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 영면에 들다
죽을 때까지 노동자의 어머니로 꼿꼿한 삶...41년만에 아들 곁으로
최영숙 | 입력 : 2011/09/09 [11:14]
| ▲ 이소선 여사 장례 행렬 마로니에 공원으로 들어서다 ⓒ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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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9월 3일 오전 11시 45분경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는 향년 82세를 일기로 양대노총 위원장과 가족, 지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운명했다.
이소선 여사의 장례는 2011년 9월 7일 민주사회장으로 치러졌다. 9월 7일 당일 여사님의 빈소를 찾았다. 아들 전태일이 1970년 11월 13일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감행하며 분신 항거로 숨진 뒤, 한 사람의 어머니는 이 땅 모든 노동자의 어머니로 새롭게 태어났다. 그 후 여사님은 마이크를 들고 노동자들이 눈물 흘리는 곳이라면 어느 곳이든 늘 함께했다.
손학규 민주당 총재가 빈소를 찾아 조문했다.
오전 8시,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서 엄숙하게 발인식을 거행했다.
발인식에는 고인의 아들 전태삼(61) 씨, 딸 전순옥(57) 씨 등 유족을 비롯해 손학규 민주당 대표, 권영길 민주노동당 원내대표, 노회찬·심상정 전 의원, 이재오 특임장관,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 어머니 등 120여 명이 함께했다.
오전 9시경, 영결식이 열리는 대학로로 이동하기 위해 운구가 옮겨졌다. 손자들이 위패와 영정을 들고 앞장섰다.
노동자들이 정성스레 상여 위에 관을 올렸다.
영결식장을 향해 운구 행렬이 본격적으로 출발했다.
풍물굿패 '삶터'가 행렬의 맨 앞에서 소리를 내며 이소선 여사의 민주사회장 행렬임을 알렸다.
가족들이 영정을 들고 앞서 걷자, 노동자들이 만장과 상여를 메고 그 뒤를 엄숙하게 따랐다.
행렬을 뒤덮은 만장에는 '어머니 훨훨 춤추소서', '어머니의 마지막 당부, 비정규직 철폐하자', '전태일과 이소선의 뜻, 우리가 이어받겠습니다', '1,500만 노동자의 어머니', '어머니 사랑합니다', '우리 모두 전태일이 되겠습니다' 등의 절절한 문구들이 적혀 있었다.
마치 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두 손을 벌려 우리를 안아주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여사님의 장례식을 지켜보는 동안, 아들 전태일 열사가 분신했을 당시의 참혹한 상황이 머릿속에서 겹쳐 보였다. 문득 2010년 11월 13일, 전태일 40주기 때 만났던 신순애 씨의 증언이 귓가를 맴돌았다.
과거 평화시장 공장에서 '7번 시다(보조공)'로 일했던 신순애 씨는 1970년 11월 13일 당일을 이렇게 회상했다. 당시 공장장이 “야, 너희 구름다리 밑에 가지 마라. 지금 깡패가 죽어서 가마니로 덮어놨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신 씨는 전태일 열사와의 첫 기억을 그렇게 전하며, 당시에는 무서워서 감히 밖에 나오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그 차가운 가마니에 덮여 있던 아들의 시신을 받아 안았을 어머니 이소선 여사의 심정이 오늘날 나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져 가슴이 먹먹했다. 이제 그 어머니는 '노동자의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아들, 딸들의 깊은 사랑과 존경을 받으며 이승을 떠나가고 있었다.
영결식장을 향해 상여가 탄식하듯 천천히 나아갔다.
만약 그대로 묻혔다면 신문 한 귀퉁이에 실린 어느 일방적인 노동자의 분신 사건으로 끝났을지도 모를 전태일의 죽음이었다. 그것을 역사의 전면에 부활시키고 오늘의 전태일을 만든 것은, 아들의 죽음 이후 41년이라는 세월을 한결같이 노동 현장에서 함께 울고 웃었던 이소선 여사, 그리고 목숨을 걸고 《전태일 평전》을 집필한 고(故) 조영래 변호사와 수많은 노동자들이었다는 생각이 깊이 와닿았다.
