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빗속에 윤동욱 선생 기념비 제막식에 참석하는 주민들 ©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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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3월 1일 11시 산현동 윤동욱 선생 묘소 앞에서는 윤동욱 선생의 기념비 제막식이 있었다. 봄비가 내렸다. 산현동 주민들은 빗속을 걸어서 제막식이 열리는 묘역으로 삼삼오오 왔다.
윤동욱 선생의 기념비가 제작된 것은 시흥문화원에서 2009년 6월 17일 시흥문화원장 정상종을 위원장으로 하는 시흥의 인물 선양사업 추진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첫 번째 대상 인물로 3.1운동에 적극 참여했던 윤동욱 선생이 선정되어 2009년 11월 23일부터 모금운동이 전개되어 기념비를 건립하게 되었다.
| ▲ 윤동욱 선생 묘에서 바라본 마을 모습 ©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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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욱 선생은 고종 28년 (1891년) 경기도 시흥군 수암면 산현리 369번지에서 아버지 윤승덕과 어머니 이덕필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 ▲ 윤동욱 선생 묘와 기념비 제막식 행사 ©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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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세 때(1919) 화정리에 갔다가 능곡리 주민으로부터 수암리 비석거리에서 만세를 부른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으로 향했다. 1천여 명의 수암 면민들이 모여 있었다. 순사가 “해산하라, 그러지 않고 읍내로 갈 때는 발포할지도 모른다.”고 위협하자 군중이 우왕좌왕했다.
이때 선생의 인솔하에 수암면 사무소로 모였다. 수암면 19개 리 전역에서 모인 주민은 2천여명을 넘었다.
선생은 독립선언서를 고성으로 낭독한 후 읍내에 있는 안산국민학교를 거쳐 안산주재소 공자묘 앞을 군중과 행진하면서 만세를 주도했다.
선생은 일경에 체포되어 서대문 감옥에 송치되어 8개월을 징역을 받았으나 부친의 주선으로 태형 90대에 처하여 졌고 이후 물산장려운동을 폈다.
1968년 수암면 산현리 279번지 자택에서 77세를 일기로 타계하였으며, 1996년 8월 15일 숭고한 애국정신으로 조국의 자주독립과 국가발전에 이바지한 공을 인정받아 대통령 표창을 수상하였다.
참석자들은 빗속에 우산을 들고 경건히 윤동욱 선생의 기념비 제막식 행사에 끝까지 함께했다.
제막식은 추진위원장 정상종 시흥문화원장의 인사말로 시작했다.
곧이어 시흥문화원장, 시의회의장, 가족, 주민들의 참여 속에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줄이 당겨졌다. 그러자 시민들의 성금으로 세워진 윤동욱 선생의 기념비가 모습을 드러냈다.
태극기로 둘러 쌓인 윤동욱 선생의 기념비 앞에서 참여한 인사들과 주민들이 잔을 올리고 인사를 드렸다.
2010년 3월 1일 산현동 항일애국지사 학은 윤동욱 선생 묘 앞에서는 만세 삼창이 불려졌다. 1919년 수암리 비석거리에서 불렸던 만세 삼창이 해방된 지 65년이 지난 뒤에 윤동욱 선생 묘 앞에서 다시 불린 것이다.
윤동욱 선생의 후손들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소감을 물었다. 선생의 맏사위 오정환(80)은 “영광스럽다.”고 했다.
손녀딸 윤묘준(60)은 “잊지 않고 기억해줘서 감사하다.”고 했다. 윤묘준의 남편은 아내가 할아버님을 닮아서 “강직하고 대가 곧다.”고 했다.
윤동욱 선생의 장남 윤성준(70)은 “감사하다. 3.1운동 후 91년 만에 기념비가 세워져 감개무량하다. 숨겨지고 잊혀진 시흥의 더 많은 인물들을 발굴해서 후손들이 길이 기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정상종 시흥문화원장은 "매년 시흥의 인물 선양 사업으로 잊혀지고 알려지지 않은 시흥의 인물들을 발굴하겠다고 했다."
시흥 지역에서 존경할 수 있는 인물들을 발굴하는 일은 중요한 일이다.
그분들의 일관된 삶을 보면서 후대의 사람들이 그 분들의 삶을 현대에 맞게 조명하고 발자취를 따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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