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운동 120주년 답사기 ①] 죽창과 기관포의 처절한 격전지, 공주 우금치와 송장배미를 가다

최영숙의 발길 따라 가는 풍경

최영숙 | 기사입력 2014/01/17 [22:10]

[동학농민운동 120주년 답사기 ①] 죽창과 기관포의 처절한 격전지, 공주 우금치와 송장배미를 가다

최영숙의 발길 따라 가는 풍경

최영숙 | 입력 : 2014/01/17 [22:10]

 

지난 2014년 1월 10일로 동학농민운동이 발발한 지 어느덧 120주년을 맞았다. 의미 있는 120주년 기념행사를 찾아보았으나, 안타깝게도 눈에 띄는 행사가 없어 무척 아쉬웠다. 결국 뜻을 함께하는 지인들과 함께 지난 11일, 동학농민운동의 치열했던 발자취를  찾아 나섰다. 그날의 기록을 이곳에 쓴다.

 

동학농민운동은 1894년 동학교도들과 농민들에 의해 일어난 민중의 반봉건·반외세 무장 봉기를 가리킨다. 이는 크게 1894년 음력 1월의 고부 봉기(제1차)와 음력 4월의 전주성 봉기(제2차), 그리고 음력 9월의 전주·광주 총궐기(제3차)로 나뉜다.

 

당시 농민들은 동학 교조 최제우의 신원(伸冤, 억울함을 풂) 회복 문제 외에도, 기존 조선 양반 관리들의 끊임없는 탐학과 부패, 사회적 혼란에 대한 불만이 극에 달한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1892년(고종 29년) 전라도 고부군으로 부임해 온 군수 조병갑의 가혹한 수탈과 남형(濫刑, 법에 의하지 않은 형벌)이 결정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부패 척결과 내정 개혁, 보국안민의 기치로 일어선 동학 농민군 중 일부는 권력 중심에서 밀려나 있던 흥선대원군, 이준용 등과도 은밀히 결탁했다. 전봉준은 대원군을 반신반의하면서도 명성황후와 민씨 세력을 축출하기 위해 손을 잡았다. 대원군 역시 명성황후를 제거할 강력한 무력 집단이 필요했기에 동학 농민군과 제휴하게 된다. 이에 따라 동학 농민군 중 일부는 탐관오리 처벌과 개혁 외에 '대원군의 섭정 환원'까지도 거병의 명분으로 삼았다.

 

초기에는 조정에 의해 '동학난', '동비(東匪)의 난'으로 격하되어 불리다가, 1910년 대한제국 멸망 이후에야 '농민운동', '농민혁명'으로 제 이름을 찾으며 격상되었다. 오늘날에는 '동학농민혁명'으로도 널리 불리며, 갑오년에 일어났기에 '갑오농민운동' 혹은 '갑오농민전쟁'이라고도 한다. 당시 동학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민씨 정권은 청나라군과 일본군을 번갈아 가며 끌어들였다. 이는 결국 한반도 한복판에 외국 군대를 주둔시키는 빌미를 제공했으며, 나아가 청일전쟁이 발발하게 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이른 새벽, 일행들과 함께 오전 6시에 시흥을 출발했다. 이번 여정의 주요 답사지인 정읍으로 가기 전, 우리는 먼저 공주에 들르기로 했다. 동학농민운동 역사상 가장 큰 전투이자 승패의 분수령이 되었던 결전의 현장, '공주 우금치 전적지'를 눈에 담기 위해서였다.

 

▲ 송장배미는 농민군의 시체를 한 곳에 모아 매장했던 곳이다.     ©최영숙


.우금치 고갯마루로 향하는 길목에서 먼저 '송장배미'라는 곳을 마주했다. 저 멀리 골프 선수 박세리를 배출한 금성여고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당시 농민군은 우금치를 정면 공격하는 동시에, 봉황산의 하고개를 넘어 공주감영의 배후를 치려는 치밀한 작전을 세웠다. 그러나 하고개는 관군에게 천혜의 요새였고, 농민군은 계곡을 가득 메운 채 처절한 시체만을 남기고 후퇴해야 했다. 이때 사방에 널려 있던 농민군의 시신을 한곳에 모아 한꺼번에 매장한 곳이 바로 '송장배미'라 불리는 이 논이다. 얼마나 많은 농민군이 이곳에서 목숨을 잃고 묻혔으면 이름조차 '송장배미'가 되었을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 우듬치 전투가 벌어졌던 능선에 쓰러진 조형물     ©최영숙

