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8년 2월 10일 숭례문 불나다 ©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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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10일 방화로 국보 1호 숭례문이 전소되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발생했다. 이후 2008년 12월10일 오전 7시30분경 인터넷기사에 삼척 준경묘에서 숭례문과 광화문의 복원에 쓰일 재목으로 금강송을 벌채 한다는 기사가 올라와 있었다. 광화문과 숭례문을 복원하면서 조선 태조 이성계 5대조 이양무 묘역에서 자란 금강송을 사용함으로써 역사성과 정통성을 확보한다는 것이었다.
▲ 준경묘에서 금강송 고유제를 지내다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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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제를 지내는 시간은 명기되지 않았다. 만약 10시에 시작한다면 절대로 도착 할 수 없는 시간이었다. 갈등이 생겼다. 그러나 언제 계산하고 다녔는가 싶었다. 무조건 7시 50분 출발했다. 도착하니 11시였다. 운이 좋았다. 행사는 11시부터 한다고 했다. 다행히 준경묘 입구에서 기자들을 태우고 들어가는 마지막 차를 탈 수 있었다.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 준경묘 봉향회 이승복 회장의 주관으로 광화문 빛 숭례문 복원에 사용될 금강소나무를 벌채,공급하기에 앞서 안전작업을 기원하는 고유제를 전례에 맞춰 경건하게 지내고 있었다.
준경묘에서 고유제를 지내고 문화재청과 광화문 목수팀이 주관하는 벌채목 산신제 및 벌목행사가 이어졌다. 중요무형문화재 74호 신응수 대목수가 첫 잔을 올렸다. 그 뒤 관계자들이 절을 올렸다.
우선 20 그루의 금강송 중에서 벌채대상목의 검인위치를 근부박피를 했다 근부박피 위치에 "산"이라고 검인을 찍었다. 그 뒤 “어명이요” “어명이요” 어명이요“를 세 번 외친 벌목자가 도끼로 벌목하는 장면을 보여주었다.
도끼로 벌목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기계톱으로 벌목하였다. 몰려든 취재진들에 쌓여 광화문 목수팀이 나이테를 세고 있다. 이 곳의 금강소나무들은 경복궁 중수 때 자재로 쓰였다고 한다. 이제 다시준경묘에서 벌목될 금강소나무는 그늘에서 말리는 과정을 거친 후 광화문에 10그루와 숭례문에 10그루가 쓰일 예정이다.
신응수 대목수가 벌목된 금강송을 설명을 해주었다. “수령은 110년 되었다. 송진이 꽉 찼다. 삼척의 나무가 좋다. 질기고 부러지지 않는다. 숭례문과 광화문의 기둥이나 창방으로 쓸 수 있다. 돈으로 환산 할 수 없다. 국가의 상징으로 몇 천 년을 견뎌줄 나무다.”라고 했다.
문화재청 하선웅씨(36)는 "벌채 수량은 준경묘 산림보호를 위하여 20본으로 제한하였으며, 준경묘 봉향회와 마을 주민등 관련기관 입회하에 선정되었다"고 한다. 소나무들은 헬기를 이용해서 운반할 것이라고 했다. 숭례문은 발굴조사를 끝내고 2010년에 공사를 시작할 것이라고 한다.
수령 110년에 지름74㎝ 높이 30㎡의 금강소나무 한 그루가 베어졌다. 이곳의 소나무 수령이 110년인 것을 보면 고종 광무 3년(1899)에 묘소를 수축하고 제각과 비각을 건축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당시에 조성된 금강소나무 숲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종 광무 3년은 지금으로부터 109년 전이기 때문이었다. 남은 19그루의 소나무들의 연령을 보면 이곳이 언제 조성된 숲인지 알 수 있을 듯했다.