대학로 마로니에공원 영결식장에는 노동자들과 시민 등 1,500여 명이 운집하여 여사님의 마지막 가는 길을 눈물로 지켰다.
| ▲ 배은심(이한열어머니) 상임장례위원장 ⓒ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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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열 열사의 어머니인 배은심 상임장례위원장은 조사를 통해 고인을 기렸다. 배 위원장은 "어머니! 1987년 8월 12일, 제가 자식을 잃고 어머니를 처음 뵈었을 때, 어머니는 제 미어지는 아픔을 누구보다 먼저 헤아려 주시고 따뜻하게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괴로움에 지쳐 자식을 따라 죽고만 싶었던 저는 그날 이후부터 어머니의 손을 잡고 오늘날까지 함께 살아올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강인한 모습을 밤낮으로 배우면서 말입니다. 우리 '한울삶'의 어머니, 아버지들도 저와 같은 마음으로 어머니의 그 한없는 포근함 속에서 버텨왔습니다. 먼저 간 자식들의 정신을 가슴에 안고 살아오신 어머니의 참뜻은 이 세상 모두의 귀감이 될 것입니다. 고맙습니다"라며 통곡했다.
이어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의 추도사에 이어 고(故) 조영래 변호사의 부인 이옥경 여사의 조사가 이어졌다. 이 여사는 "어머니, 1973년 6월이었지요. 감옥에서 1년 반의 형기를 마치고 나온 바로 다음 날, 조영래는 저를 데리고 마석 모란공원의 전태일 묘소로 향했습니다. 묘소 앞에서 한참을 말없이 앉아 있더니 저에게 말했습니다. '앞으로 늘 전태일을 생각하며 살겠다'고, 감옥 안에서 굳게 결심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전태일을 역사에 살려내야 한다며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 중이던 기간에도 《전태일 평전》을 준비했고, 그 때문에 어머니와 참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조 변호사는 생전에 늘 '저 어머니가 계셨기에 지금의 전태일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습니다. 이제 하늘에서 전태일, 그리고 조영래와 만나 부디 회포를 푸시며 편히 쉬십시오.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전했다.
조영래 변호사와 이소선 여사. 전태일이라는 이름을 역사에 부활시키는 데 평생을 바친 두 사람의 생전 유대감이 얼마나 깊었을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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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사익 '귀천' '봄날은 간다' 노래하다 ⓒ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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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꾼 장사익 씨가 특유의 애절한 목소리로 '귀천'과 '봄날은 간다'를 조가로 불러 장내를 눈물바다로 만들었다.
대합창으로 참석자들은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
영결식장을 가득 채운 추모의 노래가 대학로 하늘 멀리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참석자들의 경건한 헌화를 끝으로 대학로에서의 영결식을 마쳤다.
| ▲ 노제를 지내는 청계천으로 움직이다 ⓒ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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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1시경, 전태일 열사가 산화했던 청계천 '전태일다리'에서 노제를 지내기 위해 상여 행렬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행렬이 이동하는 와중에 파지를 가득 실은 수레를 끌고 가시는 한 할머니가 장례 행렬을 가로질러 지나갔다. 우리 시대 기층 노동자들의 삶의 풍경이 묘하게 겹치는 순간이었다.
장례 행렬은 종로를 거쳐 흥인지문(동대문)을 지나 아들의 피땀이 서린 평화시장 앞길로 들어섰다.
무대 위에서는 아들 전태일이 하늘에서 내려와 어머니를 포근히 맞아들이는 듯한 진혼무가 펼쳐졌다.
| ▲ 전태일 동상 앞에서 노제를 지내다 ⓒ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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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동상 앞에 어머니의 영정이 나란히 모셔졌다. 이로써 모자(母子)는 아들이 떠난 지 무려 41년 만에 이곳 평화시장 길 위에서 다시 만났다. 슬픈 가락에 맞춰 무용가의 하얀 지전춤이 이어졌다.
기륭전자, 쌍용자동차, 전북고속, 한진중공업 등 당시 격렬한 노사 투쟁을 벌이던 전국의 장기 투쟁 사업장 노동자들이 이소선 여사의 영정 앞에 자신들이 현장에서 사용하던 투쟁 물품들을 제물처럼 올리며 오열했다.
| ▲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 조사 ⓒ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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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 상임이사는 조사에서 “이소선 여사는 한국 민주화 운동과 노동 운동의 거대한 어머니 역할을 해오셨다”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늘 가장 약한 자들의 편에 서서 함께 길을 걸으셨던 분”이라고 고인을 추모했다.
