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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의 묘소 곁에서 고인의 손자들이 천진난만하게 뛰어놀았다. 고인은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을 예감하고, 손자들에게 평소 갖고 싶었던 선물이 무엇인지 미리 물어보았다고 한다. 아이들이 자전거 등을 말하자 할아버지는 일일이 선물을 사서 들려주었다. 다정했던 할아버지의 기억을 품고 맑게 웃는 아이들을 보며, 고인 역시 저 세상에서 빙그레 미소 짓고 있을 것만 같았다.
| ▲ 고인이 봉사를 다녔던 곳에 떡과 과일을 전하다 ©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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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지에서 내려와 점심을 마친 후, 고인의 아내와 처제들은 고인이 생전에 정기적으로 봉사를 다녔던 기관들을 찾아 떡과 과일을 전달했다. "남편도 분명 이렇게 하기를 원했을 것"이라는 이지선 씨의 말에 가슴 깊은 곳에서 잔잔한 감동이 일었다. 생과 사를 넘어 뜻을 같이하는 두 사람은 참으로 천생연분이었다.
| ▲ 지인들 고인의 70세 생일상을 받다 ©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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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박소담 시인의 유가족은 평소 고인과 두터운 정을 나누었던 지인들을 초대해 저녁 식사를 대접했다. 이 자리에서 딸 박신영(39) 씨가 어머니 이지선 씨가 남편을 그리며 쓴 추모 시 〈그대 떠난 후〉를 낭독했다.
그대 떠난 후
<── 이지선>
당신이 담담하게 떠날 준비를 하는 동안 나는 이별 연습을 했습니다. 이 순간이 어쩌면 당신과의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그동안 대수롭지 않은 일로 티격태격하며 보냈던 시간들이 너무나 아깝고 후회스러웠습니다.
태어난 모든 생명은 때가 되면 새로운 생명에게 자리를 넘겨줘야 하는 게 자연의 이치라며, 지금까지의 삶에 감사하다던 당신. 치아 몇 개를 뽑고 임플란트를 다시 해야 한다는 의사의 말에 "얼마 살지도 못한다는데 돈 들여 할 필요가 있겠냐"던 당신의 말에 제 가슴은 또 얼마나 무너져 내렸는지요. 결국 두 달도 채 쓰지 못하고 떠나셨지만, 그때 치료를 해드리기 정말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봉사나 사회활동을 할 때는 미처 몰랐는데, 직접 암 투병을 해보니 이 고통이 얼마나 심한지 알겠다며 나중에 암 환자들을 도울 수 있게 해달라고 내게 부탁하셨지요. 해외 근무가 잦아 아이들이 자랄 때 곁에 있어 주지 못한 게 가장 큰 후회이자 아쉬움이라며, 지난여름 중국 여행 때 손자를 데리고 동행하셨던 것은 정말 잘한 일이었습니다.
의미 없는 생명 연장을 위한 의료 행위를 단호히 거부하고, 죽음보다 다가올 통증을 더 두려워해 호스피스 병실로 옮겼을 때, 도리어 편안해하던 당신의 얼굴을 보며 저 역시 안심했습니다. 신부님께 임종을 준비하는 병자성사를 받고 의사이자 목사님이신 분의 기도와 돌봄 속에서 떠나셨으니 당신은 참 복이 많은 사람입니다.
우리 가족 모두 오래전에 장기기증을 신청해 두었지만, 암으로 사망한 당신은 조건이 맞지 않아 끝내 실천하지 못했지요. 대신 저라도 몸 관리를 잘해서 당신의 고결한 뜻을 꼭 이루겠습니다.
떠날 날이 가까워지자 아들, 딸 부부와 손주들까지 모두 불러 그동안 쌓였던 상처들을 씻어내고, 형제들과 가까운 친구들을 청해 화해와 용서, 위로를 주고받으시던 당신. 이제 떠날 준비가 다 되었다며 홀가분해하던 당신의 모습이 참 아름답고 부러웠습니다.
