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10일로 동학농민운동 120주년을 맞았다. 120주년 행사를 찾아보았다. 눈에 띄는 행사가 없었다. 아쉬웠다. 지인들과 지난 11일 동학농민운동의 발자취를 찾았다. 그날의 기록을 쓴다.
동학농민운동은 1894년 동학교도 및 농민들에 의해 일어난 민중의 무장 봉기를 가리키며, 크게 1894년 음력 1월의 고부 봉기(제1차)와 음력 4월의 전주성 봉기(제2차)와 음력 9월의 전주·광주 궐기(제3차)로 나뉜다.
당시 농민들은 동학교조 최제우의 신원회복 문제 외에도 기존 조선 양반 관리들의 탐학과 부패, 사회 혼란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다 1882년(고종19년) 전라도 고부군에 부임된 조병갑의 비리와 남형(법에 의거하지 않는 형벌)이 도화선이 되었다. 부패 척결과 내정 개혁, 그리고 동학 교조 신원 등의 기치로 일어선 동학 농민군 중 일부는 흥선대원군, 이준용 등과도 결탁했다. 전봉준은 대원군을 반신반의 하면서도 명성황후와 민씨 세력의 축출을 위해 대원군과 손을 잡았다. 대원군 역시 명성황후의 제거를 위한 무력 집단이 필요했고, 동학 농민군과 제휴하게 된다. 동학 농민군 중 일부는 탐관오리 처벌과 개혁 외에 대원군의 섭정까지도 거병의 명분으로 삼았다.
초기에는 동학난, 동비의 난으로 불리다가 1910년 대한제국 멸망 이후 농민운동, 농민혁명으로 격상되었다.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으로도 불리며, 갑오년에 일어났기 때문에 갑오농민운동(甲午農民運動), 갑오농민전쟁(甲午農民戰爭)이라고도 한다. 동학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민씨 정권에서는 청나라군과 일본군을 번갈아 끌어들이면서 서울 시내 한복판에 외국 군대를 주둔시키는 빌미를 제공하고 이후 청일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일행들과 함께 오전 6시 시흥을 출발했다.
주 답사지인 정읍을 가기 전에 공주부터 들렀다. 동학농민운동의 가장 큰 전투이자 승패의 분수령이 된 결전이 있었던 우금치 전적지를 보기 위해서였다.
| ▲ 송장배미는 농민군의 시체를 한 곳에 모아 매장했던 곳이다. ©최영숙 |
|
우금치 전적지로 가기 전에 송장배미가 있었다. 골프선수 박세리를 배출한 금성여고가 뒤편으로 보였다. 농민군은 우금치를 공격하는 한편 봉황산의 하고개를 넘어 감영의 배후를 치고자 하였다. 그러나 하고개는 천혜의 요새로 계곡을 가득 메운 농민군의 시체만 남긴 채 후퇴하여야 했다. 농민군의 시체를 한 곳에 모아 매장했다고 하는데, 그곳이 바로 송장배미라는 논이다. 얼마나 많은 농민군들의 시신들을 매장했기에 송장배미라는 이름을 붙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 우듬치 전투가 벌어졌던 능선에 쓰러진 조형물 ©최영숙 |
|
송장배미를 지나 우금치 견적지로 향했다.
우금치 견적지에는 동학혁명군위령탑이 있었다. 가까이 보니 탑의 앞부분이 많이 훼손되어 있었다. 탑이 방치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언덕으로 올라갔다. 이곳에도 나무로 만든 조형물들이 쓰러져 있었다. 동학농민혁명 120주년의 쓸쓸함을 보는 듯했다.
우금치 전투는 동학농민혁명의 승패를 가르는 전투였다. 농민군은 무너미 고개와 이인 쪽에서 맞서 관군을 밀어 붙치고 조일 연합군은 모리오 미사이치 대위가 지휘하는 관군을 우금치 옆 벱세울 앞산에 주둔시키고 우금치, 금학동, 곰티, 효포 봉수대에 관군을 배치했다. 농민군은 이 곳을 집중 공격했으나 고갯마루 150m 앞까지 조일 연합군의 우세한 무기의 포탄과 총탄이 비오듯 쏟아져 내려 더이상 진격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기동과 조병완이 농민군의 좌측과 우측을 공격해 농민군은 큰 사상자를 내고 공주 동남쪽 봉우리로 후퇴했다.