 

송장배미를 지나 마침내 우금치 전적지에 당도했다. 고갯마루에는 거대한 '동학혁명군위령탑'이 우뚝 서 있었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 보니 탑의 전면부가 날카롭게 훼손되어 있었고, 전반적으로 관리가 되지 않은 채 씁쓸하게 방치되어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언덕 위로 발걸음을 옮기자 그곳 역시 나무로 만든 조형물들이 썩고 쓰러져 나뒹굴고 있었다. 마치 동학농민혁명 120주년이 처한 쓸쓸한 현실을 단면으로 보여주는 듯했다.

 

우금치 전투는 동학농민혁명의 사활이 걸린 최대의 격전이었다. 농민군은 무너미고개와 이인 방면에서 관군을 강하게 밀어붙였고, 이에 맞선 조·일 연합군은 모리오 미사이치 대위의 지휘 아래 우금치 옆 셉세울 앞산에 본진을 구축했다. 그리고 우금치와 금학동, 곰티, 효포 봉수대에 군대를 촘촘히 배치했다. 농민군은 이 고갯마루를 뚫기 위해 집중 공격을 감행했으나, 고갯마루를 불과 150m 앞둔 상황에서 조·일 연합군의 압도적인 신식 무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포탄과 총탄이 비 오듯 쏟아져 내려 더는 진격하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이기동과 조병완이 이끄는 관군이 농민군의 좌우 측면을 기습 공격하면서 농민군은 엄청난 사상자를 낸 채 공주 동남쪽 봉우리로 후퇴하고 말았다.

 

농민군 별동대 한 부대가 봉황산을 거쳐 공주감영을 직접 타격하려 시도했으나, 이 역시 하고개와 금학골 골짜기에서 대기하던 관군의 철저한 방어벽에 가로막혀 실패로 돌아갔다. 이로써 농민군은 4일간에 걸친 제2차 접전에서도 처참하게 패배했다. 우금치 전투에서 궤멸적인 타격을 입은 동학농민군은 더는 조직적인 전투를 수행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이후의 역사는 패잔병이 된 농민군을 향한 일본군의 잔혹한 대학살전으로 이어졌다.

 

우금치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이 패배할 수밖에 없었던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무기의 절대적인 열세였다. 당시 농민군이 가진 주력 화기는 화승총(조총)으로, 심지에 직접 불을 붙여 쏘는 방식이라 사정거리가 불과 100보 안팎이었고 발사 속도도 분당 2발에 불과했다. 그마저도 구하지 못한 대다수의 농민은 대나무를 깎아 만든 죽창 하나에 의지해 싸터로 뛰어들었다. 반면 일본군은 사정거리가 400~500보가 넘고 분당 12발 이상을 사격할 수 있는 최신식 스나이더 소총을 쥐고 있었으며, 심지어 막강한 대량 살상 화력인 미국제 개틀링 기관포까지 구축하고 있었다. 근대식 기관포 사격 앞에 가을 낙엽처럼 추풍낙엽으로 쓰러져 갔을 농민군들의 처절한 모습이 눈앞에 환히 보이는 듯해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 2013년 10월 3일 우금치 동학혁명탑 앞에서 제 1회 우금치 영산재를 지냈다.     ©최영숙

 

동학혁명군위령탑을 둘러보고 내려오는 길에, 탑 바로 아래 자락에 자리한 사찰인 '원효사'에 잠시 들렀다.

 

원효사의 해월 주지 스님께서 따뜻한 차를 대접해 주시며 귀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스님께서는 지난해 10월 3일, 우금치 동학혁명군위령탑 앞에서 뜻깊은 <제1회 우금치 영산재>를 직접 주관하여 봉행하셨다며 당시의 사진들을 보여주셨다. 주지 스님이 사재를 털어 영산재를 지낸 이유는 "1894년 동학혁명 당시에 이 고갯마루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민군, 관군, 일본군 등 수만 명의 외로운 영가들을 종교의 경계를 넘어 위로하기 위해서"였다고 했다.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영산재 보유자인 어장 보명 스님과 영산재보존회 회원 스님들을 정중히 청해 격조 높게 의식을 치렀다는 설명이다.

