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운동 120주년 답사기 ②] “서면 백산, 앉으면 죽산”… 정읍의 들녘에서 동학의 횃불을 다시 들다

최영숙의 발길따라 가는 풍경

최영숙 | 기사입력 2014/01/27 [20:50]

[동학농민운동 120주년 답사기 ②] “서면 백산, 앉으면 죽산”… 정읍의 들녘에서 동학의 횃불을 다시 들다

최영숙의 발길따라 가는 풍경

최영숙 | 입력 : 2014/01/27 [20:50]

 

공주 우금치 전적지를 뒤로하고, 동학농민혁명의 진정한 산실인 정읍으로 향했다.

 

정읍에서는 백산성을 시작으로 전봉준 고택, 전봉준 단비, 말목장터, 사발통문 작성 모의 집, 무명동학농민위령탑, 고부관아 터, 황토현 전적지, 동학농민혁명기념관, 그리고 만석보 유지비까지 그날의 뜨거웠던 자취를 꼼꼼히 답사했다.

 

▲ 배들평야가 한 눈에 들어오는 백산 이곳에서 격문을 발표하고 농민들의 봉기와 호응을 촉구하였다.     ©최영숙

 

우선 백산성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1894년 음력 3월 20일 무장(茂長)에서 창의 격문을 발표하며 1차 봉기한 동학농민군은 고부관아를 점령한 뒤 이곳 백산으로 전격 이동했다. 백산은 해발 47m에 불과한 낮은 야산이지만 부안, 김제, 고부, 태인 등 사방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이며, 광활한 배들평야가 한눈에 들어오는 군사적 요충지다.

 

동학농민군은 이곳에서 총대장 전봉준, 총관령 김개남·손화중, 영솔장 최경선, 총참모 김덕명·오시영, 비서 송희옥·정백현 등으로 진영을 확대 개편하여 강력한 연합 부대를 구성했다. 그리고 '호남창의대장소'의 이름으로 격문을 발표하며 전국의 농민들에게 동참과 호응을 촉구했다. 역사 속에서 전해지는 “서면 백산, 앉으면 죽산”이라는 강렬한 표현도 바로 이곳에서 탄생했다. 전라도 각지에서 구름처럼 몰려든 농민군이 일어서면 흰 옷을 입어 산 전체가 하얗게(백산) 변했고, 횃불을 밝히며 앉으면 손에 쥔 죽창들이 숲(죽산)처럼 하늘을 찔렀기 때문이다.

 

▲ 전봉준의 생가     ©최영숙

 

이어 사적 제293호로 지정된 '전봉준 고택'에 당도했다. 녹두장군 전봉준은 초가삼간인 이곳에 머물며 한약방을 운영하고 동네 아이들에게 서당을 열어 글을 가르치는 한편, 뜻을 함께할 동지들을 은밀히 규합했다.

 

고택의 마당에 서니 어린 시절 어머니를 따라 부르던 구전가요 <새야 새야 파랑새야>가 귓가를 스쳤다. 어릴 적 어머니는 밭을 매거나 고추를 딸 때 땀을 훔치며 흥얼흥얼 이 노래를 부르곤 하셨다. 그러고는 지나가는 말투로 "여기 나오는 녹두장군이 바로 전봉준이란다"라고 일러주셨다. 우리 세대까지는 입에서 입으로 불렸던 이 애절한 노래를, 과연 요즘 아이들도 기억하고 부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빠르게 단절되어 가는 세대 간의 벽이 느껴져 씁쓸함이 밀려왔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은새야

녹두꽃이 떨어지면 부지깽이 매 맞는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은 새야

아버지의 넋새보오 엄마 죽은 넋이외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너는 어이 널라왔니

솔잎댓잎 푸릇푸릇 봄철인가 널라왔지

▲ 서울로 압송되어 가는 전봉준     ©최영숙

 

새장을 연상시키는 가마에 갇혀 서울로 압송되어 가는 전봉준의 사진 한 장은, 10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우리 앞에 녹두장군을 다시 불러냈다.

