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흥예총 테마여행
-철원DMZ안보견학
지난 10월 30일 시흥예총이 주관하는 테마여행 ‘철원DMZ안보견학’이 있었다. 아침 6시 50분 집결지인 시흥시체육관 앞으로 사람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어둑어둑한 새벽공기 속에서 서로 인사를 주고받으며 버스에 올랐다. 7시 정각에 버스가 움직이자 최찬희 시흥예총회장의 짧은 인사말이 있었다.
“오늘 날씨가 춥습니다. 갑자기 기온이 떨어져서 걱정이 됩니다만 다행히 안개가 끼지 않아 여행에는 별 무리가 없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철원에 도착하면 관광해설사가 동행해 안내를 도울 것입니다. 제2땅굴로 들어갈 때는 안전모를 꼭 착용하시길 바라며 회원 모두 안전하게 잘 다녀오길 바랍니다.”
이어 심봉진 사무국장의 일정 안내와 이날 여행을 위해 협찬한 분들의 명단이 불려졌다. 고마운 마음에 박수가 쏟아졌으며 뒤이어 자문위원들과 부회장들의 인사가 있었다.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중에 주최 측에서 준비한 김밥으로 아침을 해결하며 10월의 끝자락에 매달린 차창 밖 풍경에 시선을 빼앗겼다. 들판을 우르르 몰며 겨울로 가는 가을의 발걸음이 빨라지고 있었다. 지난여름 그 무더웠던 시간을 건너온 게 과연 우리가 맞을까, 싶었다.
2시간을 넘게 달려 ‘철원안보관광안내소’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동행하게 된 관광해설사는 “날씨가 춥습니다. 그럼에도 오늘 날씨가 좋아 관광하기에는 별 무리가 없어 보입니다. 버스로 움직이는 동안 여러분들께 철원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라며 인사한 후 전쟁의 피해와 잔해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자 아직도 전쟁을 끌어안고 사는 실향민들이 많은 땅 철원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그이의 말을 듣는데 우리 근대사의 가장 참혹했던 한 지점을 지금 막 통과하고 있다는 생각에 괜히 침울하고 답답하고 슬펐다.
철원의 지형은 중심부를 흐르는 한탄강을 따라 평탄한 용암지대와 산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우리나라의 심장부에 위치해 있다. 또한 휴전선 155(249.4KM)마일 중 43.6(70.2KM)마일이 통과하는 곳으로써 접경지역 중 가장 많은 비무장지대를 차지하고 있다. 철원평야는 재송평과 대야전평을 총칭하는 약 65,000ha의 용암대지평원을 말한다. 재송평은 평강고원 남방지대(학전, 가곡)와 철원 민통선 북방지대(월정, 강산, 중강, 양지, 관우, 외촌, 내포, 월하, 사요, 대마리 등) 전역에 걸친 평원을 총칭한다. 후고구려(태봉)시대의 도읍지인 풍천원(현이북)은 재송평에 자리하고 있으며 대야전평은 현 동송읍 일원(오덕, 이평, 대위, 장흥, 상노리)을 총칭하며 평균표고 220m에 약10,000ha의 평원을 말한다. 대야 즉 낮은 산이 평야를 빙 둘러선 모습이 마치 큰 술잔처럼 보여 지어진 이름인 동시에 넉넉함을 의미한다고 했다. 해설사는 산이 둘러싼 평야가 마치 갑부의 마당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후고구려 시대에는 강무장(군사훈련장)으로도 이용되었으며 조선조 세종대왕은 이 들판에서 사냥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구철원읍은 철원평야의 중심지에 도시가 발달하여 경원선과 금강산 전철이 운행되고 각종 농축산물의 집산과 교류가 번창했던 중부지방의 요충지였으나 한국전쟁으로 인해 완전히 파괴되고 소실된 땅이 됐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후 남한에 뺏기고 나서 김일성이 통곡했다는 철원평야, 전쟁의 기억을 고스란히 품고 있을 들판이 황량하고 을씨년스러웠다. 가혹하고 가차없는 운명의 폭격 앞에 무기력했을 이 땅이, 사람들이,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아도 서늘하고 음울하게 다가왔다.