장례식은 하늘나라로 가는 축제처럼 치러달라던 당신의 부탁대로, 빈소는 흰 국화 대신 화려한 꽃들로 장식했고 조화 역시 그렇게 받았습니다. 생전의 시화전도 열고 당신이 걸어온 길을 영상으로 돌아보았지요. "열심히 산 그대, 천국에서도 파이팅!"이라 적어 내가 보낸 꽃바구니와 "제 아버지여서 자랑스럽습니다. 사랑합니다"라며 자식들이 올린 꽃바구니도 보셨는지요? 곁에 계실 때보다 떠나간 지금의 당신이 너무나 가슴 시리도록 사랑스러워, 나는 날마다 당신의 사진에 입을 맞춥니다.
남편에게 보내는 아내의 편지는 장내를 숙연하게 만들었고, 참석한 이들의 눈시울을 붉혔다.
부인 이지선 씨의 인사말이 끝난 후, 지인들이 차례로 무대에 올라 고인이 남긴 시들을 담담하게 낭송하기 시작했다.
이런 사람
<── 박소담>
뜨거웠으면 좋겠다
삶의 힘줄이 터지도록
구름 낀 날은 싫다
따가운 햇살에 속살이 돋아나도
뜨거운 태양이 좋아
산다는 것도 그래
길다고 좋은 것은 아니지
짧아도 뜨겁게
죽고 나면 이런 소리 듣고 싶어
"참 아까운 사람이야
좀 더 살았어야 하는 건데"
(2001년, 제3시집 중에서 / 정문자 낭송)
우리는 홀로 떠나야 한다
<── 박소담>
혼자라는 건
태어난 그 순간부터
신이 선택해 준 운명이니
우리는 홀로 떠나야 한다
바람을 타고 구름을 타고
떠나야 할 꿈동산이 어딘지 모르는
어둠의 미로라 할지라도
우리는 홀로 떠나야 한다
풀잎에 맺힌 아침이슬이
찬란한 햇살로 하늘에 올라
어디론가 사라져 가듯
우리는 홀로 떠나야 한다
내가 사랑하는 모든 이와
나를 사랑하는 모든 것이
만남과 이별의 진정한 의미를 가슴에 새기며
우리는 홀로 떠나야 한다
홀로 태어났다는 건
홀로 떠나야 함을 의미하는 것
꽃잎 사이로 스치는 바람처럼
조용한 입맞춤으로
우리는 홀로 떠날 줄 아는
이별의 완숙함을 배워야 한다
(1998년, 부부 시집 제1집 중에서 / 문도진 낭송)
이상과 허상
<── 박소담>
따지고 보면 삶의 빈터 위에
집 한 채 마련한 후
죽음의 깃발 하나
단단히 꽂아 놓고
오순도순 살다 가면 그만인데.
꿈틀거리는 허상의 빛
저 편을 넘어서려는
지나친 욕망 때문에
삶의 깃발만 꽂아 놓고
영원의 줄을 잡고 고뇌에 빠져든다.
태어나면서 고통 준
모태의 산고(産苦)에도
꼬옥 쥔 손아귀엔
어차피 빈손인 걸
아픔과 고뇌
생의 종착역 내리기 전
떨쳐버려야지
떨쳐버려야지
(2000년, 제2시집 중에서 / 박길목 낭송)
| ▲ 고인의 친구 김규성(71)씨 추모의 글을 쓰다 ©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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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식에 참석한 지인들은 저마다 방명록에 고인을 향한 그리움을 꾹꾹 눌러썼다. 고인의 오랜 친구 김규성(71) 씨는 "먼저 간 친구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네. 이제 내 차례인가 봐. 가서 보세"라고 적어 안타까움을 더했다. 시흥자치신문 김부자 사장은 "소담 선생님, 그동안 행복했습니다. 하늘나라 아프지 않은 곳에서 편안히 웃으세요. 2011. 10. 7 소담 선생님을 그리며"라는 글을 남겼다.
이만균(79) 씨는 "그대의 떠남 또한 참으로 아름답구나. 우리 그대의 추억을 새기며 살아가네. 어찌 이리 그리운지 모르겠네"라며 애도했고, 정문자 씨는 "시간이 흐를수록 멀어지는 것 같아 슬픕니다. 살아생전 문학에 대해 더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눌 걸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사랑합니다, 소담 선생님"이라고 슬픔을 전했다. 최영철(62) 씨는 "마음의 고향처럼 포근하고 넉넉하셨으며, 유난히 정이 많으셨던 아름다운 거인이자 영원한 휴머니스트. 못다 하신 사랑이 유족들의 건강과 행복으로 이어지길 바라며 삼가 명복을 빕니다"라고 적었다.
