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 따라 돌고 도는 다락밭이야기-소만2018년 5월21일 부지깽이도 거드는 소만
절기 따라 돌고 도는 다락밭이야기-소만 2018년 5월21일 부지깽이도 거드는 소만
소만小滿. 만물이 차오른다는 의미로 양력 오월 하순에 들었으며, 여덟 번째 절기다. 슬슬 여름의 분위기를 내는 가운데, 만물이 차오르니 신록이 우거지고, 꽃이 만발하고, 월동한 식물들이 씨앗을 맺는다. 밀 보리의 알곡이 익어가니 비로소 보릿고개의 막바지를 알린다.
절기 이야기 연재를 위해 지난 농사 일지를 이리저리 들춰보곤 하는데, 매년 5월 입하정도까지는 빼곡하게 농사일지를 쓰다가 갑자기 농사일지가 사라진다. 그러다가 간간히 월에 한 번 정도 쓰거나 아니면 확 건너뛰고 갑자기 10월 농사일지가 나온다. 내가 기록하고도 황당하다. 소만은 텃밭 일이 엄청나게 바쁠 때다. 오죽하면 다락밭에 놀러오는 고양이한테도, 궁둥이 밑에 한가하게 굴러다니는 돌멩이한테도 거들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게다가 얄미운 새들은 콩 심는 족족 파먹고, 통통 여문 밀이나 시금치 씨를 그 자리에서 꿀꺽해버린다. 그 와중에 구경할 꽃은 얼마나 많은지, 바쁜 일 끝나고 나면 져버릴까 싶어 곁눈질로 눈요기를 한다. 소만은 정신이 없다. 해는 길어져서 늦도록 일하기가 일쑤다. 해도 해도 끝나지 않는 밭일에 해가 지고 눈앞이 어둑해져 잡초인지, 작물인지 구분이 안 될 즈음 어쩔 수 없이 호미를 철수시킨다. 저녁밥 때를 놓치고 밭에서 지치도록 일하고 들어오면 당연히 저녁 메뉴는 라면이다. 쌈 싸먹을 요량으로 뜯어온 상추를 라면에 투하하면 라면 국물 맛이 시원해진다. 누가 들으면 엄청난 대농이라도 되는 줄 알겠다. 늦잠 자고, 느려터지게 일하면서 일의 효율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노동집약형 유기순환 텃밭은 아무리 코딱지만 해도 소만을 맞은 만물 앞에선 정말 바쁘기 그지없다.
밀밭에서 공존에 대해 생각하기
아침나절 밭으로 향하는 내 발걸음에 참새 떼가 놀라 날아간다. 한두 마리가 아닌데, 수상쩍다. 부리나케 밀밭으로 가보니 웬걸. 올해도 참새 떼의 습격으로 어여쁘던 밀밭이 참담해졌다. 매년 밀이 탐스럽게 익을 만하면 참새가 싹쓸이를 하곤 했다. 손바닥만 한 밭에서 곡식 삼을 만큼 밀을 수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밀을 심으면 땅심도 좋아지고, 풍경도 예뻐서 심는다. 제대로 키우면 밥에 넣어 먹을 정도의 통밀과 내년 씨 할 거리는 거둘 수 있다. 그런데 가장 알곡이 통통할 때 귀신같이 참새가 먼저 알고는 밀밭을 휩쓴다. 참새한테 좀 나눠줘도 좋으련만, 아주 싹쓸이를 하니 씨도 안 남는 형편이다. 주변에 온통 비료와 비닐로 농사를 지니 요즘 새들은 먹을 게 귀하다. 도시에서는 새들이 먹을 물도 없어서 목이 말라 죽는 새들도 있다. 가물 때는 고무다라에 물을 받아두고 쓰는데, 새들이 고무다라에 와서 목도 축이고, 목욕도 하고 간다. 고무다라가 깊어서 물을 마시다가 빠져죽기도 하는 새를 보고는 새 먹을 물받이를 따로 군데군데 두기도 한다. 밭을 갈거나 풀을 뽑으면 새들이 겁도 없이 내 뒤에 바짝 붙어서는 땅을 쪼는데, 땅을 파헤치며 나오는 풀씨나 벌레를 잡아먹는 것이다. 얘네도 눈치가 빤해서 농부가 훑고 지나간 자리에 먹을거리가 생긴다는 것을 아는 게다. 가끔 풀을 매는 엄마가 허공에 대고 화를 내며 혼잣말을 하는데, 이상해서 달려가 보면 새랑 대화, 아니 실랑이 중이다. 우리밭이 온갖 동네 새들 사이에 비닐도 안치고, 약도 안치는 밭이라고 소문이 난 거라고 화살이 나한테 꽂힌다. 좀 같이 나눠먹고 살면 좋은데, 새는 나와 나눠먹을 생각이 없는 게 문제다. 참새가 가장 좋아하는 것 중에 하나가 시금치 씨앗인데, 가벼운 몸으로 시금치에 꽃대에 앉아서는 껍질을 까서 야무지게 씨앗을 죄 빼먹어버리고 하나도 남겨놓지 않는다.
