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4.19 마르지 않는 어머니의 눈물

-최영숙의 발길 따라 가는 풍경-

최영숙 | 기사입력 2011/04/21 [16:16]

아, 4.19 마르지 않는 어머니의 눈물

-최영숙의 발길 따라 가는 풍경-

최영숙 | 입력 : 2011/04/21 [16:16]
▲ 사월학생혁명기념탑     ©최영숙

제51주년 4.19혁명 기념식이 2011년 4월 19일 10시 서울 수유동 국립 4.19민주 묘지에서 열렸다.
  

▲ 독재자 유가족 성역 출입 반대 1인 시위     © 최영숙

  4.19국립묘지 앞에서는 '독재자 유가족 성역 출입 반대'라는 글을 들고 1인 시위를 하는 분을 만났다. 이날 이승만 대통령 아들 이인수씨는 사과성명을 발표하려다 유가족들의 제지로 돌아갔다. 
 

▲ 51주년 4.19혁명 기념식을 하다     ©최영숙


  김황식 국무총리는 기념사를 낭독했다.

  "오늘날 세계가 평가하는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4.19에서 발아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 이라며 "4.19혁명의 위대한 정신과 희생은 이후 우리의 민주주의가 고비를 맞을 때마다 되살아나 민주화의 대장정을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했다.
  

▲ 4.19기념식에 참석한 사람들     ©최영숙

  우리나라 헌정사상 최초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불의의 독재 권력에 항거한 4.19의거가 4.19혁명으로 정당한 역사를 평가 받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다. 

  공식적인 기록은 4.19, 4.19의거였다. 1993년에 비로소 4.19혁명으로 평가를 받았다. 그 결과 공원묘지로 서울시에서 관리해오던 4.19묘지도 성역화 사업을 거쳐 1995년 4월 19일 국립묘지로 승격되었다.
  

▲ 분향을 하다     ©최영숙

  기념식이 끝나고 분향을 했다.
 

▲ 아들의 묘를 찾는 연로하신  어머니     © 최영숙
 
 4.19 묘역으로 올라갔다.
 
 할머니 한 분이 아들의 묘를 찾고 계셨다.
 
▲ 아들 윤광현의 묘를 쓰다듬는 89세 민기애 할머님     © 최영숙
 민기애(89)할머님이 아들 윤광헌의 묘비를 쓰다듬으며 우셨다.
 
 윤광현의 묘비명에는 "1941년 12월 26일 전남 해남 출생(남)  배문고교 3년 재학, 1960년 4월 19일 이기붕 집 앞 시위 중 총상 사망, 부 윤재학 모 민기애"라고 적혀 있었다.  현재 생존했다면 70세였다. 19살에 숨진 아들을 51년간 가슴에 묻고 사셨던  어머니 민기애(89)할머니는 자식의 이름을 부르시며 하염없이 우셨다.
 
▲ 아들 이기태 묘에서 하염없이 우시는 김정연(95) 할머니     © 최영숙

  4.19묘역에는 어머니들의 눈물이 넘쳐흘렀다.
 
  아들 이기태의 묘 앞에서  김정연(95) 할머님을 뵈었다.

  "내가 죄가 많아서 얼릉 가지도 못혀. 졸업하면 에미 호강 시킨다더니 지가 먼저 가면 어째. 에미 가슴이 숯덩이가 된다" 며 가슴을 치셨다.
 
  아들이 떠난 지 51년이 되었지만 어머님의 슬픔은 자식은 잃은 51년 전 4월 19일 그날 그 시간에 정지되어 있었다.
 
  곁에 계시던 조카분이 말씀 하셨다.
 
  "고모님이 남편 사별 후 포목장사를 해서 외아들을 키웠는데 경희대 졸업을 1년 앞두고 24살 시위 중에 돌아가셨다. 그 뒤 혼자서 그 긴 세월을 살고 계시다. 고모님이 아들 졸업하면 장가보낸다고, 며느리가 혼수로 해올 텐데도 숟가락, 젓가락까지도 모두 사놓았었다. 돌아가신 아드님이 4.19혁명이 나기 1주일 전에 고향에 내려와 집안 산소들을 다 찾아 인사하고 집안 어른들도 모두 찾아 뵙고 서울로 올라간 1주일 뒤 4월 19일에  돌아가셨다. 마치 당신이 돌아가실 것을 안 것처럼 했다" 
  
  3.15 부정선거로 촉발된 마산 3.15의거에서 경찰사격으로 학생과 시민들이 다쳤다. 4월 11일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되었다. 그때 쯤 서울은 폭풍전야였을 것이다. 4월 12일 경에 고향으로 내려가 선산과 집안 어르신들에게 인사를 드리면서 결심을 한 것은 아닌가 싶었다.  
 
