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능선을 다듬는 20년의 신명, 경주 내물왕릉의 숨은 주역들을 만나다
최영숙 | 입력 : 2011/09/10 [17:13]
| ▲ 신라 17대 내물왕릉을 벌초하다 ©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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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9월 5일 밤, 경주로 향하는 차에 올랐다. 경주의 왕릉 관리를 총괄하는 손수태(58) 씨에게 올해는 언제쯤 왕릉 벌초를 시작하는지 미리 문의해 둔 덕분이었다. 9월 6일부터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간다는 이야기가 내 발걸음을 재촉했다.
다음 날 새벽 5시경, 서악동 고분군에 도착했다. 해가 떠오르기까지는 아직 좀 더 기다려야 했다. 조심스레 서악동 고분군 안으로 발을 들였다. 이 새벽에 벌써 세 번째 찾는 고분군이지만, 올 때마다 경주는 늘 자욱한 안개로 나를 맞이하곤 했다.
아침 7시가 훌쩍 넘었음에도 안개는 쉽게 걷히지 않았다. 문득 이곳에서 맑은 일출을 보기란 참으로 귀한 일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오전 8시경, 오늘 어느 구역에서 벌초 작업이 이루어지는지 손수태 씨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물었다. 8시 30분부터 대릉원 인근에 있는 내물왕릉에서 작업을 시작한다고 했다. 서둘러 이동한 신라 17대 내물왕릉 주변에는 벌써 작업을 준비하는 수많은 분이 모여 있었다.
경상북도 경주시 교동 14번지에 자리한 이곳은 신라 제17대 내물왕(재위 356∼402)의 무덤이다. 내물왕은 김씨 성을 가진 왕으로서는 두 번째로 왕위에 올랐으며, 이때를 기점으로 신라 역사에서 김씨 가문에 의한 독점적인 왕위 계승 체제가 확립되었다.
또한 왕의 명칭을 '이사금'에서 '마립간'으로 처음 바꾸어 사용한 왕이기도 하다. 중국 전진(前秦)과의 적극적인 외교를 통해 선진 문물을 수입했으며, 백제와 왜의 연합 세력이 신라를 침공했을 때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에게 원군을 요청해 국가적 위기를 모면했다. 이렇듯 내물왕 재위 시기는 신라의 국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중대한 전환기였다.
무덤은 높이 5.3m, 지름 약 22m 규모의 원형 봉토무덤이다. 무덤 밑둘레에는 자연석을 이용해 단단하게 둘레석을 돌렸다. 또한 무덤 주변을 사각형으로 둘러싸고 있는 담장 터의 흔적이 발견되어, 일찍부터 국가 차원에서 특별하게 보호해 왔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신라 무덤의 전형적인 내부 형태는 거대한 거대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묘)이지만, 이 무덤은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고 둘레석이 고출되는 점 등으로 미루어 일각에서는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학계 일부에서는 황남대총(98호분)을 실제 내물왕릉으로 보는 견해도 존재한다.
위태로운 능선 위에서 벌초하는 분들 너머로 경주 시가지의 풍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이 무덤은 경주 평야에 자리한 고분들 중 황남대총에 이어 두 번째로 큰 규모를 자랑하는 대형 무덤이다.
예리한 예초기 칼날이 스칠 때마다 무성했던 풀들이 우수수 잘려 나갔다.
작업은 예초기 한 대당 네 명씩 조를 이루는 정밀한 협동 작업으로 진행되었다. 봉분 맨 꼭대기에서 중심줄 끝을 붙잡고 버티는 작업자는 능을 한 바퀴 돌 때마다 교대로 임무를 바꿨다. 현장에는 보조 작업자까지 포함해 총 13명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경사가 워낙 급해 한 사람만 발을 잘못 디디거나 실수를 해도 대형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위험천만한 공정이었다.
이곳 현장에서 땀 흘리는 분들은 보통 왕릉 벌초만 짧게는 10년, 길게는 20년 넘게 해온 베테랑들이었다. 지금은 등산화 밑창에 단단한 아이젠을 장착하고 올라가기에 그나마 미끄러질 위험이 덜하지만, 예전에는 그저 일반 운동화만 신고 올라가야 해서 매 순간 미끄러질까 봐 가슴을 졸여야 했다고 귀뜸해 주었다.
사람도 기계도 뜨거워진 열을 식혀야 했다. 가파른 능선 위에서 잠시 숨을 고르는 휴식 시간이 찾아왔다.
작업자 주금임(65) 씨는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 대부분이 나이가 60대를 훌쩍 넘겼다"고 전했다. "젊은 40대 사람들은 돈을 준다고 해도 하루이틀 일하고는 고되다며 못 견디고 나가버린다"는 것이다. 우리 시대 가장 고단하고 위험한 노동의 최전선을 정작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묵묵히 떠받치고 있다는 생각에 숙연해졌다.
시간이 흐르자 서서히 벌초 작업도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의 노동은 쉽게 끝이 나지 않았다. 기계로 풀을 다 벴다고 해서 마무리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이른바 경주 사투리로 '까꾸리(갈퀴)'라 부르는 연장을 들고, 베어진 풀더미들을 능선 아래로 다시 일일이 긁어내려야만 했다.
건물 2층 높이에 달하는 거대한 봉분 중에서도 유독 경사가 급하고 가파른 구간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려올 만큼 위태로워 보였다.
