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 어머니께서는 2011년 1월 22일 오전 5시 구리시 아천동 자택에서 온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영면에 드셨습니다. 편안하고도 고요하게 가셨습니다. 어머니께서 평소 좋아하시던 사진으로 영정을 모셨습니다."
2011년 1월 25일, 소설가 박완서(80) 선생의 발인이 서울삼성병원에서 오전 8시 40분에 있었다. 빈소에 일찍 도착했다. 입구에 가족이 쓴 안내 글을 보며 고맙고 마음이 편안해졌다. 혹여 고인이 마지막 떠나는 길에 고통이 심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걱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박완서 선생은 1931년 경기도 개풍에서 태어났다. 1970년 40세의 나이에 '나목'으로 등단했으나 그 후 작품 활동은 더욱 왕성했다. '휘청거리는 오후', '서 있는 여자',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미망',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아주 오래된 농담', '그 남자네 집' 등을 펴냈다.
어린 날 뒤란에 있던 감나무 위로 가끔 혼자 올라가서, 멀리서 언니와 친구들이 노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괜히 그 놀이에 낄 수가 없었던, 버림받은 듯한, 혼자 알 수 없는 쓸쓸한 날들을 보냈기에 책을 읽으면서 그 계집아이가 남같이 보이지 않았던 기억이 새롭다. 마치 내 이야기 같기도 하고, 누구나 다 그런 우습지만 알 수 없는 슬픔을 느끼는 날들이 있다며 어깨를 토닥여 위로를 해주는 듯했다.
'도둑맞은 가난'은 마음을 아프게 하고 책장을 덮고도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그 후 커다란 멸치의 눈동자를 보면 박완서 선생의 '도둑맞은 가난'이 생각났다.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에서 출관 예절이 엄수되었다. 유족들은 어머니를 떠나보내며 오열했다.
장례 미사가 경건하게 진행되었다. 지인들과 교우들은 고인의 길이 평안하기를 기도했다. 미사를 집전한 김성길 신부는 다음과 같이 강론했다.
"고인은 시골 장터에서 만나는 여인의 웃음을 가지셨습니다. 고인의 삶을 보며 그분에게 반해 책을 읽었고 행복했습니다. 고인은 세상 떠날 때 우아하게 가고 싶어서 종교를 택했다고 하셨습니다. 마지막 여정은 저를 비롯하여 모든 이가 기도드립니다. 이제 화해의 시간을 가집니다. 어머니는 소박하고 거룩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또한 불완전한 사람이기에 부족함이나 서운함이 있을 수 있습니다. 또한 자녀들이 어머니에게 드렸던 잘못 또한 겸손히 침묵하는 가운데 화해하시기 바랍니다."
가족이기에 가장 사랑이 깊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들도 모르게 서로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는 법이다. 미처 잊고 있었던 가족 간의 관계를 다시금 생각나게 하는 말씀이었다.
고인은 당신이 사랑했던, 또한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들과 (비록 당신은 번거로움을 싫어하셨지만) 여러 방송 매체의 취재 경쟁으로 조금은 소란스러워진 당신의 장례식을 어떤 마음으로 내려다보고 계실까 싶었다.
유종호 평론가는 "왼손이 모르게 오른손으로 좋은 일을 많이 하셨다. 임종 직전까지 깨어 있었던 분이다. 아들을 잃고 극복하셨느냐고 여쭤봤을 때 '극복하는 것이 아니고 견디는 것이다'라고 하셔서, 세상의 일들을 얼마나 견디며 사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이해인 수녀는 “눈 오는 날 눈꽃처럼 깨끗하고 순결하게 한 생을 마무리한 우리의 어머니를, 이 세상에 계실 때보다 더 행복하게 해주시길 바란다”고 기도했다.
300여 명의 조문객과 마지막 인사를 나눈 고인은 장지로 떠났다.
고인의 무덤 아래에는 아들이 묻혀 있었다. 남편을 병으로 잃고 3개월 후, 서울대 레지던트 과정에 있던 외아들 원태 씨가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장대 같은 자식을 가슴에 묻고 고인은 하느님을 원망했다고 한다. 자식을 잃은 슬픔에 대해 고인은 "극복하는 것이 아니고 견디는 것"이라고 말했다.
아들의 묘비에는 "평생 인간과 의학과 연극을 사랑하다 간 젊고 아름다운 영혼 여기 잠들다"라고 적혀 있었다. 맏사위 황창윤 씨는 어르신이 그 깊은 고통 중에도 묘비명을 이렇게 적으라고 일러 주셨다고 전했다. 가족들은 어머니를 장지에 모신 후, 동생의 묘소도 함께 정성껏 정리해 주었다.
전윤옥(78) 씨는 "평생 허영이 없고 검소하셨다. 남한테 절대 싫은 소리 안 하고 불만도 없이, 그렇게 천생 착하고 살림도 잘할 수가 없었다"고 회고했다.
사랑도에서 올라온 고인의 친정 사촌 동생 박계서(74) 씨는 "너무 속상하고 울화가 치민다"며 안타까운 마음을 전했다.
'엄마의 말뚝'이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보면 교육열이 대단했던 고 박완서 선생의 친정어머니 이야기가 나온다. 경기도 개풍에서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고인과 친정어머니는 어떤 분이셨는지 여쭈어보았다.
"큰엄마는 정말 교육열이 대단하셨다. 그리고 이야기를 어찌나 재미있게 하시는지 큰엄마랑 있으면 종일 웃었다. 언니는 어렸을 때 참 재밌었다. '나는 노래는 못한다, 그래도 100점은 맞았다'고 자랑하곤 했다. 언니는 아들을 잃고 마음의 상처가 컸다. 아들, 딸, 사위, 형부까지 어쩜 그렇게 맞추기도 힘들다 싶을 정도로 좋은 사람들을 만났고 서로 참 잘했다. 형부가 무관심한 듯하면서도 언니 뒷바라지를 참 잘했다. 한번은 부곡온천에 갔다가 형부를 만난 적이 있다. 형부 혼자 있기에 언니는 어디 있느냐고 물었더니 '언니는 다방에서 글을 쓰고 있다'고 하더라. 그때가 '나목'으로 등단하고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부부가 함께 여행을 왔다가 아내가 글을 쓰게 되니 남편은 혼자 산책을 하며 기다려 준 것이다. 형부와 언니는 참으로 서로에게 잘했다"고 친정 사촌 동생은 기억했다.
고 박완서 소설가는 생전에 한국문학작가상, 이상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현대문학상, 동인문학상, 만해문학상, 황순원문학상을 받았다. 또한 사후에는 문화예술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우리는 글과 평소의 생활 속에 인품이 함께 스며있던 문학인들의 어머니를 떠나보냈다. 좀 더 살아 계셨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깊었다. 그러면서도 이미 삶 속에서, 또 사후에도 모든 것을 이루었다는 마음이 또한 들었다.
돌아오면서 그분이 떠난 날, "그해 겨울은 따뜻했다"라는 느낌이 강하게 남았다. 사진을 담으면서도 거추장스러운 장갑과 목도리를 풀게 할 만큼, 바람도 없고 햇살이 따스하게 내리쬐던 용인 천주교 공원 묘지는 온화했다.
故 박완서 선생의 영면을 기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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