 

이 사진에서 영감을 얻은 안도현 시인은 지난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서울로 가는 전봉준>이 당선되며 문단에 등단했다. 군부독재의 서슬이 퍼렇던 1984년이라는 엄혹한 시대적 상황이, 90년 전 세상을 뒤엎고자 했던 전봉준의 서늘한 기상을 다시금 간절하게 요청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서울로 가는 전봉준

_ 안도현


눈 내리는 만경 들 건너가네
해진 짚신에 상투 하나 떠 가네
가는 길 그리운 이 아무도 없네
녹두꽃 자지러지게 피면 돌아올가나
울며 울지 않으며 가는
우리 봉준이
풀잎들이 북향하여 일제히 성긴 머리를 푸네


그 누가 알기나 하리
처음에는 우리 모두 이름 없는 들꽃이었더니
들꽃 중에서도 저 하늘 보기 두려워
그늘 깊은 땅속으로 젖은 발 내리고 싶어하던
잔뿌리였더니


그대 떠나기 전에 우리는
목쉰 그대의 칼집도 찾아 주지 못하고
조선 호랑이처럼 모여 울어주지도 못하였네
그보다도 더운 국밥 한 그릇 말아 주지 못하였네
못다 한 그 사랑 원망이라도 하듯
속절없이 눈발은 그치지 않고
한 자 세 치 눈 쌓이는 소리까지 들려오나니


그 누가 알가니 하리
겨울이라 꽁꽁 숨어 우는 우리나라 풀뿌리들이
입춘 경칩 지나 수군거리며 봄바람 찾아오면
수천 개의 푸른 기상나팔을 불어제낄 것을
지금은 손발 묶인 저 얼음장 강줄기가
옥빛 대님을 홀연 풀어헤치고
서해로 출렁거리며 쳐들어갈 것을 

 
우리 성상 계옵신 곳 가까이 가서
녹두알 같은 눈물 흘리며 한목숨 타오르겠네
봉준이 이 사람아
그대 갈 때 누군가 찍은 한 장 사진 속에서
기억하라고 타는 눈빛으로 건네던 말
오늘 나는 알겠네

 
들꽃들아
그날이 오면 닭 울 때
흰 무명 띠 머리에 두르고 동진강 어귀에 모여
척왜척화 척왜척화 물결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 전봉준 단비     ©최영숙

 

다음으로 전봉준 장군의 단비(壇碑, 무덤이 없는 이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로 향했다.

 

공주 우금치에서의 패전으로 동학농민군은 회복 불가능한 타격을 입었다. 이후 원평과 태인으로 이어지는 마지막 결전에서조차 패배한 전봉준은 입암산성과 백양사를 거쳐 회문산 자락 아래 자리한 순창 피노리로 몸을 숨겼다. 그러나 그곳에서 과거 신뢰했던 옛 부하 김경천의 배신과 변절로 인해 결국 체포되었고, 1895년 3월 30일 동지였던 손화중, 최경선 등과 함께 교수형에 처해지며 짧고 강렬했던 생을 마감했다. 굳건하게 서 있는 단비의 표면에는 <새야 새야> 노래와 함께 그가 형장으로 가기 전 남긴 절명시(絶命詩)가 또렷하게 새겨져 있었다.


<녹두장군 전봉준의 절명시>


時來天地皆同力 때를 만나서는 천지가 모두 힘을 합치더니

運去英雄不自謀 운이 다하매 영웅도 스스로 도모할 길이 없구나

愛民正義我無失 백성을 사랑하고 의를 세움에 나 또한 잘못이 없건마는

爲國丹心誰有知 나라를 위한 붉은 마음을 누가 알까 

 동학농민운동의 역사에서 전봉준이라는 이름은 결코 떼어놓고 설명할 수 없다. 변방의 벽촌에서 가난한 시골 훈장으로 살아가던 전봉준을 역사의 전면으로 불러내어 세상을 바꾸는 지도자로 거듭나게 한 그의 극적인 일생은, 시대를 거듭할수록 현대인들에게 새로운 울림으로 재조명되고 있다.

▲ 말목장터 앞 정읍사무소에 쓰인 2014년 농민들의 요구     ©최영숙


이어 찾은 '말목장터'는 1894년 1월 10일 전봉준을 필두로 농민군이 고부관아로 쳐들어 가기 전, 이 일대의 성난 농민 1,000여 명이 집결하여 거사를 도모했던 역사적인 공간이다. 120년이 지난 오늘날, 말목장터 앞 이평면사무소 건물에는 “80kg 쌀 한 가마에 8년 만에 겨우 4,000원 인상이 웬 말이냐! 정부는 쌀 목표 가격을 23만 원으로 보장하라!”라는 성난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땅을 일구며 살아가는 농민들의 절박한 생존권 요구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듯해 묘한 기분이 들었다.

