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렇게 들었다”... 온몸으로 살아낸 분들이 전하는 제주 4·3"오늘이 어떤고 죽어질건가! 이 밤이 어두워지면 이 날이 죽어 질 날인가! 그러고 살았어.“
처음 간 곳은 4·3사건의 도화선이 된 관덕정이었다.
“1947년 관덕정에서 행한 3·1절 기념식에서 기마경관의 말발굽에 어린아이가 치이는 일이 벌어졌고, 이를 본 시위 군중들은 기마경관에게 돌을 던지고 야유를 보내며 경찰서까지 쫓아갔다. 그런데 경찰이 이를 경찰서 습격으로 오인하여 시위대에게 발포해 6명이 사망하고 6명이 중상을 입었다.
제주 4·3 사건의 발단은 8·15 광복 이후 남한에서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5·10 총선에 반대하기 위해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남로당 제주도당 골수당원 김달삼 등 350여 명이 무장을 하고 제주도 내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를 일제히 급습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경찰과 서북청년단, 민족청년단, 독립촉성중앙회 등 우익단체 회원들이 희생되었고, 이에 분노한 우익 세력은 우익 세력대로 살상을 자행했다. 여기에 우익단체의 처결에 대한 제주도민들의 유언비어와 반감, 공포가 합해져 유혈사태는 급속도로 제주도 전역으로 번져나갔다. 이로 말미암아 제주 전역에 행정기능이 마비되는 등 심각한 치안 불안 상태가 지속되었다.
이 제주 4·3사건은 한국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으며, 인적 피해를 보면 <제주4·3특별법>에 의한 조사 결과 사망자만 1만 4,032명(진압군에 의한 희생자 1만 955명, 무장대에 의한 희생자 1,764명 외)에 달한다. 사건을 일으킨 주역 중 이덕구는 6월에 경찰관 발포로 사살되고, 김달삼은 그해 6월 말 9월의 ‘해주 전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에 참석차 제주도를 빠져나가지만 학살은 1953년 한국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2014년부터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어 정부 주관 행사로 치러진다. 기념일의 명칭은 '4·3희생자 추념일'이다.” -위키백과-
토벌대에 의해 가장 큰 피해를 본 북촌마을로 갔다. 북촌마을 뒤쪽 언덕에는 유채꽃이 만발했다.
그곳에서 마늘밭을 매고 있던 박필성(77) 씨는 말했다. “11살 때 일어났다. 1949년 1월 16일 북촌 초등학교 앞 도로에서 무장대들이 삼양 쪽에 숨어 있다가 군인 2명을 죽였다. 다음 날 군인들이 북촌마을에 불을 질렀다. 옷장 속에 숨어 있던 사람은 불이 나서 집 밖으로 뛰어나오자 총으로 쏴 죽였다. 마을 사람들을 북촌국민학교에 모아놓고 50명씩 잘라서 밭에 가서 죽였다. 그날 죽은 사람만 300여 명이 넘었다. 큰 동네 사람들은 3분의 2가 죽었다. 아버지(박치숙·당시 44세)는 마을 앞길에서 마을을 지키고 있었는데 군인들이 지나가면서 총살시켰다. 기준이 없었다. 아침부터 시작해서 오후 4시까지 죽였다.
대대장이 남은 북촌 사람들에게 내일 함덕으로 모이라고 했다. 어떤 사람은 '오늘 이렇게 죽였는데 내일도 죽일 것'이라며 산으로 도망간 사람도 있고, 살려준다고 했으니 믿고 함덕으로 간 사람도 있다. 함덕으로 갔던 사람 중에 100여 명은 토벌대에 의해 또 죽었다. 산으로 도망간 사람들은 살았다. 여자처럼 옷을 입고 머리 수건을 맨 사람도 몇 명 살았다. 그때 북촌에서 죽은 사람들이 460명이 넘는다.
매년 음력 12월 19일이면 마을 회의를 하고 같이 제사를 지낸다. 가족이 전멸해 멸족된 사람은 제사가 아니고 명절에 기린다. 당시 먹을 게 없어서 불에 탄 돼지를 잡아먹고, 오줌 싼 것도 먹었다. 어머니와 형이 있었는데 나는 고아원에 보내졌다. 고아원에 가면 밥도 주고 공부도 시켜줬기 때문이다. 우리 연령대에 죽은 사람이 많다. 그래서 동창도 얼마 없다. 군인이나 경찰은 보상받았다. 우리는 4·3 카드 하나 줘서 병원 가면 할인 받는다. 그때 생각하면 진저리가 난다.”고 했다.
