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낙조(西山落照) 떨어지는 해는 내일 아침이면 다시 돋건마는, 황천(黃泉)길이 얼마나 먼지 한 번 가면은 못 오누나.” 이은관 선생이 부르던 배뱅이굿의 서글픈 첫 대목이다.
배뱅이굿의 창조(唱調)는 본래 관서지방 무당들의 노랫소리에서 유래했다. 이 배뱅이굿은 최근세에 형성된 서도소리의 한 분과로 보이는데, 현재 전승되는 유파는 평안도 김관준 계통을 이은 이은관(李殷官) <배뱅이굿>과 황해도 문창규(文昌圭) 계통을 이은 양소운(楊蘇云) <배뱅이굿>이 있다. 그중에서도 이은관의 배뱅이굿은 국가무형문화재 제29호 서도소리로 지정되어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대개 반주는 장구 하나만을 사용하는 것이 원칙이나, 극의 흥을 돋우기 위해 바라, 피리, 대금, 해금 등을 곁들이기도 한다. 주요 장단은 굿거리, 볶는타령, 막장단, 중모리(산염불장단) 등으로 다채롭게 구성되어 있다.
이은관 선생의 부음 소식을 접했을 때, 가슴 한구석에서 쿵 하고 무거운 무언가가 내려앉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배뱅이굿을 부른 서도소리의 거목 이은관 선생을 생각하면, 필자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아련한 유년의 기억이 가장 먼저 고개를 든다.
필자가 배뱅이굿을 처음 들었던 것은 겨우 여덟 살 무렵이었다. 어느 날 이웃집 할머니 댁 마당에서 흘러나오던 배뱅이굿 소리는, 어린 계집아이에게 마치 다른 세상이 열리는 듯한 신선한 충격이었다. 온 동네가 들썩일 정도로 전축을 크게 틀어놓던 시절, 그 스피커에서는 늘 배뱅이굿과 회심곡이 흘러나왔다. 고무줄놀이나 사방치기를 하며 마당을 뛰놀다가도 이웃집에서 배뱅이굿 소리가 들려오면, 슬그머니 놀이에서 빠져나와 뒤란 담벼락에 기대앉아 한없이 귀를 기울이곤 했다. 가끔 그 모습을 어른들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어린것이 왜 그리 청승을 떠느냐"라며 다정한 지청구를 듣기도 했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세월의 두께가 쌓이면서 배뱅이굿을 해석하는 시선도 조금씩 바뀌었다. 처음에는 사기꾼 가짜 무당에게 허망하게 속아 넘어가는 죽은 배뱅이 부모가 참 어리석어 보였다. 하지만 부모가 되어 보니, 그 엉터리 박수무당은 돈을 사기 친 것이 아니라 자식을 잃고 미쳐가던 배뱅이 부모의 찢어진 가슴을 정성껏 치유하고 떠난 '치유자'였다는 생각이 든다. 하나밖에 없는 자식을 먼저 보내고 피눈물을 흘리는 부모에게 그까짓 재산이 다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 가짜 배뱅이의 입을 빌려서라도 가슴속에 맺힌 응어리를 다 풀어내는 것을 보며, "기둥뿌리라도 다 뽑아가거라!"라고 통곡하던 부모의 절박한 심정을 이제는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한바탕 서럽게 울고, 또 호탕하게 웃으며 세상사를 너그럽게 품어 안던 한 판 대동굿이었던 배뱅이굿은, 언제 들어도 그 깊은 해학과 풍자에 찬탄을 금치 못하게 한다.
이은관 선생의 마지막 가시는 길을 담으며 마치 내 소중한 유년의 한 페이지가 통째로 사라지는 듯한 깊은 상실감을 느꼈다. 살아가며 문득 힘든 일이 생기거나 마음 놓고 펑펑 울고 싶은 날마다 늘 이은관의 배뱅이굿을 들으며 위로받았기에, 필자는 평생 이 어르신의 소리에 큰 빚을 지고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고인의 발인식은 지난 14일 한양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서 엄수되었다. 마지막 장지는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에 위치한 시립공원묘지였다.
운구차를 따라 용미리 시립공원에 도착하자, 꽃상여가 고인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상여는 평생 고인의 가르침을 받았던 제자들이 직접 어깨에 멨고, 고인의 넋을 달래는 마지막 상여소리 역시 제자들이 번갈아 가며 맡았다. 운구 행렬의 선두에서 상여소리를 이끈 이는 고인의 수제자이자 서도소리 보유자인 국가무형문화재 김경배(55) 씨였고, 21세 때부터 선생의 뒤를 따르며 상여소리를 배웠다는 안성근(59) 씨를 비롯한 수많은 문하생이 목청을 높였다. 그 광경은 마치 격조 높은 <국악한마당>의 한 장면을 마주하는 듯 장엄했다. 무형문화재급 대가들이 부르는 애절한 상여소리를, 그것도 평생의 은사를 위해 무대가 아닌 현장에서 부르는 소리로 들을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가슴 저리도록 감사한 일이었다. 스승의 마지막 가는 길 위에서 제자들은 온 정성을 다했다.
고인의 아들인 상주 이승주(52) 씨는 “어릴 적 아버님은 늘 우리 가족보다 배뱅이굿과 무대를 언제나 먼저 생각 하셨기에 어린 마음에 한때는 서운하고 야속했던 기억도 있었다. 하지만 오늘 아버님 가시는 마지막 길에 제자들이 보여주는 이 진심 어린 눈물과 극진한 예우를 지켜보면서, 아버님이 참 올곧고 훌륭한 예인으로서 한평생을 잘 살고 가셨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며 함께 해준 이들에게 깊은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이은관 선생의 마지막 발자취를 기록하는 내내, 가슴 한구석에서 밀려오는 마음이 유독 남다르고 착잡했다. 메마르고 척박했던 내 유년의 감성을 배뱅이굿으로 풍성하게 채워주었던 고인을 향한 깊은 고마움 때문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지울 수 없는 서글픈 안타까움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향년 97세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긴 세월 동안 서민들의 애환과 삶의 굴곡을 창 한 자락으로 달래주었던 거장이다. 그런데 그 위대한 예인의 마지막 가시는 길이 우리 사회의 명성에 비해 생각보다 너무나 간소하고 호젓했다.
오늘날의 세태는 유명 아이돌 가수의 부모가 사망했다는 소식만 전해져도 각 방송사의 취재진과 카메라가 인산인해를 이루며 연일 요란한 보도를 쏟아내곤 한다. 그것이 우리가 마주한 현실이다. 그런데 한평생 오직 우리 소리 외길만을 걸으며 민족의 혼을 지켜온 위대한 인간문화재의 마지막 길은 어찌 이토록 쓸쓸하고 고요해야 한단 말인가. 그 긴 세월을 오직 소리판을 지켜온 예인에 대한 우리 사회의 예의와 존경이 너무나 부족한 것은 아닌지, 남겨진 자로서의 아쉬움이 무겁게 밀려왔다.
바람이 쓸쓸하게 스치는 용미리 공동묘지 능선 너머로, 어디선가 카랑카랑하고 맑은 고인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오는 듯했다.
“왔구나, 왔소이다! 황천 갔던 배뱅이가 오늘에야 다시 왔소이다!” <저작권자 ⓒ 시흥장수신문(시민기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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