▲ 동학농민혁명을 모의하며 사발통문을 작성한 집     ©최영숙

 

농민들이 비밀리에 모여 동학농민혁명을 기획하고 모의했던 장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발통문(沙鉢通文)'이란 주모자가 누구인지 관청에서 쉽게 알아채지 못하도록 참가자들의 이름을 사발 모양으로 둥글게 삥 둘러 적어, 같은 뜻을 가진 동지들을 모으기 위해 격문을 널리 띄운 문서를 뜻한다.

 

동학농민운동 당시 농민군들이 작성한 사발통문은 역사적으로 매우 유명하다. 1893년 11월 고부군 서부면 죽산리(현 정읍시 고부면 신중리 주산마을)에 위치한 송두호의 집에 전봉준을 비롯한 핵심 인물 20명이 비밀리에 회동했다. 이들은 고부 농민 항쟁을 치밀하게 기획하고 결의 서명하여 각 리(里)의 집강들에게 통문을 돌렸다. 이 귀중한 문서가 지난 1968년 12월, 마침내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면서 고부농민항쟁이 우발적인 폭동이 아니라 사전에 치밀하게 계산된 계획 아래 진행된 민중 혁명이었음이 역사적으로 증명되었다.


<사발통문 핵심 결의 사항>

 

1. 고부성을 격파하고 군수 조병갑을 효수하라.

2. 군기창과 화약고를 점령하라.

3. 군수에게 아첨하여 백성을 침학한 관리를 격징하라.

4. 전주감영을 함락하고 서울로 직접 향하라.

마을 입구에는 이를 기리는 '동학혁명모의탑'이 세워져 있었다. 시아버지가 실제 사발통문에 이름을 올렸던 주민이었다고 밝힌 한 동네 어르신의 말에 따르면, 이 탑은 송두호의 후손인 송기태 씨가 조상들의 숭고한 넋을 기리기 위해 자그마치 3년 동안 홀로 정을 쪼아 정성으로 세운 탑이라고 했다. 혁명이 실패로 돌아간 뒤, 관군의 가혹한 보복을 피해 이 마을 주민들은 거의 대부분 부안 등 타 지역으로 야반도주하여 흩어져 살아야 했다는 서글픈 뒷이야기도 전해 들었다.

▲ 동학혁명 무명농민군 무명탑      ©최영숙


 녹두회관 앞마당에는 이름 한 줄 남기지 못하고 산야에서 쓰러져 간 무명 농민군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무명동학농민위령탑'이 쓸쓸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 조병갑의 수탈과 학정으로 농민들이 들고 일어난 고부관아터     ©최영숙

 

수탈의 현장인 '고부관아 터'로 향했다. 옛 관아 터인 정읍시 고부면 고부리에는 현재 고부초등학교가 들어서 있다. 고부초등학교는 대한제국 시절인 1906년 8월 15일 사립광화학교로 첫 문을 열었으며, 현재 특수학급을 포함해 총 52명의 아이들이 배움을 이어가고 있다. 올해로 개교 108주년을 맞는 셈이다. 올해가 동학농민운동 120주년이니, 탐관오리 조병갑이 학정을 일삼던 이 치욕스러운 고부관아 자리에 농민운동이 진압되고 불과 12년 만에 민족 교육을 위한 사립광화학교가 세워졌던 것이다. 1910년의 한일병합조약보다도 빠른 설립이었다.

 

고부는 동학농민혁명의 거대한 서막을 연 고부봉기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혁명이 실패한 이후 일제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 개편을 거치며, 과거 19개 면을 거느리던 거대한 '군(郡)'에서 일개 '면(面)' 소재지로 처참하게 격하되었다. 혁명의 본고장이라는 이유로 조정과 일제에 의해 가장 철저하고 혹독하게 파괴당한 역사의 단면을, 고부관아 터는 상징적으로 웅변하고 있었다.

