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박완서 선생의 마지막 여정,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최영숙 | 기사입력 2011/01/26 [08:14]

소설가 박완서 선생의 마지막 여정,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최영숙 | 입력 : 2011/01/26 [08:14]
▲ 소설가 박완서 장례미사 후 토평동 성당을 떠나 장지로 향하다     ⓒ 최영숙

 

"저희 어머니께서는 2011년 1월 22일 오전 5시 구리시 아천동 자택에서 온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영면에 드셨습니다. 편안하고도 고요하게 가셨습니다. 어머니께서 평소 좋아하시던 사진으로 영정을 모셨습니다."

 

2011년 1월 25일, 소설가 박완서(80) 선생의 발인이 서울삼성병원에서 오전 8시 40분에 있었다. 빈소에 일찍 도착했다. 입구에 가족이 쓴 안내 글을 보며 고맙고 마음이 편안해졌다. 혹여 고인이 마지막 떠나는 길에 고통이 심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걱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 영정사진     ⓒ최영숙


 기사로 영정 사진을 처음 보았을 때, "아, 정말 저분의 평소 모습을 그대로 닮은 가장 좋은 사진을 골랐구나" 싶었는데, 고인이 생전에 가장 좋아한 사진이라는 말에 고개가 저절로 끄덕여졌다.

 

박완서 선생은 1931년 경기도 개풍에서 태어났다. 1970년 40세의 나이에 '나목'으로 등단했으나 그 후 작품 활동은 더욱 왕성했다. '휘청거리는 오후', '서 있는 여자',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미망',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아주 오래된 농담', '그 남자네 집' 등을 펴냈다.

 

▲ 소설가 박범신 조의를 표하다     ⓒ 최영숙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는 작가가 자화상을 그리듯 쓴 글이라고 했다. 책을 읽으면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살아나는 시골 풍경들 덕분에, 마치 그 장소에서 작가와 또래 동무가 되어 함께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서울 아이들은 소나기가 하늘에서 오는 줄 알겠지만 우리는 저만치 앞벌에서 소나기가 군대처럼 쳐들어온다는 걸 알고 있었다. 우리가 노는 곳은 햇빛이 쨍쨍하건만 앞벌에 짙은 그림자가 짐과 동시에 소나기의 장막이 우리를 향해 쳐들어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우리는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기성을 지르며 마을을 향해 도망치기 시작한다. 그 장막이 얼마나 빠르게 이동하나를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죽자꾸나 뛴다. 불안인지 환희인지 모를 것으로 터질 듯한 마음을 부채질하듯이 벌판의 모든 곡식과 푸성귀와 풀들도 축 늘어졌던 잠에서 깨어나 일제히 웅성대며 소요를 일으킨다. 그러나 소나기의 장막은 언제나 우리가 마을 추녀 끝에 몸을 가리기 전에 우리를 덮치고 만다. 채찍처럼 세차고 폭포수처럼 시원한 빗줄기가 복더위와 달음박질로 불화로처럼 단 몸뚱이를 사정없이 후려치면 우리는 드디어 폭발하고 만다. 아아. 그건 실로 폭발적인 환희였다. 우리는 하늘을 향해 미친 듯한 환성을 지르며 비를 흠뻑 맞았고, 웅성대던 들판도 덩달아 환희의 춤을 추었다. 그럴 때 우리는 너울대는 옥수수나무나 피마자나무와 자신을 구별할 수가 없었다. 환희뿐 아니라 비애도 자연으로부터왔다."

   "내가 최초로 맛본 비애의 기억은 앞뒤에 아무런 사건도 없이 외따로인 채 다만 풍경만 있다. 엄마 등에 업혀 있었다. 막내라 커서도 어른들에게 잘 업혔으니 다설 살 때쯤이 아니었을까. 저녁노을이 유난히 새빨갰다. 하늘이 낭자하게 피를 흘리고 있는 것 같았다. 마을의 풍경은 어둡지도 밝지도 않고 그냥 딴 동네 같았다. 정답던 사람도 모닥불을 통해서 보면 낯설듯이. 나는 참을 수가 없어서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는 내 갑작스러운 울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나 또한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건 순수한 비애였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중에서

어린 날 뒤란에 있던 감나무 위로 가끔 혼자 올라가서, 멀리서 언니와 친구들이 노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괜히 그 놀이에 낄 수가 없었던, 버림받은 듯한, 혼자 알 수 없는 쓸쓸한 날들을 보냈기에 책을 읽으면서 그 계집아이가 남같이 보이지 않았던 기억이 새롭다. 마치 내 이야기 같기도 하고, 누구나 다 그런 우습지만 알 수 없는 슬픔을 느끼는 날들이 있다며 어깨를 토닥여 위로를 해주는 듯했다.

 

'도둑맞은 가난'은 마음을 아프게 하고 책장을 덮고도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그 후 커다란 멸치의 눈동자를 보면 박완서 선생의 '도둑맞은 가난'이 생각났다.

 

▲ 장례식장에서 출간 예절을 하다     ⓒ 최영숙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에서 출관 예절이 엄수되었다. 유족들은 어머니를 떠나보내며 오열했다.
 