물도 나눠주고, 벌레도 던져줬으니 내 입장도 좀 배려해주면 안되나? 부질없는 기대다. 그러다가 문득 드는 생각. 나는 이 밀을 새의 밀이 아니라 내 밀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뭐지? 내가 심었으니까? 내가 씨앗을 심기는 했는데, 온전히 내 힘으로 키웠다고 말할 수 없다. 나는 씨만 심었고, 실은 땅과 비와 해가 더 많은 일을 했다. “자연自然” 스스로 그러하다. 인간은 스스로 그러한 존재들을 인정 하지 않는다. 새는 밀을 좋아하도록 태어났고, 그런 존재다. 못된 것은 새들의 터전인 숲을 앗아간 인간이지, 밀이 좋아서 밀을 먹었는데 주인이라고 주장하는 자의 허락을 받고 적당히 먹지 못한 새들이 악당은 아닐 것이다. 보통 우리가 해충이라 부르는 것도 그렇다. 내가 먹을 배추를 먹어치우는 진딧물이나 나방 애벌레는 형상부터가 농부에겐 악당벌레들이다. 그러나 자연이란 게 스스로 그러하여 먹이활동과 짝짓기에 전념할 뿐, 농부를 해코지할 의도는 없었다. 의도란 인간만이 가진다. ‘해충’이라는 모순된 단어를 만들어내 듯. 자연에는 착한벌레도 나쁜벌레도 없다.
무엇과 공존하든, 완전히 나쁜 공존도 완전히 좋은 공존도 없다. 공존이란 나의 후한 아량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 거다. 원래 존재하는 것들의 존재방식을 인정하는 것일 뿐. 이 사회에서 태어나면서부터 꾸준하게 학습되어온 소유에 대한 개념, 자연에 대한 관리자 관점, 터무니없는 인간의 위상. 이런 태도가 더 익숙한 우리에게 공존은 쉽지 않다. 난장판이 된 밀밭에 가슴이 쓰릴 뿐이다. 내 말의 요지는…… 그러니까…… 요런 되도 않는 생각들을 늘어놓으며 참새들에 대한 화를 좀 누그러뜨렸다는 말이다.
소만의 풍경 오월이 되면 논물이 들어온다. 내가 사는 마을이 일 년 중 가장 아름다울 때다. 모가 심기기 전까지 논물은 잠시 강이 된다. 살랑살랑 바람이라도 불어 잔잔한 물결이 이는 모습은 한없이 평화롭다. 멀리서 본 논물에 마을과 하늘이 비친다. 아담한 세상이 또 하나 생긴 것 같다. 물이란 생명체의 마음을 술렁이게 하는 묘한 존재다. 논물이 이럴진대 강이든, 개천이든 물을 끼고 사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요즘은 모내기가 빨라져서 소만도 되기 전에 모가 다 심기는 것 같다. 모가 심긴 논은 논대로 또 예쁘다. 하늘하늘한 어린 모들이 줄맞춰 있는 모습을 보니 모심기는 분명 인류의 예술행위의 일환이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며칠 전엔 오랜 절제력을 잃고 술을 사러 새벽녘 편의점을 갔더랬다. 편의점이 세상에 없었더라면 난 휠씬 건강하게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새벽녘, 주정뱅이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멀쩡하게 차려입고 새까맣게 어두운 집밖을 나오니 아카시아 향기가 콧속으로 쑤욱 들어온다. 낮에는 나지 않던 향기인데 왜 밤에만 나는 것일까. 요즘 모 영화에 나온 아카시아꽃 튀김이 유행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먹어보지 않았지만, 향은 분명하게 예상이 됐다. 마을 입구 오솔길에서는 찔레향기가 풍긴다. 소만은 눈만 아니라, 코도 호강한다.