농민군 1대가 봉황산으로 진격해 공주감영을 공격하려 했으나 하고개와 금학골 골짜기에서 관군의 공격으로 실패했다. 이로써 농민군은 4일 간의 제2차 접전에서도 패배했다. 우금치전투에서 패배한 동학농민군은 더 이상 싸울 수 없었다. 그 뒤는 일본군의 농민군 대학살전으로 이어졌다.
우금치 전투와 동학농민군의 패배요인은 보유 무기의 열세였다. 당시 농민군의 총은 심지에 불을 붙여 쓰는 화승총으로 사정거리가 불과 100보에 분당 2발을 발사하는 수준인데다 그마저도 갖지 못한 사람은 죽창으로 싸워야 했다. 그에 반해 일본군은 사정거리가 400-500보를 넘고 분당 12발을 쏠수 있는 소총에다 막강한 화력의 미국제 개틀링 기관포로 무장되어 있었다. 기관포 사격을 받고 있는 농민군들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 ▲ 2013년 10월 3일 우금치 동학혁명탑 앞에서 제 1회 우금치 영산재를 지냈다. ©최영숙 |
|
동학혁명군 위령탑을 보고 내려오는 길에 동학혁명군위령탑 아래에 있는 원효사를 들렀다.
해월 주지스님이 차를 대접해 주셨다. 스님은 지난해 10월3일 우금치 동학혁명군위령탑 앞에서 제1회 우금치 영산재를 지냈다. 사진을 보여 주셨다. 주지스님이 제1회 우금치 영산재를 지낸 이유는 "1894년 동학혁명 당시에 희생된 민,관,군 등 수 만 명의 영가를 위로하기 위해 영산재 보유자 어장 보명스님과 영산중재 회원 스님들을 청하여 영산재를 지냈다"라고 말했다. 또한 훼손된 탑의 모습은 대통령 박정희라는 이름을 누군가 정으로 쪼아 버린 것이라고 했다. 제1회 영산재를 안내문에는 탑의 전문이 적혀 있었다.
| ▲ 누군가 정으로 쪼아서 훼손된 우금치 동학혁명탑 ©최영숙 |
|
인내천과 사민평등의 종지아래 후천개벽의 혁명정신으로 무장하고 동학교주 전봉준이 호남의 만석보 기슭에서 수천의 농민군을 편성하여 첫 봉화를 든 것은 갑오(서기 1894년) 정월 10일. 20일께는 다시 대거하여 백산을 점거하고 습격해오는 관군을 격파하면서 승승장구 .4월말에는 전주성까지 함락하게 되니 혁명의 성공이 눈앞에 다가오는 듯하였다.
그러나 청일 양국의 무력간섭 아래 이 나라의 국권마저 위협받게 되자 정부 측이 먼저 화해하기를 청하니 우국애민의 일념에서 동학군은 마침내 양보하여 전주성을 내어주고 그 여력을 지방 조직에만 기울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군국주의 일제의 엄청난 야욕은 돌연 남의 나라 주권을 침해 독점하고자 날뛰게 되니 정녕 국가의 명맥이 통틀어 풍전등화가 되고 말았다. 이에 한동안 후퇴했던 동학군은 드디어 항일 구국의 독립군으로 재무장하고 총궐기하였다,
남북접이 호응 합세하여 20만의 대병력을 논산평야로 집결시키고, 전봉준과 손병희 두 통령의 작전지휘아래 서울까지 진격하는 주요거점으로 공주성부터 공략하게 되었다.
그 결과 10월 하순부터 전개된 공주성의 대공방전은 이 우금치를 중심으로 날이 갈수록 처참하고 가열하게 됐다. 한 고지의 주인을 40~50차례나 바꾸어 가면서 세계전사에 유례없는 격전을 되풀이하였다.
그리하다가 새로 투입된 일본군의 증원부대가 근대의 무서운 살인무기 기관총으로 연속 맹사격을 퍼 붓게 되니 악전고투하기 3일 만에 동학군은 막대한 희생자를 내인 채 전우들의 시산혈하를 넘어서 11월11일 논산방면으로 철수하였다.