 

▲ 정읍천과 태인천이 합류하는 지점의 만석보 유지비     ©최영숙

 

답사를 마칠 무렵 사방에 어둠이 짙게 깔렸다. 여정의 대미는 동학농민혁명의 실질적인 시초가 되었던 '만석보 유지비'에서 장식했다.

 

과거 배들평야의 농민들은 정읍천 아래에 스스로 '예동보'라는 보를 막아 농사물을 댔다. 이 보는 가뭄이 심하게 들어도 끄떡없이 풍년 농사를 짓게 해주었기에 주민들은 감사한 마음을 담아 '만석보(萬石洑)'라 불렀다. 그러나 새로 부임한 고부군수 조병갑은 멀쩡한 보를 놔두고, 정읍천과 태인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강제로 새로운 보를 축조하게 했다. 이 무리한 공사 때문에 해마다 홍수가 나면 오히려 냇물이 역류하여 상류에 있던 농민들의 논과 밭이 물에 잠기는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심지어 조병갑은 보를 쌓은 첫해에는 수세(水稅, 물값)를 받지 않겠다던 감언이설을 어기고, 비옥한 논에는 두 말, 척박한 논에는 한 말의 수세를 강제로 징수하여 농민들의 고혈을 짜냈다. 예동마을을 비롯한 농민들은 결국 더는 물러설 곳이 없는 한계 상황에 내몰렸고, 이는 대규모 무장 봉기로 이어졌다. 새로 쌓은 만석보는 고부군수 조병갑의 가혹한 학정과 조선 후기 지배층 수탈의 역사를 보여주는 가장 명백한 상징물이다.

 

▲ 정읍 마을 구멍가게 담벼락에 그려진 동학 횃불     © 최영숙

 

공주와 정읍을 아우르는 동학농민운동 유적지를 모두 돌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가슴속에 수많은 생각들이 교차했다. 동학농민운동은 흘러간 역사 속에서 시대와 정권의 성격에 따라 그 이름을 부단히 달리해왔다. 최초의 '동학난'이라는 폭동의 비하에서 시작해 '동학혁명', '갑오농민전쟁', 그리고 '동학농민운동'에 이르기까지, 명칭의 변천에 따라 그에 따르는 역사적 평가의 무게감도 확연히 달라졌다. 비록 제도적인 개혁을 완전히 완수하지 못하고 좌절된 '실패한 혁명'이었지만, 이 숭고한 정신은 훗날 3·1 독립운동과 의병 투쟁 등 항일 민족 운동의 거대한 자양분이자 시발점이 되었다는 점에서 '절반의 성공'이자 위대한 자산이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뻔했던 민초들의 처절한 서사와 전봉준, 김개남이라는 두 거두의 불꽃 같은 삶은 후대의 시인과 소설가들에 의해 끊임없이 예술로 부활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문장가 박태원이 월북 후 북한 땅에서 집필한 대하역사소설 《갑오농민전쟁》은 지난 1988년 납·월북 작가에 대한 전면 해금 조치에 따라 1989년 남한의 출판사 '깊은샘'을 통해 비로소 완간되어 우리에게 소개되었다.

 

또한 동학의 영웅 전봉준은 구전되던 <새야 새야> 노래와 1984년 안도현의 청춘을 깨운 시 <서울로 가는 전봉준>을 통해 오늘날까지 끊임없이 우리 곁으로 호명되고 있다. 또 다른 거두인 김개남은 박경리 작가의 대하소설 《토지》 속에서 동학의병장 '김개주'라는 매력적인 인물로 투영되어 재탄생했다. 소설 속 김개주는 최참판댁 윤씨 부인과의 사이에서 아들 '김환(구천이)'을 낳는다. 별당아씨와 사랑의 도피를 감행하는 비극적 운명의 김환은, 극의 후반부에 이르러 아버지가 못다 이룬 항일 의병 운동과 무장 독립운동의 길을 걸으며 일제에 정면으로 대항한다. 동학 의병장이었던 아버지 김개주의 푸른 뜻을 아들이 대를 이어 수행한 것이다.

 

 

이렇듯 120년의 긴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소설과 시, 그리고 오늘날 농민들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새롭게 해석되고 호흡하는 동학농민운동은, 멈춰버린 과거의 박제가 아니라 여전히 뜨겁게 살아 숨 쉬는 '현재진행형의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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