멀리 보이는 동산에서 뻐꾸기가 소리가 들린다. 틈 앞마당 감나무에는 감꽃이 앙증맞게 피었다. 콩 심을 철이란 뜻이다. 이제 동부를 심고, 또 바로 이어 메주콩을 심어야겠다.
소만의 밥상 상추 겉절이와 샐러드 소만은 할 일은 많은데, 의외로 반찬거리가 그다지 많이 나오는 편은 아니다. 이맘때는 가물기가 좋아서 상추가 점점 질겨진다. 제법 질겨져서 향이 짙은 상추를 나는 좋아하지만 연한 채소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상추가 이렇게 쓴 맛이었나 할 거다. 상추로 지지고 볶고 할 때다. 질리도록 쌈을 먹었다면 겉절이나 샐러드 도전!양파를 얄팍하게 썰어서 넣고, 다양한 양념 소스와 무치면 된다. 사실 무침은 풀맛이라기보다 양념맛 아니던가. -된장 소스(된장에 단거랑 고소한 기름을 잔뜩 넣으면 된다. 그래도 된장이 짜면 두부나 양파를 갈아 넣어 짠기를 덜어낸다. 한번은 남아도는 질긴 샐러드를 갈아서 넣어 봤는데 맛이 괜찮았다.) -간장 소스(마찬가지로 단거랑 기름을 넣고 섞는다. 잘 발효된 집간장을 조금 넣는다. 감칠맛이 쭈~~~욱 올라간다.) -초고추장(상추 넣고 국수 비빔 할 때 쓴다. 많이 만들어 두고 출출할 때 국수 삶아 상추를 손으로 뚝뚝 뜯어 넣고 비벼 먹으면 간편해서 좋다. 생활필수 양념) -오일 소스(올리브 오일 등에 식초, 설탕, 약간의 소금을 넣고 만든다. 올리브 오일은 채소의 고유한 맛을 지켜주는 놀라운 능력이 있는 것 같다. 여기에 좋아하는 과일이나 남아도는 두유, 콩국 등을 넣어 매일 매일 다른 맛을 내서 먹는다.) 나는 사과즙을 내서 간장 소스에 넣은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오렌지 종류의 과일이 들어간 소스를 별로 안 좋아한다. 다른 맛을 다 잡아먹고 오렌지 맛만 강하게 나기 때문이다. 마요네즈는 건강을 위해 되도록 안 먹고. 병에 든 소스도 사먹지 않는데, 병에 든 소스치고 맛있는 소스를 맛본 적이 없다. 돈 쓰고 맛없는 것보다는 차라리 내손으로 만들어 맛없는 편이 난 것 같다. 여기에 허브가 자라면 바질, 휀넬, 고수 등 향기 나는 풀을 잘게 썰어 넣거나 갈아 넣는 것도 맛있다. 느림의 모친처럼 향기 나는 풀을 극단적으로 싫어하는 사람과 먹을 때는 삼가시길. 요즘 갓씨앗을 거둘 때인데, 갓씨와 겨자씨가 맛이 같아서 갓씨앗이 홀그레인머스타드 소스를 만들 수도 있다. 모름지기 양념이든, 소스든 창의력으로 만드는 법! 정해진 법이 없다. 고소하고, 달짝지근하고, 다소 짭짤하면 그만인 것을. 만약 정성껏 만들었는데도 맛이 없다면 설탕을 더 넣으면 된다. 단맛은 항상 너그러우니까.
