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베개’로 돌아간 장준하 선생

제37주기 추도식 및 장준하공원 개원식에 가다

최영숙 | 기사입력 2012/08/23 [07:07]

‘돌베개’로 돌아간 장준하 선생

제37주기 추도식 및 장준하공원 개원식에 가다

최영숙 | 입력 : 2012/08/23 [07:07]
▲ 장준하선생 부조 제막식을 하다     © 최영숙


지난 8월 17일 오전 10시 40분 경기 파주시 탄현면 성동리 장준하 공원에서 고 장준하선생 37주기 추모식과 더불어 장준하공원 개원식이 열렸다.

장준하(張俊河, 1918년 8월 27일~1975년 8월 17일, 평안북도 의주)는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로, 해방 뒤엔 민주화운동에 앞장 선 정치인으로,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한 언론인으로 정치 격변기의 정점에서 어느날 의문사했다.

▲ 독립군 시절 사진 왼쪽부터 노능서, 김준엽, 장준하     © 최영숙


장준하 선생은 1918년 8월27일 평북 의주(義州)에서 장석인과 김경문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1920년 장석인의 독립운동으로 일본 경찰에 쫓겨 가족이 삭주(朔州)로 이사했다. 1944년 일본군 학도병으로 징집되었다. 그해 7월7일 윤경빈외 2명과 함께 부대를 탈출했다. 그후 중국 유격대에서 김준엽과 만나 동행했다. 8월에 한국광복군 훈련반에 입소해 김준엽, 윤재현과 함께「등불」1·2호를 발간했다, 
 
1945년 1월31일 중경(重慶)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도착했다. 서안(西安)에서 광복군 제2지대에 배속, OSS(미국전략 제1기 훈련반에 편입 광복군 중위로 진급했다. 해방 후 임정 요인과 함께 귀국해 김구 선생의 비서, 비상국민회의 서기 등을 역임했다. 1953년 부산에서 월간지 「思想」을 발간했다가 폐간 이후 다시『思想界』로 창간했다. 1962년 막사이사이상(賞)수상, 1964년 한·일 굴욕외교 반대투쟁위원회의 초청연사로 전국을 순회하며 70여회의 연설을 통해 박정희 정권을 비판했다. 1967년 제7대 총선에 신민당 후보로 서울 동대문(을)구에서 출마하여 압도적인 지지로 옥중 당선, 1971년 자서전 「돌베개」를 출간했다. 1974년 대통령 긴급조치1호 위반혐의 제1호로 구속되었고 이듬해인 1975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약사봉에서 등산 중 의문사 했다. 경기도 파주군 광탄면 천주교묘지에 묻혔었다.

▲ 추도식에 참석한 여,야 정치인들     © 최영숙


장준하 선생을 기리는 ‘장준하 공원’은 37주기인 지난 8월 17일 파주 통일동산에 문을 열었다. 장준하 공원은 3967㎡ 넓이의 공원 안에는 추모 벽과 고인의 부조, 장준하 선생의 돌베개를 놓았다. 공원 위쪽에는 임진강과 통일전망대가 보이는 곳에 지난 1일 나사렛 천주교 공동묘지에서 옮겨온 장준하 선생의 유해가 돌베개 모양의 묘에 안장되었다.

▲ 37주기 추도식 을 하다    © 최영숙

 
37주기 추도식을 겸한 공원 개원식에는 8월 1일 이장 과정에서 장준하 선생 타살 의혹이 증폭되며 쏠린 관심을 반영하듯, 부인 김희숙(88) 여사와 장남 장호권(63) 씨 등 유족과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한승헌 변호사, 이해찬 민주통합당 대표, 정세균 민주당 경선후보, 정운찬 전 총리, 이인재 파주시장 등 500여명이 참석했다.

추도식은 파주시립합창단이 부르는 뮤지컬 <청년 장준하>의 삽입곡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해’가 울려 퍼지면서 시작됐다. 

 이해찬 민주통합당대표는 추도사에서 “고 장준하 선생 제막식에 오니 가슴이 뭉클합니다. 1975년 민청련사건으로 감금되어 있을 때 안양교도소에서 백기완 선생님과 장준하 선생님을 처음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돌베개를 읽고 민족의식을 갖게 되었고 제가 만든 출판사 이름도 ‘돌베개’로 짓게 되었습니다. 독립운동을 한 선현들의 삶의 자취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1975년 실족사 하셨다는 말씀을 듣고 도저히 믿지 못했지만 당시는 박정희 정권이 극악을 더해 후배들이 제대로 모시지 못했습니다. 진실을 밝히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민주화와 민족통일을 위해서 당신을 다 바치셨습니다. 저희가 이제 남북관계를 재설정해서 한반도에 평화가 오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라고 했다. 

