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운동 120주년 답사기 ①] 죽창과 기관포의 처절한 격전지, 공주 우금치와 송장배미를 가다최영숙의 발길 따라 가는 풍경
지난 2014년 1월 10일로 동학농민운동이 발발한 지 어느덧 120주년을 맞았다. 의미 있는 120주년 기념행사를 찾아보았으나, 안타깝게도 눈에 띄는 행사가 없어 무척 아쉬웠다. 결국 뜻을 함께하는 지인들과 함께 지난 11일, 동학농민운동의 치열했던 발자취를 찾아 나섰다. 그날의 기록을 이곳에 쓴다.
동학농민운동은 1894년 동학교도들과 농민들에 의해 일어난 민중의 반봉건·반외세 무장 봉기를 가리킨다. 이는 크게 1894년 음력 1월의 고부 봉기(제1차)와 음력 4월의 전주성 봉기(제2차), 그리고 음력 9월의 전주·광주 총궐기(제3차)로 나뉜다.
당시 농민들은 동학 교조 최제우의 신원(伸冤, 억울함을 풂) 회복 문제 외에도, 기존 조선 양반 관리들의 끊임없는 탐학과 부패, 사회적 혼란에 대한 불만이 극에 달한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1892년(고종 29년) 전라도 고부군으로 부임해 온 군수 조병갑의 가혹한 수탈과 남형(濫刑, 법에 의하지 않은 형벌)이 결정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부패 척결과 내정 개혁, 보국안민의 기치로 일어선 동학 농민군 중 일부는 권력 중심에서 밀려나 있던 흥선대원군, 이준용 등과도 은밀히 결탁했다. 전봉준은 대원군을 반신반의하면서도 명성황후와 민씨 세력을 축출하기 위해 손을 잡았다. 대원군 역시 명성황후를 제거할 강력한 무력 집단이 필요했기에 동학 농민군과 제휴하게 된다. 이에 따라 동학 농민군 중 일부는 탐관오리 처벌과 개혁 외에 '대원군의 섭정 환원'까지도 거병의 명분으로 삼았다.
초기에는 조정에 의해 '동학난', '동비(東匪)의 난'으로 격하되어 불리다가, 1910년 대한제국 멸망 이후에야 '농민운동', '농민혁명'으로 제 이름을 찾으며 격상되었다. 오늘날에는 '동학농민혁명'으로도 널리 불리며, 갑오년에 일어났기에 '갑오농민운동' 혹은 '갑오농민전쟁'이라고도 한다. 당시 동학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민씨 정권은 청나라군과 일본군을 번갈아 가며 끌어들였다. 이는 결국 한반도 한복판에 외국 군대를 주둔시키는 빌미를 제공했으며, 나아가 청일전쟁이 발발하게 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이른 새벽, 일행들과 함께 오전 6시에 시흥을 출발했다. 이번 여정의 주요 답사지인 정읍으로 가기 전, 우리는 먼저 공주에 들르기로 했다. 동학농민운동 역사상 가장 큰 전투이자 승패의 분수령이 되었던 결전의 현장, '공주 우금치 전적지'를 눈에 담기 위해서였다.
송장배미를 지나 마침내 우금치 전적지에 당도했다. 고갯마루에는 거대한 '동학혁명군위령탑'이 우뚝 서 있었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 보니 탑의 전면부가 날카롭게 훼손되어 있었고, 전반적으로 관리가 되지 않은 채 씁쓸하게 방치되어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언덕 위로 발걸음을 옮기자 그곳 역시 나무로 만든 조형물들이 썩고 쓰러져 나뒹굴고 있었다. 마치 동학농민혁명 120주년이 처한 쓸쓸한 현실을 단면으로 보여주는 듯했다.
우금치 전투는 동학농민혁명의 사활이 걸린 최대의 격전이었다. 농민군은 무너미고개와 이인 방면에서 관군을 강하게 밀어붙였고, 이에 맞선 조·일 연합군은 모리오 미사이치 대위의 지휘 아래 우금치 옆 셉세울 앞산에 본진을 구축했다. 그리고 우금치와 금학동, 곰티, 효포 봉수대에 군대를 촘촘히 배치했다. 농민군은 이 고갯마루를 뚫기 위해 집중 공격을 감행했으나, 고갯마루를 불과 150m 앞둔 상황에서 조·일 연합군의 압도적인 신식 무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포탄과 총탄이 비 오듯 쏟아져 내려 더는 진격하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이기동과 조병완이 이끄는 관군이 농민군의 좌우 측면을 기습 공격하면서 농민군은 엄청난 사상자를 낸 채 공주 동남쪽 봉우리로 후퇴하고 말았다.