박필성(77) 씨의 아내 구숭열(77) 씨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구 씨는 “4·3 때 우리 집은 삼양인데 산 폭도가 내려와서 마을에 불 지르고 어머니, 아버지, 오빠 둘을 다 죽였어. 나 혼자만 살았어. 공부도 못하고 책도 다 불붙어 버리고 곡식이고 뭐고 다 가져갔어. 언제 돌아가셨는지도 몰라. 무덤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어. 중매로 시집와 보니까 북촌이야. 피해자 신청은 아들만 되고 딸은 안 된대. 그래서 안 했어. 외할머니가 시내에 살아서 같이 살았어. 그때 시내들은 경찰도 있고 해서 괜찮았지. 촌사람들만 다 귀신 맞은 사람들인가, 촌것들은 다 죽였어. 사람 많은 데 가기 싫어.”라고 했다.
시아버지는 토벌대에 희생당하고, 친정부모와 오빠는 무장대에게 희생당한 두 사람이 부부를 이루고 살고 있었다.
북촌마을에서 토벌대에 의해 300여 명이 하루 만에 학살당한 옹팡밭으로 왔다. 안내문이 있었다.
옹팡밭’은 ‘오목하게 쏙 들어가 있는 밭’이라는 뜻이다. 4·3사건 당시 최대의 인명피해로 기록되고 있는 1949년 1월 17일 북촌대학살 현장의 한 곳이다. 당시 이 일대에는 ‘마치 무를 뽑아 널어놓은 것 같이’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고 한다. 이 밭의 가운데 있는 작은 봉분도 당시 희생된 어린아이의 무덤이다.
북촌리의 봄
한 여인의 젖을 아이가 빨고 있었다.
말 못하는 어린 것의 울음이 서모*에서 부는 바람 소리 같았다. 핏덩이를 등에 업은 어미의 자장가가 들리는 듯한데, 젖 몸살을 앓던 아침, 붉은 비린내가 퉁퉁 불어 마을을 떠돌아다녔다. 새들이 총소리를 물고 둥지로 날아갔다. 소란스런 포란의 방향, 꽃을 내준 가지가 동쪽으로 기울었다.
그것은 서쪽에서 해가 뜰 일. 서모에서 부는 바람 소리가 말 못하는 어린 것의 울음 같았다.
뚝뚝, 지는 목숨들 사이 아이는 나오지 않는 젖을 한사코 빨아대고 있었다. 어미를 살려내려는 필사적인 몸부림, 그 힘으로 동백꽃이 피고 젖 먹던 힘을 다해 봄이 오고 있었다.
*서모 : 서우봉
추념식이 시작되기 전, 3,692명의 행방불명 희생자 묘역에서 유가족들을 만났다.
가시리 농협 옆에 사는 유가족 안옥생(81·여) 씨는 “아버지(안태아·당시 42세)와 오빠(안오봉·당시 21세)야. 대전형무소에서 7년 형을 받아 함께 수감됐는데 전쟁이 나니 고령골에서 다 죽여 버렸어. 시체도 못 찾고 매년 6월 28일이나 7월 1일경에 가서 제사를 지내. 4·3사건은 14살에 겪었어. 그 당시는 군인들이 와서 보이는 사람은 다 죽였어. 집이 하나도 없었어, 다 불 질러서. 나는 오빠랑 엄마랑 살고 아버지는 다른 엄마와 살다 뿔뿔이 흩어졌는데, 엄마는 봄에 찾고 나는 숨어서 살았어. 대통령이 추념일로 지정돼서 이번에 온다고 해 기대했는데, 상황이 그렇다고 안 온다니 서운했다.”고 했다.
고영규(87·여) 씨는 “이 빈 무덤은 오빠(고영준·당시 18세)야. 고향은 서귀포 호근동이야. 그 당시 우리 오빠는 서귀포중학교에 다닐 때인데 잡혀가지 않았어. 그때 우리 동네 사람들이 경찰서에 갔다가 우리 오빠 이름이 장부에 있는 걸 보고 전해줬어. 아버지(고송백)가 부락 이장이었어. 아버지가 그때 오빠를 패랭이 옷 입히고 꼭 같이 데리고 다녔어. 경찰서에 오빠 이름이 올라갔다고 하니까, 아버지가 별일 없을 거라고 자수하라고 오빠를 경찰에 데리고 갔어. 가니까 경찰이 '내일 돌려보내겠수다' 그랬어. 그러고는 다음 날 오빠를 인천형무소로 실어 보냈던 거야.