적어도 이곳의 소나무 수령은 200년에서 300년은 넘지 않을까 했는데 110년이라는 말에 그 어린 것들이 우리의 숭례문을 짊어진다는 생각에 걱정이 되었다. 또한 우리의 숲들이 얼마나 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지금부터 녹화사업을 한다면 우리의 후손들이 100년 후에 이렇게 울창하고 아름다운 소나무 숲을 만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베어진 금강송과 산신제를 지내고 허리에 북어와 실을 차고 있는 금강송, 3번이라는 번호표를 달고 있는 금강송까지 광화문과 숭례문의 복원을 위해 한 목숨 내놓을 금강소나무들이 한 자리에 있었다. 저 나무들에게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방화로 불탄 숭례문 복원자재로 벌목되는 저 소나무들이 숭례문의 기둥이 되어 ‘고맙소’ 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난 뒤 복원된 숭례문과 광화문에 가면 삼척에서 100년을 넘게 살던 소나무들의 자취들을 볼 것이다. 그때 가만히 미안하고 고마웠다고 기둥을 쓸어줘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산신제를 끝내고 준경묘로 내려왔다. 준경묘 아래 공터에서 식사를 대접하고 있었다. 능 아래의 사람들은 이제 식사를 하거나 마치고 돌아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고유제와 산신제를 모셨으니 이제는 산자들이 먹을 시간이 된 것이다.
산에서 늦게 내려왔는데도 음식이 남아있었다. 점심 도시락을 받아서 준경묘 위로 올라갔다. 세 그루의 소나무가 서로 기대고 있는 이곳은 준경묘에 오면 언제나 들렀다 가는 곳이었다. 인적도 없고 이곳이 가장 편하고 아늑한 장소였다. 점심을 들고 잠시 누워 하늘을 바라보았다. 소나무 가지들이 서로를 거두고 있었다. 이렇게 하늘을 보고 있으면 행복해진다. 이곳의 적막함을 지긋이 지켜보는 일이 평강한 것이다.
▲ 준경묘 금강송 고유제와 산신제 벌목행사 끝남 ©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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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이 적막한 곳으로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조용히 유지되던 평화로움이 깨졌다. 자리를 툴툴 털고 일어섰다. 아래로 내려오니 벌써 갈 사람들은 다 갔다. 사진을 더 담다 보니 올라올 때 마지막 차를 타고 왔는데 나갈 때도 마지막이 되었다.
준경묘를 내려와서 준경묘와 영경묘의 재실을 들렀다.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준경묘 봉향회 며느리들이 마지막 정리를 하고 있었다.
재실 뒤로 돌아 올라가 봤다. 멀리 마을이 보이고 준경묘로 가는 길이 멀찍이 보였다.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준경묘는 아름다운 숲에 선정될 정도로 아름다운 숲과 길을 가지고 있다. 문화재청 직원에 따르면 이 길을 마을주민과 종친회에서 시멘트 포장 해달라고 한다고 했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 숲길이 진정 아름다운 것은 자연스러운 흙길이기 때문이다. 준경묘를 열 번을 와도 늘 새로운 것은 이곳의 소소한 변화들 때문인 것이다.
어쩌다 오는 사람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이곳은 그렇게 교통이 원활한 곳이 아니다. 오르는 길이 가파르기 때문에 늘 문이 잠겨져 있다. 관리하는 분에 의하면 문화재청에서 나오는 사람들은 절대 차를 타고 오지 않는다고 했다. 이곳의 소나무들을 보호하기 위해 소장이 오더라도 꼭 걸어서 올라간다고 했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1년에 한 두 번 제향 때나 많은 사람들이 올 뿐이다. 무엇이 그리 서두를 일인가?
월정사에서 상원사에 이르는 길은 4㎞의 흙길이다. 여름에 갔을 때 먼지가 많이 날리기에 물차가 오가며 물을 뿌리고 있었다. 시멘트 포장을 하면 비에 쓸려서 다시 길을 만들 일도 없고 도로 유지비도 덜 들어간다고 했다. 가뭄에는 물차가 동원되고 장마라도 지면 다시 흙을 깔아야 하는 번거로움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자연과 하나를 이루는 풍경을 알기 때문이다. 돌아오면서 준경묘만이 간직한 자연과 천천히 동화되면서 걸을 수 있는 여유로운 풍경이 어그러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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