41년 전 전태일 열사가 근로기준법 책을 가슴에 안고 산화했던 그 자리에는, 이제 아들이 어머니를 품에 안고 있는 추모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그 주위로는 여전히 삶의 무게를 실은 오토바이들이 바쁘게 스쳐 지나갔다. 아들을 먼저 보내고, 마침내 그 아들이 떠난 바로 그 자리에서 노제를 지내며 돌아오는 이소선 여사의 길. 이곳 청계천 평화시장 앞은 한국 노동운동사의 가장 뜨거운 성지이자 역사적 현장이었다.
이소선 여사를 허망하게 떠나보내는 슬픔을 서로 위로하며 참석자들은 눈물을 훔쳤다.
전태일다리 위에 마련된 임시 제단에서 시민과 노동자들은 여사님의 영정에 헌화하고 길게 묵념했다.
오후 4시 30분경, 운구 차량과 추모 행렬이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 묘역으로 들어섰다.
전국 각지에서 대절 버스 8대에 분승해 동행한 수백 명의 참석자가 상여에서 관을 내려 이소선 여사의 운구를 묘역 위쪽으로 정성껏 옮겼다.
아들 전태일 열사가 묻혀 있는 묏자리 바로 윗동네에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누울 새 묘역이 정갈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가족들의 오열 속에 하관식이 진행되었다.
붉은 명정(銘旌)이 관 위를 덮었다. 명정은 '명기(銘旗)'라고도 부르는데, 장례 행렬의 맨 앞에서 길을 인도하다가 하관 후에는 관 위에 씌워 함께 묻는 깃발이다. 붓글씨로 선명하게 적힌 명정의 문구는 '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 之棺(지관)'이었다. 여사님의 파란만장했던 한 생애를 단 한 문장으로 관통하는 엄숙한 선언이었다.
아들 전태일의 묘역 앞에 서서 새로 조성되는 어머니의 묘를 바라보았다. 아들 전태일은 불꽃 같은 22년의 짧은 삶을 살았고, 어머니는 아들의 뜻을 이어 82년의 긴 삶을 채웠다. 아들이 세상을 떠난 후 41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어머니는 오롯이 노동자들의 어머니로 살아내셨다. 아들은 여전히 22세의 영원한 청년 불꽃으로 남아 있고, 어머니는 그 불꽃을 꺼뜨리지 않은 41년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다는 생각이 스쳤다. 생전의 이소선 여사는 다른 노동자들이 투쟁 중 분신하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온몸을 떨며 가장 고통스러워했다고 한다. 자식을 먼저 보낸 어미의 참혹한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또 다른 어머니들이 겪어야 할 처절한 한과 슬픔을 차마 눈 뜨고 보지 못하셨던 것이리라.
해질녘의 서늘한 바람 속에서도 수많은 참배객이 자리를 뜨지 않고 하관 작업이 끝날 때까지 묘역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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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중(취토한 무덤 구덩이)에 짐승이나 벌레가 뚫고 들어오지 못하도록 흙을 단단히 다지는 달공(회다지) 작업이 정성스럽게 진행되었다. 참배객들은 달공을 하는 인부들의 발앞에 고인의 저승길 노잣돈을 놓아주며 애도했다.
완성된 무덤 앞에서 고인에게 올리는 첫 제사(평토제)를 지냈다.
유가족과 노동계 대표들이 차례로 절을 올리며 마지막 예를 표했다.
제사를 끝으로 모든 장례 일정과 하관식이 마무리되었다. 한 참배객이 묘역 한편에 세워진 전태일 열사의 청동 동상을 손수건으로 정성스럽게 닦아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전태일과 이소선, 이 위대한 모자는 한국 현대사에 거대한 발자취를 남겨두고 비로소 한곳에서 만나 평온을 얻었다.
돌이켜보면 지난 2010년 11월 13일, 전태일 40주기 때 이곳 모란공원에서 만났던 이소선 여사의 생전 모습은 한없이 온화했다. 자신보다 나이가 훨씬 많았던 김대중 전 대통령부터 손자뻘 되는 고등학생, 대학생들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격식 없이 '엄마', '어머니'라고 불렀던 이소선 여사. 그날도 여사님은 현장을 찾은 손자뻘 어린 노동자의 뺨을 다정하게 부벼주고 계셨다. 품이 한없이 넓고 따뜻했던 우리 시대의 진짜 어머니였다.