 이인재 파주시장은 제막식 추모사에서 “선생님 이제 조금 편안하십니까? 선생님을 흠모하는 이들이 여기에 모였습니다. 오직 나라를 구하고 민족을 일으키고자 애쓰셨던 선생님의 일생이 다시금 살아납니다” 라며 “광탄면 나사렛공원묘지에 묻혀 계신 선생님을 뵈러 가 수해로 무너져 내린 무덤 주변을 보면서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어 이곳으로 모시게 됐습니다”고 밝혔다.

 유족 대표인 큰아들 장호권(63)씨가 유족대표로 인사말을 했다. “이장하면서 37년 만에 백골의 아버님을 만나 뵙게 되었습니다. 머리에 참혹한 상흔을 보면서 그동안 참았던 한과 분노가 뼛속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치솟아 올랐습니다. 그러나 곧 삭였습니다. 내가 37년 만에 너희 앞에 나타난 것은 아직도 못다 한 과제가 있으니 그것을 해결하라는 아버지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 장준하공원에 있는 선생의 '돌베개'     © 최영숙


장준하공원에는 선생을 상징하는 돌베개를 놓았다.  추모 벽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었다.

 “파주는 항전의 땅입니다. 삼국시대부터 삶의 터전을 지켜내려는 사투가 있었고, 근래 6.25전쟁에서도 자유를 수호한 도시입니다. 분단의 역사 접경도시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지만 매우 역동적인 모습으로 평화로운 미래를 열어갑니다. 장준하 선생은 항일독립운동에 투신했으며 사상계를 발간해 지식인의 등대 역할을 했습니다.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바로 세우고자 온몸을 불살랐으며, 분단된 조국의 평화통일에 헌신했습니다. 일본에 빼긴 나라를 되찾고자 구국 장정의 길에 올랐던 장준하 선생의 굳은 의지를 파주에 다시금 살립니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자유가 결코 거저 얻어지지 않았음을 파주에서 가르치고 일깨워 나가겠습니다. 연고도 없이 묻혀 계셨던 파주 광탄 나사렛공원묘지에서 이곳 통일동산으로 오신 이유는 수많은 호국영령이 선생의 안타까운 영혼을 부른 때문입니다. 죽어서도 살아있는 장준하 선생의 애국애족 정신, 의로운 기상은 우리 파주와 영원히 함께할 것입니다.”


▲ 부인 김희숙(88)여사 분향하다     © 최영숙

 
 장준하 선생의 부조 제막식에 이어 헌화와 분향이 이어졌다.

▲ 청년등불 회원들 장준하 선생 묘에서 인사를 드리다     © 최영숙

 
공원 위쪽에 있는 장준하 선생의 묘로 왔다. 묘는 너럭바위의 모습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인사를 드렸다. 노적봉이 보이고 임진강과 통일전망대를 보이는 묘소는 눈길이 시원했다. 

 청년등불 회원들과 시민들을 만났다.  청년등불 회원인 송대현(28) 씨는 “청년등불은 장준하기념사업회가 매년 2회 주최하는 ‘아! 장준하 구국장정 6천리’에 참가한 사람들을 일컫는 말로 장준하 선생님의 '청년정신'과 '등불정신'을 이어받아 이 시대의 유일한 희망인 '실천적 지식인의 삶'을 살고자 하는 청년모임”이라고 했다.

그는 “23살 때 장준하 선생의 탈출로를 중국에서부터 따라 갔던 것이 새롭다. 나사렛 묘지에 있을 때 처음 뵈었다. 선생님의 생애에 비해 무덤이 작고 초라했다. 37주기를 맞아 많은 분들이 오셔서 좋다. 늦었지만 이제야 제대로 대접해드리는 느낌이다, 이제 첫 삽을 뜬것이다. 더 지켜봐야 한다”고 했다.

 양권모(25) 씨는 “규모가 커졌지만 일회성 관심으로 끝나지 않고 지속적인 관심을 주셨으면 한다. 장준하 선생님의 삶의 크기에 비해 대접이 소홀했다. 사람들이 장준하 하면 먼저 연예인을 떠올린다. 이곳 장준하 동산으로 옮기면서 이분의 삶이 어떠했는지 배웠으면 한다”고 관심을 촉구했다.

 장준하 선생이 주례를 섰다는 이완호(74) 씨는 “올바르게 살아라. 나라를 위해서 살아라.”고 말씀하셨던 게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회고했다.