농민군 별동대 한 부대가 봉황산을 거쳐 공주감영을 직접 타격하려 시도했으나, 이 역시 하고개와 금학골 골짜기에서 대기하던 관군의 철저한 방어벽에 가로막혀 실패로 돌아갔다. 이로써 농민군은 4일간에 걸친 제2차 접전에서도 처참하게 패배했다. 우금치 전투에서 궤멸적인 타격을 입은 동학농민군은 더는 조직적인 전투를 수행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이후의 역사는 패잔병이 된 농민군을 향한 일본군의 잔혹한 대학살전으로 이어졌다.
우금치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이 패배할 수밖에 없었던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무기의 절대적인 열세였다. 당시 농민군이 가진 주력 화기는 화승총(조총)으로, 심지에 직접 불을 붙여 쏘는 방식이라 사정거리가 불과 100보 안팎이었고 발사 속도도 분당 2발에 불과했다. 그마저도 구하지 못한 대다수의 농민은 대나무를 깎아 만든 죽창 하나에 의지해 싸터로 뛰어들었다. 반면 일본군은 사정거리가 400~500보가 넘고 분당 12발 이상을 사격할 수 있는 최신식 스나이더 소총을 쥐고 있었으며, 심지어 막강한 대량 살상 화력인 미국제 개틀링 기관포까지 구축하고 있었다. 근대식 기관포 사격 앞에 가을 낙엽처럼 추풍낙엽으로 쓰러져 갔을 농민군들의 처절한 모습이 눈앞에 환히 보이는 듯해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동학혁명군위령탑을 둘러보고 내려오는 길에, 탑 바로 아래 자락에 자리한 사찰인 '원효사'에 잠시 들렀다.
원효사의 해월 주지 스님께서 따뜻한 차를 대접해 주시며 귀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스님께서는 지난해 10월 3일, 우금치 동학혁명군위령탑 앞에서 뜻깊은 <제1회 우금치 영산재>를 직접 주관하여 봉행하셨다며 당시의 사진들을 보여주셨다. 주지 스님이 사재를 털어 영산재를 지낸 이유는 "1894년 동학혁명 당시에 이 고갯마루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민군, 관군, 일본군 등 수만 명의 외로운 영가들을 종교의 경계를 넘어 위로하기 위해서"였다고 했다.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영산재 보유자인 어장 보명 스님과 영산재보존회 회원 스님들을 정중히 청해 격조 높게 의식을 치렀다는 설명이다.
스님은 또한 전면이 심하게 훼손된 위령탑의 상처에 대해서도 언급하셨다. 탑에 새겨진 '대통령 박정희'라는 글자를 역사적 반감을 가진 누군가가 정으로 깊게 쪼아내 훼손한 것이라 전했다.
스님이 보여주신 영산재 안내문에는 다행히 서기 1973년 건립 당시 새겨졌던 탑문의 전문이 온전히 기록되어 있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금치 동학혁명군위령탑 탑문 전문>
공주 우금치에 서 있는 동학혁명군위령탑 하나에도 우리 근현대사의 파란만장한 역사적 소용돌이가 고스란히 집약되어 있었다. 탑의 건립을 주도한 박정희 전 대통령, 훗날 월북하여 북한 땅에 묻힌 천도교 교령 최덕신, 당대의 사학자 이선근, 그리고 이를 비판적으로 거리를 두며 해석한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의 시선까지 수많은 이야기가 이 탑 하나를 둘러싸고 교차하고 있었다.
정부의 적극적인 후원과 금일봉으로 세워진 위령탑이지만, 세월이 흘러 권력자의 이름이 정으로 파헤쳐진 이 상처투성이 탑을 바라보며 기록가로서 깊은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정치적 호오를 떠나 역사적 유물은 그 시대의 명암을 있는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 최우선 가치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천도교 교령을 지낸 최덕신은 육군사관학교 교장과 서독 주재 대사 등을 지낸 남한의 고위 인사였으나 1986년 아내와 함께 돌연 월북했고, 2007년 사망 후 북한의 애국렬사릉에 묻힌 파격적인 인물이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유신 정권의 잔재이자 변절자의 흔적이 남은 이 탑을 허물고 완전히 새로 세워야 한다는 거친 주장을 펴기도 한다. 하지만 필자의 생각은 다르다. 쪼아지고 파헤쳐진 훼손된 모습 그 자체도, 탑문 행간에 숨겨진 유신의 역사도 결국 우리가 마주해야 할 엄연한 '역사의 한 장면'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은 그의 저서 《이이화의 못다 한 한국사 이야기》를 통해 이 위령탑의 탄생 배경과 '동학혁명'이라는 명칭 속에 숨겨진 이데올로기를 다음과 같이 날카롭게 짚어냈다.
이이화 선생의 평처럼, 우금치에 우뚝 선 위령탑은 120년 전 목숨을 바친 농민군들의 넋을 기리는 공간인 동시에, 1970년대 냉전 시기 정권의 정치적 계산과 역사 왜곡의 단면을 고스란히 박제해 둔 또 하나의 역사적 유물이었던 셈이다.
(후략… 2편에 계속) <저작권자 ⓒ 시흥장수신문(시민기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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