 

스님은 또한 전면이 심하게 훼손된 위령탑의 상처에 대해서도 언급하셨다. 탑에 새겨진 '대통령 박정희'라는 글자를 역사적 반감을 가진 누군가가 정으로 깊게 쪼아내 훼손한 것이라 전했다. 

 

▲  누군가 정으로 쪼아서 훼손된 우금치 동학혁명탑      ©최영숙

 

스님이 보여주신 영산재 안내문에는 다행히 서기 1973년 건립 당시 새겨졌던 탑문의 전문이 온전히 기록되어 있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금치 동학혁명군위령탑 탑문 전문>


인내천과 사민평등의 종지아래 후천개벽의 혁명정신으로 무장하고 동학교주 전봉준이 호남의 만석보 기슭에서 수천의 농민군을 편성하여 첫 봉화를 든 것은 갑오(서기 1894년) 정월 10일. 20일께는 다시 대거하여 백산을 점거하고 습격해오는 관군을 격파하면서 승승장구 .4월말에는 전주성까지 함락하게 되니 혁명의 성공이 눈앞에 다가오는 듯하였다.

그러나 청일 양국의 무력간섭 아래 이 나라의 국권마저 위협받게 되자 정부 측이 먼저 화해하기를 청하니 우국애민의 일념에서 동학군은 마침내 양보하여 전주성을 내어주고 그 여력을 지방 조직에만 기울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군국주의 일제의 엄청난 야욕은 돌연 남의 나라 주권을 침해 독점하고자 날뛰게 되니 정녕 국가의 명맥이 통틀어 풍전등화가 되고 말았다. 이에 한동안 후퇴했던 동학군은 드디어 항일 구국의 독립군으로 재무장하고 총궐기하였다,

남북접이 호응 합세하여 20만의 대병력을 논산평야로 집결시키고, 전봉준과 손병희 두 통령의 작전지휘아래 서울까지 진격하는 주요거점으로 공주성부터 공략하게 되었다.

그 결과 10월 하순부터 전개된 공주성의 대공방전은 이 우금치를 중심으로 날이 갈수록 처참하고 가열하게 됐다. 한 고지의 주인을 40~50차례나 바꾸어 가면서 세계전사에 유례없는 격전을 되풀이하였다.

그리하다가 새로 투입된 일본군의 증원부대가 근대의 무서운 살인무기 기관총으로 연속 맹사격을 퍼 붓게 되니 악전고투하기 3일 만에 동학군은 막대한 희생자를 내인 채 전우들의 시산혈하를 넘어서 11월11일 논산방면으로 철수하였다.

대망의 혁명 사업이 여기서 좌절당하고 계속되는 추격과 살육 속에 위국단침조차 알아줄 이 없었다.

그러나 님들이 가신지 80년 .5.16 혁명 이래의 신생조국이 새삼 동학혁명의 순국정신을 오늘에 되살리면서 빛나는 시월 유신의 한 돌을 보내게 된 만큼 우리 모두가 피어린 이 언덕에 잠든 그 님들의 넋을 달래기 위하여 이 탑을 세우노니 오가는 천만대의 후손들이여 그 위대한 혁명정신을 영원무궁토록 이어받아 힘차게 선양하라.


서기 1973.11.11
제자 대통령 박정희
글 문학박사 이선근
글씨 양재한
동학혁명 위령탑 건립위원회 세움

뒷면에는 감사문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었다.

이 나라 이민족을 도탄에서 건져내는 동시에 이미 혼탁해진 조정을 과감하게 바로잡고 보국안민의 대업을 이룩하기 위하여 이 내 목숨을 아낌없이 바친 동학혁명군의 10여만 영령들을 달래고자 이 고장 공주의 갸륵한 이창덕 동덕이 누구보다 앞장서 온 정성을 바치게 되니 천도교 중앙총부는 그 뜻을 더욱 널리 펴서 성취시키기로 결정하고, 금년 6월 25일 이선근 박사를 위원장으로 동학혁명군 위령탑건립위원회를 조직한 다음, 이 사실을 삼가 박정희 대통령 각하께 품신하였던바 대통령 각하께서는 위원회가 앙청한 명예위원장과 제자의 휘호를 기꺼이 수락하시고, 특히 금일봉까지 하사하시어 이일의 거국적인 의의를 더욱 빛내주시었다.