딸기 유독 하우스 딸기가 겨울에 생산되는 이유가 뭘까? 다른 작물들도 비료를 주고 하우스에서 키우면 겨울철 생산이 가능할 텐데, 왜 유독 딸기는 겨울과 초봄에 나왔다가 사라질까?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으나 짐작컨대, 농가소득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다락밭의 딸기는, 마트에서 딸기가 사라진지 한 참 뒤인 소만이 제철이다. 노지 딸기는 꿋꿋하게 초여름이 되어서야 붉어진다는 것을 농사짓고 알게 됐다. 다락밭에 오는 손님들도 깜짝 놀란다. 딸기가 지금? 어머, 웬일이니? 오래 전에 딸기모종을 두어 뿌리 얻어다 심고, 이듬해 봄에 다섯 개나 먹었나 싶다. 그 이듬해 봄에는 열리는가 싶더니 다 물러 터지고. 또 이듬해 봄에는 제법 열렸는데, 너무 시어서 당최 온화한 표정으로는 먹을 수가 없었다. 해가 거듭될수록 딸기가 딸기스러워 지더니 지금은 딸기밭 옆을 지나가면 딸기 단내가 물씬 풍긴다. 올해는 제법 당도도 높다. 딸기는 그야말로 방치해놓고 키우는 열매인데, 밭일 마무리하고 물로 훌렁 헹궈서 입에 넣으면 보람차다.
노지 딸기의 단점이 있다면 금방 무른다는 것이다. 물로 씻어 두고 금방 먹지 않으면 수 분 내에 물러 터진다. 아까운 딸기를 물렀다고 버릴 수는 없고, 우유와 꿀을 넣어 갈아서 냉동실에 살짝 얼렸다가 먹으면 더위 먹은 농부의 간식으로는 그만이다.
밭에 열무가 슬슬 나온다. 조금씩 여러 번에 담그려고 3주 정도의 간격으로 씨를 심었다.
첫 열무는 엄마가 김치를 했고, 두 번째 열무도 엄마에게 미뤘지만 아직 열무김치가 남았다고 ‘너나 먹어라’ 하신다. 보아하니 열무가 질겨 보여 못마땅했던 게 틀림없다. 결국 내가 뽑아서 김치를 담그게 됐다. 담가두면 국수니 비빔밥도 해먹고 여름 반찬으로 뿌듯하지만 바쁠 때 하기가 영 성가신 일이 ‘담금’이다. 바쁜 일에 치여서 못 뽑고 차일피일 미루다가 열무가 쇠지면 김치로는 못 담그게 되곤 한다. 아욱도 슬슬 된장국을 끓여 먹을 만큼 컸다. 아욱은 잎을 자주 따주지 않으면 꽃대가 올라온다. 잘 솎아주지 않아도 크지 않고 꽃대만 올라온다. 급한 김에 솎아 놓고 먹지 않아 누렇게 떠서 버리기만 두 번을 했다. 부끄러운 농부 같으니라고.
카모마일차 향긋한 카모마일차 만들어 먹기
감자꽃이 예쁘게 피었다. 올해는 씨감자가 시원찮았다. 게다가 겨우 싹이 올라올 즈음에 때 아닌 꽃샘추위로 냉해를 입어 초기 성장이 영 저조했다. 그래도 무사히 꽃을 피운 것을 보니 마음이 놓인다. 이제 북을 주고, 웃거름도 할 때다. 웃거름은 두 번에 나눠 한다. 한 번은 오줌, 한번은 쌀뜨물. 꽃 한번 보고 북 한번 주고, 꽃 한번 보고 웃거름 하고, 꽃 한번 보고 풀 한번 매고. 허리가 휜다. 휜 허리 좀 펴고 달력을 보니 죈장! 소만이 다 갔네. 망종이 돼버렸네.
소만에 피는 꽃들: 지칭개
글,사진: 느림 nreem@naver.com 생활문화탐구소 틈 http://cafe.naver.com/tmtm20
이 글은 매화동에 있는 ‘생활문화탐구소 틈+다락밭’에서 그간 함께 농사지으면서 기록해온 농사일지를 24절기 흐름에 따라 재구성한 것입니다. 다락밭은 화학비료, 농약, 비닐을 사용하지 않고 토종씨앗으로 유기순환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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