▲ 부인 김희숙 여사 가족의 부축을 받고 산에서 내려오다     ©최영숙


부인 김희숙 여사가 가족들의 부축을 받으며 산에서 내려왔다.

▲ 김희숙 여사 당시를 말씀하시다     © 최영숙


장준하 선생의 부인 김희숙 여사에게 당시 상황을 여쭤보았다.
 “돌아가시던 날 등산 가신다니까 그동안 방에서 책만 보시니까 가시나보다 했지. 샌드위치 한 쪽하고 물을 가지고 가셨지. 돌아가시고 8년 동안 밖에 못 나왔어. 창살 없는 감옥에서 살았지. 24시간 감시하니까. 나는 여자고 엄마야. 애들이 배고프다고 할 때 엄마의 마음이 어떠했겠어. 그 정도로 살았어. 1년에 3번 이사했으니까”라면서 “나는 성당을 다녀서 영령회에 들어서 누가 돌아가셨다면 신나, 미안하지 않고. 밖으로 나갈 수 있으니까 일주일간 일을 하고 입관 장례를 도와주고 산에 가면 우리 사람들이 문상객으로 와서 연락하고 돈도 주고가고. 요즘 애들이 말하는 공동체 생활 이었어 이제 바람이 있다면 ‘지금부터 시작이고 싸움이야! 나같이 당한 사람이 얼마나 많겠어 나라의 주인이 돼야지, 열심히 싸워야 해요! 젊은 사람들 다 여러분 책임이야”라고 말했다.  

▲ 장남 장호권(63)     © 최영숙

 
장남 장호권 씨는 “아버님의 죽음은 타살이다. 법의학자는 공식적인 입장이 있다. 6개월 이내에 공식 요청을 해야 한다. 개묘하면 시신이 빠르게 부패한다. 왜 지금 하냐고 묻는다. 그 당시에는 유신이 극악을 달릴 때라서 고문을 당했거나 죽었을 때 시신을 탈취해서 화장을 하기 때문에 시신을 어떻게 처리할지 그것이 무서웠다. 처음에는 어디다 매장했는지도 몰랐다. 지금은 길이 좋아서 그렇지 예전에는 나사렛무덤이 멀었다. 사람들이 모여서 반독재 시위를 할까봐 산골짜기에 묻었다. 자식으로서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 8월 1일 개장하면서 알았다. 기념사업회에서 어떤 형식으로든 국가에 요청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 장준하 선생이 처음 묻혀있었던 나사렛 묘소     © 최영숙


탄현면 성동리에서 장준하공원 제막식과 37주기 추도식을 마치고 예전에 있었던 나사렛묘소로 갔다.

▲ 옛 장준하 선생 묘소 앞     ©최영숙


장준하 선생의 파묘해간 자리는 메워져 있었다. 입구에 장준하 선생 묘라는 묘비석만이 이곳이 장준하 선생의 묘였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 예를 표하는 사람들     ©최영숙


“그의 죽음은 별이 떨어진 것이 아니라 보다 새로운 빛이 되어 우리의 앞길을 밝혀주기 위해 잠시 숨은 것일 뿐입니다.” 김수환 추기경이 장준하 영결 미사에서 했던 추모사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37년 만에 재점화 되는 장준하 선생의 타살의혹이 이번에는 명확히 밝혀지기를 바랐다. 

▲ '청년등불'들과 단체 사진을 담다     ©최영숙


장준하 선생은 저서 『돌베개』에서 이렇게 말했다.
 "조국애를 몰라서 조국을 귀하게 여기지 못했고, 조국을 귀중하게 여기지 못하여 우리의 선조들은 조국을 팔았던가. 우리는 또 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않으련다. 나는 또 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이 가슴의 피눈물을 삼키며 투쟁하련다. 이 길을 위해 나는 가련다. 나의 인생의 과정은 <또 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라는 이정표의 푯말을 꽂고 이제부터 나를 안내할 것이다.… 나에게는 지금 젊음이라는 가장 큰 무기가 있다. 아니 내가 가진 것은 이것뿐이다. 이 무기는 곧 나의 생명이다. 그러나 이 무기도 언젠가는 녹이 슬 것이다.… 단조롭고 무의미한 생활이 가장 우리를 괴롭힐 수 있는, 우리는 청년기의 한창 나이였다.… 신념이란 우리 인간이 가질 수 있고 구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생명력이라는 것을, 나는 체험을 통해 확신했다."

 장준하 선생은 ‘또 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온몸을 세상에 던지고 살았다. 과연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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