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11월 13일은 전태일 열사가 평화시장 앞길에서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갖고 분신한 날이다. 평화시장 앞 버들다리의 이름을 전태일다리와 병행 표기하기로 함에 따라, 분신 40주기가 되는 2010년 11월 13일 오전 9시 ‘전태일다리 현판식’을 가졌다.
그가 재단사로 일했던 평화시장의 공장은 허물어졌고 새롭게 지은 건물들이 들어섰다. 또 다른 노동자가 만든 겨울옷들이 진열되어 판매되고 있었다.
전태일다리 현판에는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손학규 민주당 총재, 유시민 참여정책연구원장, 전태일의 여동생 전순옥 씨, 권노갑 전 국회의원 등 많은 정치인과 시민들이 참석했다. 박계현 사무국장은 전태일다리 추가 조성 경과를 보고했다.
"전태일 열사 35주기였던 지난 2005년도에는 평화시장 앞에 전태일 열사의 흉상과 동판을 조성했습니다. 40주기를 맞아 전태일다리로 이름 짓기 위해 지난 2010년 8월 26일부터 매일 8명이 1시간씩 교대로 1인 시위를 하는 계획을 실행했습니다. 초등학생부터 중·고등학생, 노동자, 상업인, 문화예술인, 법조인 등이 참여했습니다. 국민들의 지지 성원에 힘입어 마침내 서울시가 이곳 버들다리를 전태일다리와 병행 표기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경과보고를 하는 동안에도 평화시장으로 물건을 나르는 오토바이 운전자들은 전태일 동상의 뒤를 지나고 있었다. 바쁜 시장의 열기가 온몸으로 느껴졌다.
전태일은 1970년 11월 13일 오후 1시 30분경 22살의 나이에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며 스스로 횃불이 되었다. 그가 쓰러졌던 자리에는 횃불을 형상화한 동판이 바닥에 깔렸고, 참석자들은 그 위를 손으로 짚으며 추모했다. 이어 오전 11시에 마석 모란공원에서 열리는 ‘전태일 40주기 추도식’에 참석하기 위해 버스로 이동했다.
| ▲ "나는 7번 시다였다."며 당시의 상황을 이야기 해 준 신순애 씨 ©최영숙 |
|
버스 안에서 당시 '7번 시다(보조공)'로 일했던 신순애 씨가 마이크를 잡았다. 그녀는 1970년 11월 13일 당시, 공장장이 “얘들아, 너희 구름다리 밑에 가지 마. 지금 깡패가 죽어서 가마니로 덮어놨어”라고 했던 말을 전하며 전태일을 처음 마주한 순간을 회상했다.
“1번 시다가 옆 친구였는데 이름 없이 ‘1번 시다’, ‘7번 시다’로 불렸다. 1번 시다가 M자 라벨을 붙이라고 하면 자꾸 W 라벨을 붙여서 재단사에게 혼났다고 했다. 왜 자꾸 그러느냐고 물으니 ‘한글도 모르는데 영어는 어찌 알겠느냐며, 공장에 나올 때 M자가 제발 걸리지 말라고 기도하고 나온다’고 했다. 친구에게 M자가 걸리면 내가 대신 잘라 주었다.”
그녀는 전태일의 죽음을 알고 나서 자신 역시 전태일 앞에 죄인이었고, 전태일을 죽였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녀의 삶은 바뀌었다. 1번 시다의 아픔을 알기에 창신동에 5만 원짜리 방을 얻어 한글 반을 운영했다. 처음 가르친 단어는 ‘가나다라’가 아닌 ‘대림사’, ‘원앙사’, ‘삼정사’ 등 자신들이 다니는 공장 이름부터였다. 신기해하며 배우던 이들은 3개월이면 한글을 깨쳤다고 한다. 신순애 씨는 현재 대학원에 진학해서 공부를 더 하고 있다. 전태일은 한 여성을 당당하게 살아가는 삶으로 완전히 바꾼 것이었다. 그의 힘이 느껴졌다.