대망의 혁명 사업이 여기서 좌절당하고 계속되는 추격과 살육 속에 위국단침조차 알아줄 이 없었다.
그러나 님들이 가신지 80년 .5.16 혁명 이래의 신생조국이 새삼 동학혁명의 순국정신을 오늘에 되살리면서 빛나는 시월 유신의 한 돌을 보내게 된 만큼 우리 모두가 피어린 이 언덕에 잠든 그 님들의 넋을 달래기 위하여 이 탑을 세우노니 오가는 천만대의 후손들이여 그 위대한 혁명정신을 영원무궁토록 이어받아 힘차게 선양하라.
서기 1973.11.11
제자 대통령 박정희
글 문학박사 이선근
글씨 양재한
동학혁명 위령탑 건립위원회 세움
뒷면에는 감사문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었다.
이 나라 이민족을 도탄에서 건져내는 동시에 이미 혼탁해진 조정을 과감하게 바로잡고 보국안민의 대업을 이룩하기 위하여 이 내 목숨을 아낌없이 바친 동학혁명군의 10여만 영령들을 달래고자 이 고장 공주의 갸륵한 이창덕 동덕이 누구보다 앞장서 온 정성을 바치게 되니 천도교 중앙총부는 그 뜻을 더욱 널리 펴서 성취시키기로 결정하고, 금년 6월 25일 이선근 박사를 위원장으로 동학혁명군 위령탑건립위원회를 조직한 다음, 이 사실을 삼가 박정희 대통령 각하께 품신하였던바 대통령 각하께서는 위원회가 앙청한 명예위원장과 제자의 휘호를 기꺼이 수락하시고, 특히 금일봉까지 하사하시어 이일의 거국적인 의의를 더욱 빛내주시었다.
여기에 이 고장 공주의 관민 여러분과 전국 각지의 뜻있는 인사들과 동학의 후예인 천도교인들이 물심양면으로 알뜰한 정성을 모아서 일직이 혁명군의 마지막 결전장이었던 공주읍 우금치 이 자리에 위령탑을 세우기로 마련하고, 지난 9월 21일 기공한지 50일 만에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일을 위하여 크게 진념해주신 박정희 대통령 각하와 회무발전을 보살피며 탑문을 지어주신 이선근 박사는 물론이요, 이 탑의 설계 감수를 맡아주신 정인국교수와 글씨를 써주신 양재한 동덕 여러분께도 우리 천도교를 대표하여 충심으로 감사의 뜻을 표해둔다.
포덕 114년 11월 11일 천도교 교령 최덕신 심고
동학혁명군위령탑 하나에도 우리 민족의 다양한 현대사가 집약되어 있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천도교 교령 최덕신, 사학자 이선근, 이이화의 해석 등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정부의 후원과 금일봉으로 세워진 동학혁명군위령탑에 쓰인 박정희 대통령 이름은 누군가에 의해 파손되었다. 이 또한 기록하는 사람은 안타까웠다. 역사는 그대로 보존되는 것이 최우선이었기 때문이다.
천도교 교령 최덕신은 육군사관학교 교장, 서독주재 대사 등을 지냈고 1986년 아내와 함께 북으로 갔다. 2007년 북한의 애국렬사릉에에 묻혔다. 이 탑을 부수고 다시 세워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이 또한 역사가 아닌가 싶었다. 훼손된 동학혁명군위령탑 행간에는 많은 이야기들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정희 개인의 견해에 힘입은 바가 클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동학접주여서 어릴 적부터 동학에 각인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기념탑 등에 반영되었다. 1963년에는 정부 주도로 황토재에 갑오동학혁명 기념탑이 세워졌고, 1973년에는 정부의 후원으로 천도교에서 공주 우금치에 동학혁명군 위령탑을 건립하였다. 동학혁명이란 용어는 천도교에서도 수용되었다. 따라서 농민은 동학에 끼어들 틈이 없었는데 농민을 삽입하면 계급 투쟁적 성격이 강해진다고 본 것이다. 여기에는 이선근 등 어용사학자들의 협조가 컸다.
-<이이화의 못다 한 한국사 이야기>(푸른역사, 2000) 중에서
<2>편에 계속
 |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