함께 문학 활동을 했던 이연옥(59) 당시 문인협회 지부장은 "남은 이들에게 너무 무거운 짐을 남긴 것 같아 미안하다던 선생님의 마지막 말씀을 사랑으로 받들겠습니다. 선생님, 멈추지 않고 힘차게 달리겠습니다"라며 다짐을 전했다.
김민지 씨는 "시흥시에서 나중에 꼭 같이 술 한잔하고 싶은 사람이 바로 김민지라고 하셨던 그 말씀을 살아생전 실천하지 못해 너무나 아쉽고 죄송합니다"라며 고인을 추억했다.이정우 씨는 짧게 "소담 선생님, 온 마음으로 님을 그리워합니다"라고 적었고, 안봉옥 전 문협 지부장은 "이별의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아무런 경계도 없이 그냥 지금도 늘 계시던 그 자리에 가까이 계신 듯합니다"라며 황망함을 표했다. 이명예 씨는 마당의 나무를 바라보며 "저 포도나무처럼 늘 부지런하고 멋지셨던 생전의 모습이 사무치게 그립습니다"라고 추모했다.
박길목(55) 씨는 "소담 형님은 그 성품처럼 이름도 참 소박하셨다. 손수 포도농장을 가꾸고, 밤이면 시를 쓰고, 틈틈이 색소폰을 연주하셨다. 삶이란 바로 저런 것이구나 하는 것을 형님을 보며 배웠다. 나는 소담 형님이 만들어 준 서늘하고 넉넉한 그늘 아래에서 한동안 참 행복하게 살았다"고 고백했다. 최준렬(54) 씨는 세례명을 부르며 "리노 형님! 70세 생신을 축하드립니다. 남겨진 가족들과 형님을 사랑하는 저희들을 하늘에서 내려다보시며 항상 즐겁게 지내세요. 사랑합니다, 리노 형님"이라고 인사를 건넸다.
황옥순(66) 씨는 "송암 포도농원에 놀러 갈 때마다 버선발로 반갑게 맞아주시던 소담 부부의 모습이 선합니다"라며 눈시울을 붉혔고, 최분임(50) 씨는 "언제나 좋은 말씀으로 주변 사람들의 지친 마음을 토닥여주시던 인자한 모습이 기억에 남습니다. 남겨진 이 세상에서 더 많이 사랑하고 아끼며 살아가겠습니다"라고 다짐했다. 고인의 큰형인 박근식(74) 씨는 무어라 말도 잇지 못한 채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 그저 자리가 너무나 허전하다"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이후 박길목 시인은 故 박소담 시인을 추모하는 애틋한 시를 《소래문학》에 발표하기도 했다.
<소담 숲마을 유치원> -박길목- 구월동에서 버스 터미널 쪽으로 쭈욱 걷다보면 소담 숲마을 유치원이 나온다. 가로수 뒤 켠으로 가끔씩 눈 맑은 아이들 웃음소리가 흔들리는 잎사귀에 걸터 앉아 그네 타면 발길 바쁜 바람도 잠시 브레이크를 밟는다. 구월동에 九月이 오기 전 나는 소담이라는 착한 이름을 가진 사람을 떠나 보냈다. 그를 터미널 까지 배웅하면서 언제쯤 돌아오냐는 인사는 차마 하지 못했다. 구월동에 九月이 오고 갔다. 소담 숲마을 유치원 아이들이 노란 가방을 메고 모두 집으로 갔다. 저문 하늘, 꽃물 뒤집어 쓴 구름은 어디쯤 갔을까 하고 새로 나온 작은 별 하나가 소담스레 깜박거렸다. ※구월동: 인천광역시 ※소담 숲마을 유치원: 인천광역시 구월동 소재
식사가 이어지는 동안 자녀들은 어머니의 손을 꼭 쥐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딸 박신영(39) 씨는 "사랑 표현에 누구보다 솔직하셨던 아빠. 항상 우리를 껴안고 뽀뽀해 주시면서도 늘 아쉬워하셨던 분. 그 지극한 사랑을 글과 노래로 전해주시던 아빠가 오늘 밤 유독 더 그립습니다"라고 말했다. 아들 박신규(38) 씨는 영정 사진을 바라보며 "이승에서 못다 한 이야기들은 나중에 만나서 꼭 다시 나눠요"라며 애써 눈물을 삼켰다.