이소선 여사가 이 세상의 모든 소외받는 사람들을 제 자식으로 품어 안았기에, 그토록 수많은 사람이 여사님의 깃발을 따랐던 것이리라. 장례식 현장에서 만난 사람들의 증언에서도 그 크나큰 사랑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뜨거운 볕 아래서 묵묵히 상여를 맸던 이정희(48) 씨는 "상여를 워낙 튼튼하게 목재로 짜서 무척 무거웠다. 20명이 10명씩 조를 짜서 교대로 들었다. 육체적으로는 어깨가 끊어질 듯 아팠지만, 어머니의 마지막 가시는 길을 내 어깨로 직접 모시고 간다고 생각하니 전혀 힘들지 않고 오히려 영광스러웠다"고 말했다.
임영순(46) 씨는 기자의 질문에 "그냥 엄마죠, 우리 엄마..." 라며 끝내 목이 메어 다음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쏟았다. 오랜 시간 여사님을 곁에서 보좌했던 이명옥(54) 씨는 "어르신은 사람이 문을 열고 들어오면 저 사람이 지금 무엇이 힘들어서, 뭐가 필요해서 왔는지를 단박에 알아보는 혜안이 있으셨다. 참 따뜻한 분이셨다. 현장에서는 늘 다른 이들의 의견을 다 들어주고 양보하셨지만, 가야 할 길이나 해야 할 올바른 말씀만큼은 결코 굽히지 않고 당당하게 다 하셨다. '이소선'이라는 이름 석 자 자체로 우리 노동자들의 거대한 정신적 지주였고, 시대를 지탱하는 굳건한 기둥이셨다. 우리는 전태일과 이소선 여사를 통해 비로소 이 시대의 참된 정신을 읽는 것"이라며 고인을 높이 평가했다.
충북 영동이라는 먼 곳에서 새벽 기차를 타고 올라왔다는 이주형(65) 씨는 "그분은 관념 속의 어머니가 아니라, 현장에서 함께 뒹군 노동자들의 진정한 어머니이셨다"라며 고개를 숙였다.
| ▲ 양대 노총위원장과 상주 전태삼(61) ⓒ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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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선여사의 아들 전태삼(61)씨는 "어머님의 마지막 말씀은 천하보다도 한 생명이 귀하다고 하신 하느님의 말씀이 오늘 김진숙에게 가장 절실하다. 살아서 다 못한 것 죽어서 어떻게 이루겠니. 너는 꼭 살아서 이뤄야 할 일이 있으니 너는 꼭 죽지 말고 내려와야 한다."고 하셨다고 했다. 어머님은 어떤 분이셨는지 물었다. "내 트집과 고집을 다 받아 주신 분이시다. 엄마 안에서는 걱정이 없었다."고 했다. 세상의 자식들과 당신 소생 자식 모두에게 이소선여사가 있으면 걱정이 없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분과 있으면 걱정이 없었다고 했다. 호되게 야단을 맞아도 엄마에게 맞는 것이기에 노여움이 없었다고 했다. 너그러웠지만 화가 나시면 호랑이가 되셨다고 했다. 뒤를 안보고 그냥 뛰어들었다고 했다. 이분과 함께하면 후회가 없었다고 했다. 후회를 하지 않는 삶을 살기가 얼마나 힘든지를 안다. 후회를 하지 않는 삶을 당당히 살아낸 분이 세상을 떠났다. 아들을 만나도, 이분이 믿는 더 높은 그분을 만나도 당당히 안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발인예배에서 천상병 시인의 귀천이 낭송되고 영결식에서 장사익은 귀천을 노래했다. 귀천
천상병 詩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 비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덮으러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 비 함께 단 둘이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 비 함께 단 둘이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이소선 여사는 이 세상의 거친 소풍을 끝내고 하늘로 돌아가는 날, 비록 눈물 마를 날 없고 가슴이 턱턱 막히는 아득한 날들이 태반이었을지라도, "내 아들과 수많은 노동자가 힘을 합쳐 조금씩 변해가는 세상을 보았노라고, 내가 자식들을 위해 걸어온 모든 여정에 단 한 점의 후회도 없었노라"고 저 하늘에서 당당히 말씀하고 계실 것만 같다.
노동자의 영원한 어머니, 이소선 여사님의 영원한 안식과 명복을 간절히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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