인천형무소에서 편지도 오고, 학생이니까 책도 보내주고 옷도 보내주고 그랬는데, 그러다가 전쟁이 나니까 이쪽에서 다 죽인 거야. 그렇게 해서 오빠가 행방불명이 되었어. 큰아들이었어. 그 뒤로 아버지는 아들에 대해서 아무 말도 없이 그냥 '후-' 하고 한숨만 쉬었어. 당신이 큰아들을 잡아다 형무소에 넣었으니까. 아버지는 73세에 돌아가셨어. 밑에 동생이 아들이 셋이라 큰아들을 양자로 들였어. 우리 어머니는 더 한이 맺혀서 평생을 살았어.
우리는 시내에 있어서 다른 피해 같은 것은 없었는데, 큰오빠도 그 당시에 아버지가 데려가지 않았으면 어떻게 됐을지 몰랐어. 학생이고 똑똑하고 그랬는데 오빠 친구들은 군대에 많이 갔어."라며 가족들의 한 맺힌 삶을 이야기했다. 말하는 중간에도 가슴이 막혀 한숨을 푹푹 몰아쉬었다.
또 강경옥(88·여) 씨는 "용두암에서 왔어요. 오빠가 목포까지 끌려갔는데 아무 죄도 없이 그냥 잡아갔어요. 어디에서 죽었는지도 몰라요."라고 했다.
제주 4·3평화공원 방명록에는 사람들이 적은 글들이 남아 있었다.
“비록 반세기 전에 일어난 끔찍한 사건이지만 아직 이 땅에는 그 사건에 대한 유가족이 있습니다. 그분들과 또 돌아가신 분들을 생각해서라도 우리는 이 사건에 대해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 사건은 우리 모두의, 아니 대한민국의 업보입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2014. 2. 23 성치일
“어떠한 이유에서도 국민을 지켜야 하는 공권력이 국민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어서는 안 된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또 앞으로도...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2014. 3. 9
“고통! 제주의 고통과 한을 듣고 느낀다. 따뜻하고 아름다운 이면에 있는 제주도민의 울부짖음에 눈시울이 붉어진다. 부디 다시는 이러한 일들이 발생하지 않기를...”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위로도, 눈물도 부족합니다. 죄송합니다.”
“어떤 이는 항쟁으로, 어떤 이는 민란으로 제주 4·3사건을 기억하나,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아스라이 스러져간 무고히 희생당한 수많은 영혼들이다.” - 14. 2. 26 구승완
동광리 90번지, 큰넓궤의 주소였다. 영화 <지슬>의 촬영 장소였다. 그러나 찾을 수가 없었다. 길을 따라 마을로 들어갔다. 할머니 한 분을 만났다. “여기는 동광 양잠단지라고 불러. 우리는 대천 고령에 살다가 대정골에서 왔다네. 한 40년 됐어. 다 끝나고 왔지. 난리통이 하도 오래돼서 몰라. 친정아방(아버지), 친정어멍(어머니) 아주 어릴 때 난리통에 돌아가셨어. 아이고, 허무하게 가버렸다. 누구한테 죽었는지도 몰라. 두건으로 귀 막고 살았어. 총소리 듣지 말자고 그때 그러고 살았지. 나이 든 사람들은 아무도 없어, 사람이 없어. 마을 인심도 없지. 오름에서 데려온 조그만 동백꽃이 이렇게 컸어. 예쁘기도 하네.”하고 말했다. 당신 이름과 나이는 모른다고 했다.
같은 마을의 양순선(76) 할머니는 당시 친정이 애월면인데 그곳은 괜찮았다고 했다. 시아버지는 돌아가셨다고 남편이 말해줬다고 한다. 안덕에서 살았는데 아버지를 안덕지소에서 오라고 해서 갔는데 돌아오지 않았다. 어디서 돌아가셨는지도 모른다고 했다.