능선 꼭대기에서부터 긁어모아 내린 풀더미들은 아래로 내려올수록 갈퀴로 감당하기 힘들 만큼 거대하고 묵직한 덩어리가 되었다. 작업하던 아주머니 한 분은 무게를 이기지 못해 몇 번이고 미끄럼을 타듯 비탈길을 미끄러져 내려오면서도 끝내 풀더미를 가슴으로 안고 끌어내렸다.
푸른 능선 위에 비로소 아름다운 '사람 꽃'이 피어난 듯했다. 1년에 보통 세 번씩 이렇게 대대적인 벌초를 진행한다고 했다. 이분들의 보이지 않는 거칠어진 손길 덕분에, 경주를 찾는 수많은 관광객이 늘 말쑥하고 정갈하게 가꿔진 천년의 능선을 마주할 수 있었던 것이다.
| ▲ 말끔하게 정리된 신라 17대 내물왕릉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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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내물왕릉이 말끔하게 새 옷을 입었다. 예전에는 깎아낸 풀들을 일일이 수거해 처분해야 했지만, 요즘에는 인근 목장을 운영하는 이들이 기계를 가져와 둘둘 말아간 뒤 가축들의 건초 사료로 요긴하게 쓴다고 한다.
벌초 작업을 하면서 가장 힘든 순간이 언제인지 여쭈었다. 권수선(61) 씨는 "예초기 기계 작업을 셋이서 손발을 맞춰 하는데, 한 명이라도 삐끗해서 잘못되면 셋이 한꺼번에 다치니까 그게 가장 신경 쓰이고 조심스럽다. 그에 비하면 풀을 아래로 끌어내리는 일은 나 혼자 힘쓰면 되는 일이니까 차라리 괜찮다"며 웃어 보였다.
이필태(65) 씨는 세상을 향해 묵직한 소신을 건넸다. "젊은 사람들은 이 힘든 일을 안 하려고 하제. 일할 때나 살아가면서 내가 조금 손해 본다 생각하고 살면 주변 사람 다 좋아하니더. 사람이 너무 맹글맹글(반질반질)하게 제 실속만 차리면 누가 좋아하겠는교."
김환이(64) 씨는 "집에서 무료하게 노는 것보다 여기 나오면 몸은 비록 힘들어도 마음 맞는 친구들도 만나고, 내 힘으로 용돈도 벌 수 있으니 참 좋다. 일 일이라기보다 봉사활동이라 생각한다. 여기서 번 돈으로 베트남 어린이에 매달 만 원씩 후원도 보낸다"며 수줍게 미소를 지었다.
왕릉 관리를 담당하는 손수태 씨에게 일당과 근무 여건에 대해 궁금한 점들을 물었다. "하루 일당이 여성분은 3만 7천 원, 남성분은 4만 6천 원 선이다. 이분들이 순수하게 돈벌이로만 생각했다면 이 고된 일을 하러 나오지 못했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덧붙여 "주 5일 근무제로 일하며, 벌초 작업뿐만 아니라 3월부터 11월까지 경주 전역을 수놓는 유채꽃, 야생화, 연꽃단지, 코스모스 길까지 모든 조경 관리를 이분들이 도맡아 하신다. 그런데 자식처럼 정성껏 가꾼 꽃들을 무참히 짓밟고 꺾어가는 일부 관광객들을 볼 때면 가슴이 너무 쓰리다"고 토로했다.
이분들이 감당하는 노동의 높은 난이도와 엄청난 작업량에 비해보면, 사회적인 처우나 대접이 너무나 부실하다는 생각이 들어 씁쓸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작업을 마친 분들의 다리를 보니 고된 노동의 흔적이 역력했다. 가파른 왕릉 비탈을 온종일 오르내리느라 무리가 간 발목마다 하얀 붕대를 꽁꽁 감고, 그 위에 다시 두터운 아대를 덧대고 계셨다. 우리가 경주에 갈 때마다 마주했던 편안하고 정돈된 고분군들, 그리고 사계절 아름답게 피어나던 꽃길들은 전부 이분들이 발목의 통증을 견뎌내며 완성한 위대한 작품이었다.
나 혼자 힘들어 다치는 것은 차라리 괜찮다는 분, 세상살이에서 내가 조금 손해 보고 사는 게 속 편하다는 분, 고된 일당을 쪼개어 먼 이국땅의 아이에게 후원을 보내는 분까지. 오늘 신라의 왕릉 위에서 참으로 귀하고 큰 사람들을 만났다. 경주라는 도시를 찾을 때마다 마음이 한없이 편안해졌던 이유는, 어쩌면 이 거대한 능을 닮은 보살 같은 어르신들이 도시 곳곳을 묵묵히 보살피고 계셨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신라 17대 내물왕릉의 가파른 비탈 위에서 만난 분들에게서 인생의 참된 지혜를 한 수 배웠다. 한 시대를 정직하게 살아온 큰 어른들을 만나는 일은 언제나 고귀하다. 이분들은 복잡하고 얽힌 인생의 이치를 그저 툭 던지는 투박한 한마디 속에 너무나 명쾌하고 단순하게 담아내신다.
아름다운 세상 풍경을 카메라에 담는 것보다, 사람의 진심 어린 내면을 마주하는 것만큼 더 귀한 풍경은 없다는 진리를 가슴에 새기며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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