 김수환 추기경의 마지막 말은 “고맙습니다”였다. 당신 덕분에 고마움을 느꼈을 세상 사람들에게 정작 당신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 세상을 떠나며 “고맙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 삶은 진정 아름다운 삶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붉게 물들어가는 저녁 하늘을 보면 마음이 편해진다. 어릴 때 행상 나간 어머니는 산등성이를 기우는 석양을 등지고 돌아오실 때가 많았다. 하늘나라에 가면 보고 싶은 어머니도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기대된다.”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중에서) 세상 소풍을 끝낸 김수환 추기경은 평소 꿈꾸던 대로 천국에서 어머니를 뵙고 아름다운 석양을 보고 계실 듯했다.
우리 현대사의 질곡 속에서 모든 국민이 존경할 수 있는 어른이 계셨다는 사실이 얼마나 고맙고 다행스러운 일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고맙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의 마지막 말씀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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