가시리에서 노인회관을 찾았다. 그곳에서 만난 김광은(82) 씨는 말했다. "당시 16살이었다. 아버지(김우경·당시 44세)가 돌아가셨다. 무작정 잡아다 죽여버려서 아버지 시체도 못 찾았어. 어디서 죽였는지도 몰라. 잡아가기만 하면 없어졌어. 표선초등학교를 수용소로 삼고 사람들을 수용했단 말이야. 음력 11월 22일 오후 4시경 집합하라고 해서 이쪽은 죽을 사람, 저쪽은 살 사람으로 나눠서 죽였다.
가시리 출신 순경이 있었거든. 자기가 원수 같은 사람들은 지정해서 데려갔다. 사적 감정, 공적 감정 다 끌어들여 죽였어. 하루에 한 장소에서 72명을 죽였다. 그 순경은 나중에 다른 곳으로 전근 갔어. 여기서 살 수 있나. 6·25 때는 여기는 괜찮았다. 나이가 어리니까 군대는 못 나갔다. 그놈의 왜정 시대 2차 대전 때 그놈의 굴 파면 앞바다로 미국 비행기들이 선박들을 막 폭격하고 그랬다.
여기는 경찰에 의해 많이 피해를 보았다. 산사람(무장대)에게도 피해 본 사람이 있다. 5·10 선거 때 산에서 내려와 이장과 교장을 죽였다. 뉴스가 없어서 암흑천지야. 신문도 없고 방송도 없었어. 밖에 나갔다 들어온 사람이 '거기가 이렇다' 그러면 그게 전부였다. 신분증이 하나도 없어. 엄청 많이 죽었다. 숫자 파악을 못 해 전멸된 집도 많아.
'감은영이 각시'를 옷을 홀딱 벗겨놓고 검불단으로 옷을 만들어 입히고는 '저기 갔다 오면 살려준다'고 했어. 그러고는 불을 붙여놓고 뛰는 걸 보고 웃어. 세상에 거기다 불을 질러보쇼. 그게 사람이 할 짓인가. 죽여도 총으로 죽이면 고마운 거야. 감은영 각시는 서방이 일본 오사카에 살고 있었어. 시부모가 있으니까 혼자 인사 왔다가 시절을 잘못 만나 그렇게 죽었지.
산사람도 산사람이 아니고 죽은 사람도 사람이 아니야. 사람으로 취급을 안 했어. 총 가진 놈이 죽일 때는 짐승으로 생각했지 사람으로 생각 안 했어. 여기는 죄 있는 사람이 없어. 재판이 없어, 계엄령이니까 그냥 죽이면 그만이야. 그때는 경찰관이면 대통령보다 더했어. 경찰관이면 무법천지고 뭐든지 했다. 표선초등학교 강당에 다 집어넣고 있을 때 경찰관이 와요. 막 죽이는 놈이 오면 '와, 이번에는 무슨 봉변을 당하나' 하고 발발 떨거든. 하도 잡아서 죽이고 괴롭히니까.
하루는 가만히 있으니까 경찰이 와서 다 돌아서서 앉으라고 해. 그 경찰이 자기가 보기에 예쁘다는 처녀 몇 명 나오라고 해서 옷을 벗으라고 그래. 그러더니 총대로 거기를 찌르고 그런 짓거리를 많이 했어. 그 처녀들 시집이 뭐야. 그렇게 당한 사람들 후유증으로 죽었어. 그 가시리 출신 순경만 오면 무슨 해코지를 할까 봐 사람들이 벌벌 떨었어. 가시리 출신 경찰이 어떻게 마을에 살아? 그놈은 마을 떠나고 몇 해 전에 병으로 죽었어.
그래도 그 시절에 인간 노릇을 하는 사람도 있었어. 그 사람은 제주도 출신 강계봉 순경인데, 죄가 없다고 해서 여러 사람 살렸어. 수용소에 그 순경이 오면 주민들을 위로해 주고 어떻게 말하라고 가르쳐주고 그랬지. 수용소에 강계봉 순경이 오면 숨을 움츠렸다가도 숨을 쉬고 가슴이 편하고 그랬어. 그런 사람은 순경을 그만둬도 존대를 받고, 쥐새끼 죽이듯 죽인 놈들은 인간으로 안 봤어. 모가지가 질겨서 살았지, 경찰관이 별짓을 해도 누가 그걸 말려줄 사람이 없었어.