  포목점을 하면서 홀몸으로 자식을 번듯하게 키워주신 어머님께 졸업해서 호강시켜 드린다던 그  귀한 아들은 24살에 세상을 떠났다. 그 후 어머님의 한과 함께 이곳에 묻혔다. 44살에 자식을 잃은 어머니는 51년간 그 깊디 깊은 한을 안고 사셨다.
 
 가슴이 먹먹해졌다.
 
 할 수 있는 것은 할머님 손을 잡아드리는 것 뿐이었다.
 
 "고맙습니다." 할머님이 말씀하신다.
 
 순간 부끄러웠다. 내가 무엇을 했길래 이 어르신에게 "고맙습니다."는 말을 들을 수 있는가 싶었다.
 
  "내년에 올까 모르겠다."며 친척의 부축을 받으시며 내려가셨다. 
 
  부디 건강하시길 기원했다.
 

▲ 묘비를 쓰다듬다     © 최영숙

   학생모를 쓴 친구의 사진을 쓰다듬고 있는 노신사를 만났다.
 

▲ 최기태의 묘를 찾은 처남 조영건(72)와 민병록 묘를 찾은 가족이 술을 나누다     © 최영숙
 
  故 최기태는 수도전기공업고등학교를 다니던 18살 때 1960년 4월 19일 이기붕 집 앞 시위 중  폭력단에게 구타당해 사망했다. 폭력을 지휘했던 신정식은 나중에  처형당했다. 부모님은 외아들을 잃고 거의 미쳐서 사셨다고 했다. 
 
 매형인 조영건(72) 씨는 "4.19를 책임지는 주체가 없다. 이승만 대통령 아들 이인수씨가 사과하는 것은 좋은일이지, 그런데 조용히 와서 참회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 민병록의 묘     ©최영숙
   故 민병록의 형은 말했다.  "동생은  동북고교 3년 재학중 을지로 입구 독립 운동장에서 시작해서 차에 콩나물처럼 타고 가는데 선두에 가던 차가 펑크가 나서 동생 차가 앞장서게 되었다. 경찰의 사격으로 4.19일 사망했다. 동북고등학교에 동생 동상을 세워놨다." 고 했다.

 
▲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김주열 열사의 무덤     ©최영숙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된 김주열 열사의 무덤이 있었다.
 
  정치인의 꽃바구니가 앞에 놓여져 있었다.
 
  1960년 4월 11일 마산 중앙부두 앞 바다에서 1960년 3,15의거에 가담했던 김주열(1943~1960)열사가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인양되었다.
 
 부정축재와 독재, 3.15부정 선거로 인해 촉발된 국민들의 저항은 활활 타올랐다. 
 
▲ 김주열의 묘비     ©최영숙
  김주열 열사의 무덤은 3 개가 된다고 했다. 4.19 묘역과 마산, 그리고 고향 남원에 진짜 봉분이 있다 . 

▲ 4.19 묘역의 유일한 합장묘     © 최영숙
  4.19묘역에 합장묘가 있었다.

  4.19묘역 4.19희생자 중 故 김태년과 故 서현무는 영혼결혼식을 올렸다. 김태년은 1960년 4월 19일 세종로 치안국 무기고 앞에서 시위 상황을 녹음하다 소총직격탄을 맞고 서울대 병원으로 이송 후 사망하였다. 서현무는 내무부 앞에서 “의에 죽고 참에 살자”라는 현수막을 들고 선두에 서서 투쟁하다 부상을 당하고 연행된 후 같은 해 7월 2일 사망하였다. 1960년 11월 11일 양가 부모의 주선으로 두 분의 한을 풀고 영혼을 달래주는 영혼결혼식을 올리고, 1995년 11월 19일 부군의 묘역에 합장되었다.