▲ 구리 토평동 성당에 들어서다     ⓒ최영숙


타인에게 폐 끼치는 것을 싫어했던 고인은 자녀들에게 "부의금을 받지 말라"고 유언했다. 장례 또한 평소 다니던 성당에서 가족장으로 치르도록 했다. 구리 토평동 성당에서 오전 10시에 장례 미사가 열렸다.

 

▲ 토평동성당에서 장례미사를 하다     ⓒ 최영숙

 

장례 미사가 경건하게 진행되었다. 지인들과 교우들은 고인의 길이 평안하기를 기도했다. 미사를 집전한 김성길 신부는 다음과 같이 강론했다.

 

"고인은 시골 장터에서 만나는 여인의 웃음을 가지셨습니다. 고인의 삶을 보며 그분에게 반해 책을 읽었고 행복했습니다. 고인은 세상 떠날 때 우아하게 가고 싶어서 종교를 택했다고 하셨습니다. 마지막 여정은 저를 비롯하여 모든 이가 기도드립니다. 이제 화해의 시간을 가집니다. 어머니는 소박하고 거룩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또한 불완전한 사람이기에 부족함이나 서운함이 있을 수 있습니다. 또한 자녀들이 어머니에게 드렸던 잘못 또한 겸손히 침묵하는 가운데 화해하시기 바랍니다."

 

 

가족이기에 가장 사랑이 깊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들도 모르게 서로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는 법이다. 미처 잊고 있었던 가족 간의 관계를 다시금 생각나게 하는 말씀이었다.

 

▲ 성당에서 장례미사를 치루다     ⓒ 최영숙

 

고인은 당신이 사랑했던, 또한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들과 (비록 당신은 번거로움을 싫어하셨지만) 여러 방송 매체의 취재 경쟁으로 조금은 소란스러워진 당신의 장례식을 어떤 마음으로 내려다보고 계실까 싶었다.

 

▲ 이해인 수녀의 추도사     ⓒ 최영숙


  유종호 평론가, 정호승 시인, 이해인 수녀 등이 추도사를 했다.

 

유종호 평론가는 "왼손이 모르게 오른손으로 좋은 일을 많이 하셨다. 임종 직전까지 깨어 있었던 분이다. 아들을 잃고 극복하셨느냐고 여쭤봤을 때 '극복하는 것이 아니고 견디는 것이다'라고 하셔서, 세상의 일들을 얼마나 견디며 사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이해인 수녀는 “눈 오는 날 눈꽃처럼 깨끗하고 순결하게 한 생을 마무리한 우리의 어머니를, 이 세상에 계실 때보다 더 행복하게 해주시길 바란다”고 기도했다.

 

▲ 토평동 성당에서 용인천주교 공원묘지로 운구 떠나다     ⓒ최영숙


토평동 성당에서 가족장으로 경건하게 장례 미사를 지냈다. 운구는 장지인 용인 천주교 공원 묘지로 향했다.
 

▲ 고인이 토평동 성당에 기증한 책들     ⓒ 최영숙


 토평동 성당 1층 쉼터에는 고인이 기증한 책들이 나란히 꽂혀 있었다.
 

300여 명의 조문객과 마지막 인사를 나눈 고인은 장지로 떠났다.

 

▲  장지로  떠나다     ⓒ 최영숙


사진 속 고인은 활짝 웃고 계셨다.
 

▲ 장지로 운구하다     ⓒ 최영숙


용인 천주교 공원 묘지에 도착했다. 평소 존경하던 故 김수환 추기경의 묘소가 건너편에 보였다. 눈이 소복이 쌓인 묘역은 바람도 자고 날씨가 참으로 따뜻했다.

 

▲ 층계를 내려오다     ⓒ 최영숙


 비탈진 길을 따라 운구 행렬이 길게 이어졌다. 사람들은 천천히, 조심스럽게 발을 뗐다.
 

▲ 장지로 내려오는 운구 행렬     ⓒ 최영숙


  장지로 내려오는 운구 행렬이 길게 이어졌다.
 

▲ 운구 도착하다     ⓒ 최영숙


  운구가 도착했다. 
  

▲ 하관식을 하다     ⓒ 최영숙


  인부들이 하관을 했다. 
 

▲ 관이 덮히다     ⓒ 최영숙


'朴氏정혜엘리사벳之墓'라고 쓰인 명정이 덮이고 칠성판이 놓였다.
 

▲ 기도하는 사람들     ⓒ 최영숙


 장지에 모인 이들은 송가를 부르며 고인의 안식을 빌었다.
 

▲ 어머니에게 국화꽃을 드리다     ⓒ 최영숙


 마지막으로 국화꽃 한 송이를 바치며 유족들은 다시 한번 오열했다. 
 

▲ 마지막 절을 드리다     ⓒ 최영숙


상주 호원숙 씨가 어머니께 마지막 절을 올렸고, 이해인 수녀와 가족들의 흐느낌이 묘역에 가득했다.
 

