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래철교 2010년 2월10일 통행을 금지할 예정입니다."

최영숙 | 기사입력 2010/02/10 [06:22]

"소래철교 2010년 2월10일 통행을 금지할 예정입니다."

최영숙 | 입력 : 2010/02/10 [06:22]

 

▲ 수인선의 증기기관차     © 최영숙


“기차 탈까?”
아이같이 양현은 고개를 끄떡였다. 기차표를 끊은 사람들을 뒤쫒아서 영광이도 소년처럼 매표소 앞으로 급히 달려간다.
“어디요?”
하며 매표구 안의 사내가 불친절하게 말했다.
“종점까지.”

돈을 디밀자 기차표와 거스름돈이 나왔다. 행선지는 수원이었다. 인천서 수원까지,  선로가 좁고 기차도 작은 수인선이었다. 사람들이 말하는 기동차에 영광과 양현은 올라탔다. 삐이! 하고 내지르는 기적 소리와 함께 기동차는 움직였다. 두 사람은 마치 오랜 유랑길을 끝낸 것처럼 안도의 숨을 내쉬며 서로를 바라본다. 

서해의 끝없는 개펄, 그리고 아득하게 펼쳐져 있는 염전, 두 사람은 다 같이 처음 보는 풍경이었다. 왠지 모르게 지구 끝을  작은 기차가 달리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나 세상과 차단된 좁은 공간에서 처음으로 자유를 얻은 것 같았다. 가난하고 이지러진 영혼이 빈틈없이 밀착되어 오는 것을 느낀다. 기찻간은 사람들 온기로 몹시 춥지는 않았다. 독특한 억양과 사투리 비슷한 말들이 이따금 귀에 흘러 들어왔고 아이 우는 소리도 들려왔지만 위축되고 긴장하게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레일을 넘어가는 차바퀴의 울림조차 정답고 포근하게 들려왔다. 내일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지나온 길이 어떠했든지 이 순간의 충일함 따사로움만을 소중하게 품에 안듯, 그러나 역시 슬프기는 했다
."  <박경리의 '토지'중에서>

어머니의 운명과 같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했던 기생 봉순이의 딸 양현과 산사람 송관수의 아들 송영광은 이 증기기관차를 타고 소래포구 방향의 소금창고까지 왔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이 증기기관차는 1927년 6월 14일 수원기관차고에서 조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협궤용 증기기관차이다. 1937년 8월 6일 수원역에서 남인천역에 이르는 52km 구간의 수인선이 개통되어 1978년 여름까지 운행되었다. 그 후 수인선은 디젤동차로 바뀌었으며, 1995년 12월 31일 운행이 전면 중단되었다.

 

이 증기기관차는 1983년 쌍용그룹이 철도청으로부터 구입해 한국도로공사에 기증하였고, 대관령 휴게소에 전시되었다가 2001년 10월 29일 다시 인천광역시에 기증되었다. 이후 2001년 11월 15일 남동구청 앞에 설치되었던 것이 2008년 7월 6일 소래포구 앞 현 위치로 옮겨져 전시되고 있다. 이 증기기관차도 83년의 세월 동안 참으로 사연이 많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통행금지 안내문     © 최영숙


소래철교가 2010년 2월 10일부터 통행을 금지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월곶과 소래포구를 잇는 소래철교는 너비 2.4m, 길이 126.5m의 철도교로, 1937년 수인선이 개통되면서 세워졌다. 1995년 12월 31일 협궤열차의 운행이 중단되고 복선전철 사업이 진행될 때 사라질 뻔했으나, 보존해야 한다는 여론 덕분에 살아남았다. 이 소래철교 또한 증기기관차처럼 사연이 쌓여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 2009년 10월 15일 소래철교의 아침     © 최영숙

 
그러나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2010년 1월 13일, 소방방재청은 ‘구 소래철교를 통행로로 사용 시 붕괴 등 안전사고 발생으로 다수의 인명피해가 우려되며, 철거·통행금지·보수 등 가능한 안전대책을 강구할 것’을 철도시설공단에 정식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공단 측에 따르면 “소래철교의 안전성에 문제가 있다는 소방방재청의 지적에 따라 소래철교를 잠정 폐쇄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 2007년 2월 16일 소래철교     © 최영숙


이 소래철교는 개인적으로도 많은 추억을 간직한 곳이다. 예전에 아이들 친구들이 오면 포동의 소금창고와 이곳 소래철교로 데려오곤 했다. 높은 건물과 새로운 것에 익숙한 아이들에게 오래된 풍경이 주는 아늑함과 편안함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막상 데리고 다닐 때는 지루해하는 듯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들은 그때의 추억을 즐겁게 이야기하곤 했다.
 