여기에 이 고장 공주의 관민 여러분과 전국 각지의 뜻있는 인사들과 동학의 후예인 천도교인들이 물심양면으로 알뜰한 정성을 모아서 일직이 혁명군의 마지막 결전장이었던 공주읍 우금치 이 자리에 위령탑을 세우기로 마련하고, 지난 9월 21일 기공한지 50일 만에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일을 위하여 크게 진념해주신 박정희 대통령 각하와 회무발전을 보살피며 탑문을 지어주신 이선근 박사는 물론이요, 이 탑의 설계 감수를 맡아주신 정인국교수와 글씨를 써주신 양재한 동덕 여러분께도 우리 천도교를 대표하여 충심으로 감사의 뜻을 표해둔다.

포덕 114년 11월 11일 천도교 교령 최덕신 심고

공주 우금치에 서 있는 동학혁명군위령탑 하나에도 우리 근현대사의 파란만장한 역사적 소용돌이가 고스란히 집약되어 있었다. 탑의 건립을 주도한 박정희 전 대통령, 훗날 월북하여 북한 땅에 묻힌 천도교 교령 최덕신, 당대의 사학자 이선근, 그리고 이를 비판적으로 거리를 두며 해석한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의 시선까지 수많은 이야기가 이 탑 하나를 둘러싸고 교차하고 있었다.

 

정부의 적극적인 후원과 금일봉으로 세워진 위령탑이지만, 세월이 흘러 권력자의 이름이 정으로 파헤쳐진 이 상처투성이 탑을 바라보며 기록가로서 깊은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정치적 호오를 떠나 역사적 유물은 그 시대의 명암을 있는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 최우선 가치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천도교 교령을 지낸 최덕신은 육군사관학교 교장과 서독 주재 대사 등을 지낸 남한의 고위 인사였으나 1986년 아내와 함께 돌연 월북했고, 2007년 사망 후 북한의 애국렬사릉에 묻힌 파격적인 인물이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유신 정권의 잔재이자 변절자의 흔적이 남은 이 탑을 허물고 완전히 새로 세워야 한다는 거친 주장을 펴기도 한다. 하지만 필자의 생각은 다르다. 쪼아지고 파헤쳐진 훼손된 모습 그 자체도, 탑문 행간에 숨겨진 유신의 역사도 결국 우리가 마주해야 할 엄연한 '역사의 한 장면'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은 그의 저서 《이이화의 못다 한 한국사 이야기》를 통해 이 위령탑의 탄생 배경과 '동학혁명'이라는 명칭 속에 숨겨진 이데올로기를 다음과 같이 날카롭게 짚어냈다.

"이 탑의 건립은 박정희 개인의 견해에 힘입은 바가 클 것이다. 그의 아버지(박성빈)는 실제로 동학 접주(接主)로 활동했기에, 박 전 대통령은 어릴 적부터 동학에 깊이 각인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개인적 배경은 유신 정권 시절의 기념탑 건립 등에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1963년에는 정부 주도로 황토현에 '갑오동학혁명기념탑'이 세워졌고, 1973년에는 역시 정부의 전폭적인 후원 아래 천도교 주관으로 공주 우금치에 '동학혁명군위령탑'이 건립되었다. 당시 권력층과 천도교 측은 '동학혁명'이라는 용어를 전면에 내세우며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이 과정에서 정작 혁명의 진정한 주역이었던 '농민'이라는 주체는 동학이라는 종교적 그늘에 가려져 끼어들 틈이 없었다. 당시 주류 사학계와 정권은 명칭에 '농민'을 삽입할 경우, 자칫 계급투쟁적 성격이 지나치게 강해진다고 판단해 이를 경계했던 것이다. 여기에는 이선근을 비롯한 당대 관변 어용 사학자들의 조직적인 협조가 지대했다."

이이화 선생의 평처럼, 우금치에 우뚝 선 위령탑은 120년 전 목숨을 바친 농민군들의 넋을 기리는 공간인 동시에, 1970년대 냉전 시기 정권의 정치적 계산과 역사 왜곡의 단면을 고스란히 박제해 둔 또 하나의 역사적 유물이었던 셈이다.

 

(후략…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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