▲ 장지를 가득 메운 사람들     ⓒ 최영숙


  유족을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보았다. 
 

▲ 고인의 아들 원태의 묘를 가족들이 돌보다     ⓒ 최영숙

 

고인의 무덤 아래에는 아들이 묻혀 있었다. 남편을 병으로 잃고 3개월 후, 서울대 레지던트 과정에 있던 외아들 원태 씨가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장대 같은 자식을 가슴에 묻고 고인은 하느님을 원망했다고 한다. 자식을 잃은 슬픔에 대해 고인은 "극복하는 것이 아니고 견디는 것"이라고 말했다.

 

아들의 묘비에는 "평생 인간과 의학과 연극을 사랑하다 간 젊고 아름다운 영혼 여기 잠들다"라고 적혀 있었다. 맏사위 황창윤 씨는 어르신이 그 깊은 고통 중에도 묘비명을 이렇게 적으라고 일러 주셨다고 전했다. 가족들은 어머니를 장지에 모신 후, 동생의 묘소도 함께 정성껏 정리해 주었다.

 

▲ 묘소에서 인사를 나누는 사람들     ⓒ 최영숙

 

전윤옥(78) 씨는 "평생 허영이 없고 검소하셨다. 남한테 절대 싫은 소리 안 하고 불만도 없이, 그렇게 천생 착하고 살림도 잘할 수가 없었다"고 회고했다.

 

사랑도에서 올라온 고인의 친정 사촌 동생 박계서(74) 씨는 "너무 속상하고 울화가 치민다"며 안타까운 마음을 전했다.

 

'엄마의 말뚝'이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보면 교육열이 대단했던 고 박완서 선생의 친정어머니 이야기가 나온다. 경기도 개풍에서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고인과 친정어머니는 어떤 분이셨는지 여쭈어보았다.

 

"큰엄마는 정말 교육열이 대단하셨다. 그리고 이야기를 어찌나 재미있게 하시는지 큰엄마랑 있으면 종일 웃었다. 언니는 어렸을 때 참 재밌었다. '나는 노래는 못한다, 그래도 100점은 맞았다'고 자랑하곤 했다. 언니는 아들을 잃고 마음의 상처가 컸다. 아들, 딸, 사위, 형부까지 어쩜 그렇게 맞추기도 힘들다 싶을 정도로 좋은 사람들을 만났고 서로 참 잘했다. 형부가 무관심한 듯하면서도 언니 뒷바라지를 참 잘했다. 한번은 부곡온천에 갔다가 형부를 만난 적이 있다. 형부 혼자 있기에 언니는 어디 있느냐고 물었더니 '언니는 다방에서 글을 쓰고 있다'고 하더라. 그때가 '나목'으로 등단하고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부부가 함께 여행을 왔다가 아내가 글을 쓰게 되니 남편은 혼자 산책을 하며 기다려 준 것이다. 형부와 언니는 참으로 서로에게 잘했다"고 친정 사촌 동생은 기억했다.

 

▲ 고인에게 인사를 하다     ⓒ 최영숙


 
장례 현장에는 고인이 살아온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한 젊은 여인이 "이렇게 사랑받고 떠나는 삶을 살고 싶다"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마음에 화롯불이 펴졌다. 이분의 책을 읽으며 위로받았던 그 따스함이 이런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 장지를 떠나는 유족들     ⓒ 최영숙


 문학인의 어머니라 불린 고인은 마지막 순간까지 타인을 배려했고, 그 자녀들 또한 어머니의 유지를 정갈하게 이어가고 있었다.

 

▲ 장례를 마치고 돌아오다     ⓒ 최영숙


  세 명의 외손이 위패와 영정, 훈장을 들고 할머니의 마지막 길을 끝까지 모셨다.

 

▲ 식사를 하다     ⓒ 최영숙


  점심은 2시 넘어서 들었다. 유족들이 장지에 온 손님들에게 식사를 대접했다. 
 

▲ 장례미사     ⓒ 최영숙

  

고 박완서 소설가는 생전에 한국문학작가상, 이상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현대문학상, 동인문학상, 만해문학상, 황순원문학상을 받았다. 또한 사후에는 문화예술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

 

▲ 위로하다     ⓒ 최영숙


  위로와 위안을 주고 소설을 읽으면 깊으면서도 잔잔한 감동을 주었던 고 박완서 선생은, 한 세상을 정갈하고 깔끔하게 살아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글과 평소의 생활 속에 인품이 함께 스며있던 문학인들의 어머니를 떠나보냈다. 좀 더 살아 계셨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깊었다. 그러면서도 이미 삶 속에서, 또 사후에도 모든 것을 이루었다는 마음이 또한 들었다.

 

돌아오면서 그분이 떠난 날, "그해 겨울은 따뜻했다"라는 느낌이 강하게 남았다. 사진을 담으면서도 거추장스러운 장갑과 목도리를 풀게 할 만큼, 바람도 없고 햇살이 따스하게 내리쬐던 용인 천주교 공원 묘지는 온화했다.

 

故 박완서 선생의 영면을 기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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