▲ 2009년 12월 31일 소래철교 위에서 바라본 일몰     © 최영숙


2009년 12월 31일, 소래철교 위에서 낙조를 보려고 서둘러 갔으나 이미 해는 저물어 있었다. 붉게 타오르는 풍경은 없었지만 잔잔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이곳은 그런 곳이었다. 물이 그득 차오르거나 썰물로 갯벌이 바닥을 드러내는 풍경을 펼쳐 보일 때면, 서해만이 지니는 편안한 느낌이 이곳에 있었다. 그러나 소래철교 철거 문제가 거론된 뒤부터는 어쩌면 이곳에서 보는 마지막 풍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름다움을 보면서도 마음이 처연해졌다.
 

▲ 2009년 12월 31일 소래철교에서 바라본 달      © 최영숙

   
일몰은 조금 늦었고 하늘에는 보름달이 둥실 떠 있었다.


▲ 소래포구 어판장에서 바라본 소래철교     © 최영숙


 73년을 이곳에 있었던 소래철교의 철거를 주장하는 시흥시와 존치를 주장하는 남동구는 한 치의 양보도 없이 팽팽하다. 각자 주민들의 생존권이 달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협의도 힘들고 제삼자가 나서서 무어라 하기도 조심스럽고 난감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래포구를 찾는 사람들이 월곶에 주차하고 소래철교를 이용하기 때문에, 월곶 주민들이 소음과 상습적인 교통 정체, 쓰레기 투기 등의 문제에 그대로 노출되어 인근 주민들과 상인들의 민원이 속출했기 때문이다.

 

▲ 소래철교 위를 지나는 사람들     © 최영숙


소래철교를 폐쇄한다는 소식을 듣고 2010년 2월 8일 다시 소래철교를 찾았다. 그곳에는 여전히 오래된 풍경들이 있었다. 그러나 익숙한 풍경 속에서도 마치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수인선이 다니지 않을 때부터 장사를 하셨다는 분은 “만약 이 다리를 막는다면 어디서 무엇을 해서 먹고살겠느냐”며 철도청에 가서 시위라도 하겠다고 했다.
 

▲ 소래철교를 바라보다     © 최영숙

 

“소래철교를 막는다고 올 사람들이 안 오는 것은 아니지요!”

 

결국은 상권 때문에 이 문제가 생겼다고 하시는 분께 위로랍시고 맥없이 말했다. 순간, “당신 나가! 당신이 지금 내게 상처 준 거야! 무슨 일이 생기면 책임 못 지니까 그만 나가라”며 나를 내쫓았다. 말은 맥없이 했지만 ‘과연 이 다리를 막는다고 상권의 흐름이 바뀔까’ 하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길은 어떻게든 연결될 것이고, 오랜 이웃 간의 정만 부스러지는 것은 아닌가 걱정되었다. 워낙 민감하게 대치하고 있는 문제여서 기록을 남기면서도 시어머니와 아내 사이에 낀 남편 같은 심정으로 서성일 수밖에 없었다.



▲ 2009년 12월 31일 일몰     © 최영숙


우리는 이미 많은 근대문화유산을 잃어버렸다. 소래철교를 무조건 폐쇄하는 대신 문화상품으로 발전시켜 월곶과 소래포구가 상생하는 방법은 없을까. 상권을 소래와 월곶으로 가르지 말고 소래철교를 구심점으로 삼아 여러 각도에서 중지를 모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통행하는 시민들     © 최영숙


이 귀중한 유산은 시흥시나 남동구만의 것이 아니다. 숭례문이 서울특별시만의 것이 아니듯 모든 사람의 자산인 것이다.

▲ 월곶, 소래포구 3개의 다리를 지나다     © 최영숙


73년 된 소래철교가 멀리 보였다. 소래철교는 교량 간격이 좁아 배들이 드나들 수 없지만, 널찍하게 건설된 근래의 다리 아래에는 배들이 정박해 있었다. 오래된 다리와 신설된 다리가 각자의 자리에서 굳건히 서 있었다.

▲ 2010년 2월 9일 소래철교 안개에 젖다     © 최영숙

 

2010년 2월 9일, 폐쇄를 하루 앞두고 다시 소래철교를 찾았다. 안개 속에 비가 내리는 우울한 풍경이었다.

 

“남향인 소금창고 앞에는 상당한 햇볕이 저장되어 있었던 것만 같았다. 두 사람은 창고의 나무 벽에 기대어 해를 향해 나란히 앉았다.” 소설 《토지》에 나오는 구절이다. 소설 속 두 주인공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했지만, 시흥시와 남동구는 이 저장된 햇볕으로 상생의 길에 나섰으면 좋겠다. 수인선 철도의 옛 풍경을 실감 나게 살려내 독자들을 서늘한 슬픔에 잠기게 했던 《토지》의 고(故) 박경리 선생이 그리워지는 날이었다.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주간베스트 TOP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