모란공원 입구에서는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82) 여사가 오는 손님들을 맞았다.
| ▲ 조영래 변호사 묘에 예의를 표하는 전태일의 어머니 ©최영숙 |
|
전태일 묘로 가는 길에 조영래 변호사의 무덤이 있었다. 손학규 민주당 총재가 인사하고 갔다. 이소선 여사도 잠시 들러 인사를 했다. 전태일에게 있어서 조영래 변호사는 사후 최고의 변호사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은 생전에 만난 적이 없었다. 사후 전태일을 기억하게 하고 그를 오늘에 있게 한 가장 큰 공로는 전태일 자신의 삶과 어머니, 그리고 조영래 변호사가 쓴 ‘전태일 평전’이었다.
그는 전태일 평전 ‘어느 노동자의 삶과 죽음’을 통해 전태일이란 이름을 불멸의 이름으로 남게 했다. 그는 죽어서 전태일 가까이 묻혔다. 그의 묘비명을 보면서 놀라웠다. 앞면에만 ‘조영래 묘’라고 적혀 있었고 뒷면은 그냥 공백이었다. 언제 태어났는지 무엇을 했는지, 그를 알 수 있는 것은 앞면의 표지뿐이었다. 이름 하나로 모든 것을 말하는 듯했다.
| ▲ 전태일 40주기 추도식이 열린 마석모란 공원 민주묘역 모습 ©최영숙 |
|
전태일 40주기 추도식에는 400여 명의 사람이 참석했다. 마석 모란공원 민주묘역은 사람들로 가득 찼다.
| ▲ 전태일 재단 이사장 조헌정 인사말 © 최영숙 |
|
전태일재단 조헌정 이사장은 모시는 글에서 “열사의 인간을 향한 깊고 숭고한 사랑의 헌신적 행위는 이 땅의 수많은 사람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습니다. 지식인들의 탁상공론의 허구를 드러냈고, 자신의 행복과 안일만을 추구하던 평범한 시민들에게는 삶의 의미를 묻도록 만들었으며, 대학생들에게는 사회 부조리와 구조적 악에 저항하도록 만들었고, 노동자들에게는 법이 보장하고 있는 권리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투쟁에 의한 결과물임을 깨닫게 만들었습니다”라고 했다.
| ▲ 이소선(81)님 아들 무덤 앞에 앉다 ©최영숙 |
|
이소선 여사가 아들 전태일의 추도식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소선 여사의 삶은 투쟁과 고난의 연속이었다. 아들의 분신 후, 아들이 살았던 22년의 거의 두 배에 가까운 40년을 노동자들의 삶과 함께했다.
| ▲ 손주를 보듯 반기는 이소선(81)님 ©최영숙 |
|
그녀는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을 비롯하여 아들의 친구, 또는 어린 손주뻘 되는 청년에게도 그저 ‘어머니’, ‘엄마’라고 불렸다.
그녀 나이 41살 때 아들 전태일이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어머니는 아들의 뜻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장례를 치르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시신 인수를 거부했다. 그 아들에 그 어머니였다.
서슬 퍼렇던 당시에 상상하기 힘든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이소선 어머니는 근로 조건 개선과 노조 결성 등의 8개 항의 요구 조건을 내세웠다. 당국은 협박과 회유, 거액의 돈으로 매수하려 했지만 끝내 거부하고 평화시장에 ‘청계피복노동조합’을 결성하는 데 성공하였다. 아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은 어머니였다.
| ▲ 이소선(81)어머니 인사말을 하다 © 시흥시민뉴스 |
|
이소선 어머니는 “여기 오신 분들만 하나 되면 뭐든지 할 수 있다”며 “우리 모두 하나가 되어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을, 해낼 것을 해내자”고 말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끝으로 모든 추모식 행사는 끝났다.