사위 한인석(44) 씨는 장인을 향한 깊은 존경을 표했다. "장인어른께서는 항상 불꽃처럼 뜨겁게 인생을 사셨고, 단 한순간도 배움과 나눔을 실천하는 일을 멈추지 않으셨던 멋진 분이셨습니다. 아버님이 보여주신 삶의 궤적을 천만분의 일이라도 닮아가는 것이 제 인생의 최종 목표입니다. 아버님, 감사했습니다." 부인 이지선(63) 씨는 남편의 사진을 가만히 쓸어내리며 "여보, 나를 평생 동안 지루하지 않게, 매 순간 행복하게 해줘서 정말 고마웠어요"라며 마지막 고백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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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오직 시로써 자신을 증명한다. 생전 故 박소담 시인과 이지선 시인은 부부의 연을 넘어 문학적 동반자로서 여섯 번째 부부 시집을 세상에 남겼다. 그들의 마지막 시집에 수록된 세 편의 시를 여기에 기록한다.
내 생에 봄이 다시 온다면 박소담 내 생에 봄이 다시 온다면 푸른 바다가 끝없이 펼쳐진 산마루에 아내가 좋아하는 산막 한 채 지어놓고 앞마당에 매화 한 그루 잘 키워 벗하며 살고 싶네 매화꽃 탐스럽게 피거든 그리운 사람에게 꽃다발 한 아름 강물에 띄워 보내주고 청매실로 술 담가 푹 익거든 정다운 친구와 술잔 나누며 뱃고동 소리 담아 내가 좋아하는 시 한 편 낭랑하게 읊어주고 싶네 (2011년 박소담. 이지선 여섯 번째 부부시집 중에서) 생존 이지선 갈라진 시멘트 콘크리트 사이로 민들레 노오란 꽃 피워냈다 홀씨 하나 날아들어 뿌리 내림 오죽했으랴 그 꽃도 홀씨 되어 어딘가에 뿌리내려 꽃을 피워내겠지 시멘트 바닥을 원망하지 않으며 ( 2011년 박소담. 이지선 여섯 번째 부부시집 중에서) 병원 앞 풍경 이지선 장맛비에 우비를 입은 노파가 병원 입구에서 아마도 어느 공터에 심었던 듯 호박잎을 검정비닌 봉지에 몇 무더기 담아놓고 오가는 사람에 상관없이 호박잎 줄기를 다듬고 있다 다 팔아도 한 끼 식사거리도 안 될 것 같은데 노파의 손놀림은 꾸준하다 얼굴에 흘러내리는 물이 눈물인지 빗물인지는 모른다 손발이 부러진 사람, 수명을 연장 받지 못한 환자 불치의 병을 가지고 태어난 신생아, 세상을 떠난 시신도 노파 앞을 스쳐 병원에 들어가지만 노파의 눈은 오직 호박잎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2011년 박소담. 이지선 여섯 번째 부부시집 중에서)
세상을 읽는 시선이 누구보다 따뜻했고, 이웃을 깊이 사랑했으며, 그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 또한 참으로 진솔했던 한 시인이 마침내 지상의 소임을 다하고 떠났다. 그를 보내는 이들은 저마다 가슴속에서 깊은 아쉬움과 슬픔을 토해냈다. "저 세상 끝 천국에는 시인들만의 동아리방이 있어서 그곳에서 밤새 시를 쓰고 토론할 걸세. 자네는 천천히 오시게나"라며 먼저 간 동료 시인들을 그리워했던 그는, 결국 먼저 그 동아리방의 문을 열러 길을 떠났다.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길, 육신을 갉아먹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주변 사람들에게 유머와 품위를 잃지 않았고, 오히려 슬퍼하는 이들을 따뜻하게 감싸 안았던 거인.고마웠습니다. 찾아오는 이들을 향해 늘 팔을 활짝 펼치며 반겨주던 그 특유의 따스함과 영혼의 빛남을 우리는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입니다. 고인의 영원한 안식과 명복을 빌며, 마음을 다해 마지막 인사를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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