군인들이 왔을 때는 어땠는지 물었다. 군인이 와서는 피해가 없었고 인근 동네에 부대가 주둔했는데 섣달그믐날 몰아가 죽이려고 하는 것을 막아줬어. 가시리 사람만큼은 가시리 출신 경찰관 하나가 거의 다 죽인 거야. 같은 동네니까 같이 놀던 친구나 이웃들이 이 사람이 어떻게 사는지, 친족까지 다 알잖아. 72명 죽일 때도 오로지 그 사람이 '너 나와' 하면서 다 죽인 거야. 그러지 않으면 일개 군인들이 알 수 없거든. 가족이 다섯 명 살고 있다가 아들이나 딸이 같이 안 보이면 '산에 갔다'고 해서 남은 세 사람을 다 죽이고, 그런 식으로 사람을 72명을 한 시간에 다 죽였어.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야. 가시리 사람들이 해변가로 몰리다 보니 표선창고가 있었어. 갈 곳 없으니까 창고로 갔는데 거기서도 '너 나와' 해서 다 죽였다. 당시 마을 분들이 많았어. 오히려 지금보다 그 당시가 인구가 더 많았다."고 했다.
오사카에서 시부모를 뵈러 왔던 새댁은 온몸이 제주도의 바람과 함께 불꽃이 되었다. 가슴이 막혀왔다.
박성대에서 지나가는 할머니를 만났다.
양남회 (87)씨는 “나는 삼양 위 도련에서 살았는데 20살에 겪었어. 그때 죽어분 영감은 백자탁(당시 21살)이야. 산 폭도들이 밤 12시에서 1시 오랑게 사람을 죽여버리셔. 그때는 동네서라도 같이 회관에 야학하고 했지 우리가 어느 때도 누구랑 싸운 때도 없으시. 그렇지, 한 동네서 조금만 누구랑 싸움했으면 성질이 나 있으니까 나도 다 죽여버리셨을껴.
그랴서 살았시. 남편은 형이 경찰이라서 경찰 동생이라고 죽인겨. 아이 하나 낳았다니 그 시 다섯 살 시 또 죽었시. 오늘 날까니시 모레시 날까니시 하더니 죽어버려. 그 아기 다섯에 딱히 죽어버리니 기서 나 혼자 못 살아내지. 다시 살림 해냉게 아들 5형제 딸 하나 낳았어. 4·3 피해 신청은 나는 새 살림 냈응께 도련에서 했을 겨. 그때는 오늘 죽어질까 내일 죽어질까 그랬어. 오늘이 어떤고 죽어질건가! 이 밤이 어두워지면 이 날이 죽어질 날인가! 그러고 살았어.“
<양민학살진상보고서> 다음의 사망자 명단은 1960년 국회조사단에 제출된 신고서이다. 신고서 접수는 국회 조사활동 구역에 제주 포함이 결정되어 조사단이 내도하기까지 불과 4~5일 만에 급히 이뤄짐에 따라 도민들에게 제대로 알려지지도 못한 채 마감되었다. 이로 인해 실제 사망자 숫자의 10%에도 훨씬 못 미치는 1,917명에 그쳤다. 현재 국회에 보관 중인 신고서 내용 중 음력으로 표시된 것은 양력으로 환산했음. 행방불명자는 잡혀간 날 기준. 나이는 사망 당시의 나이. 주소와 본적지 중 본적지를 적음. 한자명, 사망 일자, 나이 등 취재 결과 정정이 가능하다 해도 원문에 충실했고, 판단 불능은 0표 처리함. 읍·면·리, 인명은 가나다순.
불교의 모든 경전은 “나는 이렇게 들었다(如是我聞).”는 말로 시작된다. 금강경을 기록한 아난다는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나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 내가 몇 개의 단어를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 혹은 내가 무의식중에 임의대로 몇 개의 단어를 슬쩍 끼워 넣었을지도 모른다. 정확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나의 마음이 거기에 개입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일 모두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렇기에 역사를 기록함에 있어 ‘나는 이렇게 들었다’가 어쩌면 가장 진실에 가깝겠다는 생각을 한다. 짧은 2박 3일의 여정으로 4·3 사건의 깊은 심연을 온전히 다 안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다만 이 시간 동안 그 참혹한 시대를 온몸으로 살아낸 분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가감 없이 들었다.
글을 정리하면서 주관적인 감정이나 사사로운 생각은 최대한 배제하고자 노력했다. 제주도 현장에서 직접 들은 증언과 공식적으로 기록된 사료들을 중심으로, 숨죽여 울던 제주의 봄을 기록으로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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