추도식이 끝나고 점심 식사를 했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재단에서 마련한 점심을 들었다.
점심 식사 후 천천히 공원을 둘러보았다. 멀리 누군가의 무덤에서 묵념하고 있는 학생들의 뒷모습이 보여 올라가 보았다. 2005년도에 사망한 김남식(당시 81세)의 묘였다. 학생들은 묵념하고 노래를 불렀다.
바로 옆은 1987년 전두환 정권 시절 치안본부에서 “탁 하고 책상을 치니 억 하고 죽었다”고 발표했던, 23살의 나이에 고문을 받다 숨진 박종철의 묘가 있었다. 그의 죽음을 듣고 가슴이 아팠던 기억이 다시금 떠올랐다. 6월 항쟁의 불을 붙인 것은 그의 억울하고도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죽음이었다. 22살의 전태일, 23살의 박종철. 그 짧은 생을 마감한 젊은이들의 죽음 앞에 다시금 숙연해졌다.
마석 모란공원 민주묘역으로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사람들은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대절버스를 타고 평화시장으로 다시 왔다.
전태일다리 아래에 걸개그림들이 걸려 있었다. 오른쪽 걸개그림은 두 번이나 철거되었다고 했다. 사람들은 청계천을 걸으며 이를 읽었다.
| ▲ 전태일 흉상에 두를 목도리를 짜는 사람 ©최영숙 |
|
전태일다리 위에서 목도리를 뜨고 있는 손민아(38) 씨를 만났다. “전태일다리에 문장을 적은 리본들을 묶어서 목도리를 만든다. 목도리는 전태일 흉상에 걸어줄 것”이라고 했다. 전태일 40주기에 보는 현실은 어떠냐고 물었다. “여전히 넘어야 할 산이 있음을 느낀다. 그게 인생이라고 하면 무책임하다. 진짜 산은 잘 넘도록 여러 장비가 나오는데 이 산은 여전히 엉망이다”라고 했다.
폐스티로폼 상자로 전태일 40주기에 맞춰 상상의 꽃 40송이를 만들고 있는 신유아(40) 씨를 만났다. “8시간 문화 노동 봉사를 하는데 평범한 사람들이 평범하게 할 수 있는 작업을 했다. 전태일 흉상 앞에 놓을 것이다”라고 했다.
| ▲ 상상의 꽃을 전태일 흉상 앞에 놓다 ©최영숙 |
|
한 청년이 각자 원하는 꽃으로 볼 수 있는 상상의 꽃이 전태일 흉상을 장식하고 있었다.
전태일다리 동판들에는 많은 글이 새겨져 있었다. 시민들과 정치인들의 글귀가 있었다. 故 김대중 대통령의 “행동하는 양심 전태일! 영원한 우리들의 영웅 전태일!”, 故 노무현 대통령의 “사람 사는 세상”, 전태일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을 지냈던 김문수 경기도지사의 “사람 사랑의 불꽃 전태일”, 손학규 민주당 총재의 “정의 평화 사랑, 전태일은 살아있다”, 김훈의 “언제나 그대 내 곁에” 등이 적혀 있었다. 도종환, 이한열의 어머니 등 시민들의 글도 적혀 있었다. 전태일이 많은 사람의 삶 속에 녹아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전태일의 분신 40주기를 맞아 전태일다리와 그가 묻힌 모란공원을 다녀왔다. 그가 꿈꾸던 세상은 왔을까 싶었다.
| ▲ 전태일 무덤 앞의 조각상전태일 무덤에 있는 전태일 상 ©최영숙 |
|
전태일 무덤에 있는 전태일 상이다. 전태일은 40년 전 故 박정희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냈다.