영혼결혼식 -김혜순-


날아가 버린 연들이 모여 사는 나라가 있었나보다

그 나라에서 희디흰 실들이 쏟아져 내리는 저녁

비단 보다 차갑고 질긴 알몸이었나보다

희디흰 알몸을 풀어 한정없이 물레를 돌리는 저녁

하늘에서 내려온 먼 옛날의 레이스 문자들이 우리를 꽁꽁 마취해 버려

하는 수 없이 무거운 수화로 몸속의 축가를 꺼내보는 저녁

먼데를 바라보던 허전한 얼굴들 마주보는 나라가 있었나보다

두 얼굴 사이 어두운 허방에 작은 들꽃 같은 조심스런 웃음이 펄펄 내려앉더니

하객을 실은 버스 한 대가 눈길에 미끄러져 내동댕이 쳐지고

입으면 몸 지워지는 희디흰 면사포 여민 채 서로 멀어져버린 저녁

날아간 연들이 모여 사는 나라에서 보내온 희디흰 청첩장이 있었나보다

희디흰 종이에 쓴 검은 글씨들 지우려고,

검은 종이에서 희디흰 글씨들 내려오는 저녁



▲ 故 김태년과 故 서현무의 합장묘     ©최영숙

   21살 신랑 故 김태년과 20살의 신부 故 서현무는 영혼결혼식을 올리고 합장되었다.

 
▲ 조영건(72)씨의 4.19 증언과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의 기억 찾기     © 최영숙
 
  4.19혁명 당시 현장에 있었던 분들의 증언들이 쏟아져 나왔다.
 
  "4월 18일, 국회의사당 앞에서 구속된 동료 학우들의 석방과 학원 자유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인 후 귀가하던 고려대생들이 청계천 4가를 지날 때 경찰과 모의한 반공청년단이라는 정치깡패들이 무차별 테러를 가해 수십명의 학생이 부상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평화극장 쪽에서 양복기지원단장사를 하던  분은 쇠파이프를 들고 학생들을 때리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했다.
 
 조영건(72)씨는 당시 법과대 3학년이었다고 한다. "원래 서울 시내 전국 대학생들이 4월 19일날 전체적으로 데모를 하기로 약속되었다. 아이고, 고대 아이들 그때나 지금이나 튀어, 그런데  먼저 나섰던 것이다."고 증언했다.
 
  역사는 이 사건을 4.19의 기폭제로 기록했다. 역사는 많은 국민들이 원하는 지향점을 따라 어느 방향에서든 움직여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참배객     ©최영숙
  젊은이들이 참배를 하고 있었다.  

  기록을 하면서 아쉬웠던 것은 4.19혁명 51주년 이었는데도 참배객들이 별로 없었다.
잊혀져가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 세대는 거의 돌아가시고 형제, 친구들도 70대 노년에 접어들었다.
 이 분들을  직접적으로 기억하는 분들이 점점 줄어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유영봉안소     © 최영숙
 
  유영봉안소 에는 4.19혁명 과정에서 운명을 달리한 300분 열사들이 모셔져 있었다.
 
▲ 진달래 피어나다     ©최영숙
 가족들은 아직 무덤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4.19 국립 묘역에는 진달래가 만발했다.
 
  51년 전의  오늘도 이토록 찬란한 태양과 이 산 저 산 온갖 꽃들이 피어났을 것이다.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떨쳐 일어났던 젊은이들의 그 정의감은 4.19 묘역에 300기의 묘로 모셔져 있었다. 
 
▲ 아들 윤광현의 묘를 쓰다듬는 민기애(89)할머님     ©최영숙
 어머니는 51년이 지난 지금도  무덤을 떠날 줄을 몰랐다. 
 
 돌아가신 이분들의 희생 덕분에 현재의 자유를 누리고 있다는 것을 잊고 살았다.
 
▲ 4.19묘역     ©최영숙
 
 
  이 조용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무덤에는 온갖 사연과 아픔들이 있었다.
  
  4.19국립 묘역을 나오면서
 
  "고맙습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마음 속 깊은 인사를 드리고 나왔다.
 
 봄 햇살이 눈 속으로 파고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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