“존경하시는 대통령 각하, 옥체 안녕하시옵니까? 저는 제품(의류) 계통에 종사하는 재단사입니다. (중략) 저희들의 요구는 1일 14시간의 작업 시간을 단축하십시오. 1일 10시간~12시간으로, 1개월 휴일 2일을 일요일마다 휴일로 쉬기를 희망합니다. 건강진단을 정확하게 하여 주십시오. 시다공의 수당 현 70원 내지 100원을 50% 이상 인상하십시오. 절대로 무리한 요구가 아님을 맹세합니다.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요구입니다. 기업주 측에서도 충분히 지킬 수 있는 사항입니다.”
당시 얼마나 열악한 환경에서 일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럼 지금은 모든 노동자가 행복한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추도사를 한 이정희 대표는 “10월 한 달에만 2명의 노동자가 분신했다”고 했다. 전태일 평전을 쓴 조영래 변호사가 전태일 분신 후 잇달아 벌어지는 분신 사태를 보면서, 혹시 이 책이 기폭제 역할을 하는 것 아닌가 해서 괴로워했다는 말이 떠올랐다.
아직도 근로기준법이 준수되지 않는 사업장들과 비정규직 노동자들, 이주 노동자들의 근로 조건 등에 많은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람은 일을 해서 자신의 양식과 부양가족의 생계를 책임진다. 그 기본적인 것이 보장되지 않을 때 가장 난폭해지고 자신과 타인을 공격한다는 생각을 했다.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는 어린이를 안고 40주기를 지켜보았다. 이 소년이 컸을 때 또 이와 같은 불행한 일이 벌어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가졌다.
전태일 열사가 남긴 성찰의 글을 읽었다.
“사랑하는 친우여! 받아 읽어 주게. 친구여, 나를 아는 모든 나여,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여, 부탁이 있네. 나를,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영원히 잊지 말아 주게. 그리고 바라네, 그대들 소중한 추억의 서재에 간직하여 주게. 뇌성 번개가 이 작은 육신을 태우고 꺾어 버린다고 해도, 하늘이 나에게만 꺼져 내려온다 해도, (중략) 그대들이 아는, 그대들 전체의 일부인 나, 힘에 겨워, 힘에 겨워 굴리다 만, 못 굴린, 그리고 또 굴려야 할 덩이를 나의 나인 그대들에게 맡긴 채, 잠시 만나러 간다네, 잠시 쉬러 간다네. (중략) 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또다시 추방당한다 하더라도, 굴리는 데, 굴리는 데 도울 수만 있다면, 이룰 수만 있다면, 그대 소중한 추억에 간직된 나는 조금도 두렵지 않을 걸세.”
| ▲ 영화 아름다운 청년에서 전태일의 분신 장면 ©최영숙 |
|
그는 “나를 아는 모든 나여,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여”라며 내가 너였고, 당신이 자신이었다.
16살 때부터 평화시장 봉제 공장의 시다로 노동을 시작했던 전태일. 집으로 돌아갈 버스비로 어린 여공들에게 풀빵을 사 주고 통금에 걸려 걸어왔던 전태일. 스스로 바보라며 ‘바보회’를 만들어 활동했던 전태일.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쓰고 노동청에 서류를 제출하며 열악한 근로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힘을 다했던 전태일. 문자뿐인 근로기준법 책을 화형하고 스스로 횃불이 되어 불타올랐던 전태일. 그의 죽음이 당시 그저 깡패가 죽어 있는 것으로 치부되었던 전태일. 그러나 세상은 그의 분신으로 거대한 구도적 틀이 움직였다.
사람을 움직이게 했던 힘은 전태일, 그리고 그의 어머니, 그리고 노동자들이었다. 현재 그가 살아있다면 지금의 현실을 어떻게 보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힘든 노동자들의 삶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 '엄마를 부탁해' 걸개그림과 청계천을 건너는 가족 모습 ©최영숙 |
|
가족이 청계천을 건너고 있다. 머리 위로 ‘엄마를 부탁해’라는 걸개그림이 보였다. 엄마를 부탁할 필요가 없는 세상이 되는 것이 진정 그가 꿈꾸던 세상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