철원군은 고구려시대에 철원 또는 모을동비라 칭하였다. 신라의 경덕왕시 철성이라 고치고, 그 후 궁예가 기병하여 서기 901년에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풍천원(현 철원군 북면 홍원리)에 정하고 국호를 마진이라 하였으며, 년호를 무태, 성책이라 하고 그 후 수덕만세, 정개라 정하여 18년간 통치하였으며 서기 911년에 국호를 태봉이라 개칭했다. 궁예가 철원에 도읍할 당시 도선(道詵)은 금학산을 진산으로 정하면 삼백년 국운을 예언하였으나, 궁예의 고집이 고암산을 진산으로 정했다고 한다. 그래서였을까. 국운은 18년이 지나 막을 내렸고 고암산의 수목은 죽지 않았는데도 3년간 잎이 나지 않았으며 곰취는 써서 못 먹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흔히들 부르는 ‘철의 삼각지대’란 철원, 김화, 평강 지역이 철의 주산지여서 그렇게 불리었다고 한다. 지명에도 鐵원, 金화, 평鋼 등의 명칭을 사용하였고(平康의 경우, 鋼을 康으로 순화한 것이 아닐까) 궁예가 태봉국을 이곳에 세운 이유라고 한다. 또한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과 중공군이 원산에서 추가령을 넘어 교통의 중심지인 이 지역에 대포, 포탄, 탄약 등을 집결시켜 남쪽의 의정부, 파주, 서울 등의 전선으로 배송하였기에 미군과 UN군이 이 지역을 ‘철의 삼각지’라 불렀던 데서 연유한다고도 한다.
해설사가 들판에 세워진 굴렁쇠 같은 구조물을 가리키며 북한의 전파를 차단하기 위한 ‘전파차단기’라고 일러줬다. 그만큼 북한과의 거리가 멀지 않았음을 실감나게 했다. 또한 길 양쪽으로 보이는 시멘트 구조물은 이곳이 군사도로이며 접경지역이 가까운 곳이라는 걸 다시 한 번 일깨웠다. 유사시 전쟁이 나면 그 구조물을 무너뜨려 도로를 차단함으로써 조금이나마 시간을 벌기 위한 장치라고 했다. 해설을 듣는 동안 버스는 ‘DMZ철새평화타운’ 양지리 철새마을로 들어섰다. 이곳이 원래 민간인 통제구역인 ‘양지리통제소’였으나 지금은 초소가 뒤로(북한 쪽) 더 물러났다고 했다. 비무장지대가 가까워질수록 괜히 심장 박동 수가 빨라지는 것 같았다. 냉혹한 현실 앞에 신념을 위해, 생존을 위해, 전쟁의 한가운데로 내몰렸을 수많은 젊은이들의 피가 눈앞에 흥건하게 펼쳐졌다. 또한 남편을, 자식을, 전쟁터에서 잃은 수많은 여인들의 신산한 삶도 어렴풋이 떠올랐다. 전쟁의 비정함과 알 수 없는 연민이 뒤섞이며 먹먹해졌다.
멀리 보이는 북녘의 오성산은 한국전쟁 발발 일 년쯤 지나, UN군과 국군이 ‘파일 드라이버 작전(Pile Driver Operation)’을 수행하는데, 철원-김화-양구-간성을 잇는 선으로 부대를 진격시켜 남쪽의 전선을 북상시키는 것으로, 철원의 백마고지 전투, 펀치보울(Punch Bowl)의 도솔산 전투, 설악산의 한석산과 매봉산 전투 등과 함께 저격능선 전투(Sniper Ridge)가 벌어졌던 곳으로 가장 치열한 전투가 있었던 곳 중 한 곳이었다. 저격능선 전투란 국군 제 2사단이 1952년 10월부터 42일간 김화 저격능선을 놓고 중공군과 수행한 고지전을 일컫는다. 작전 이후, 북한군이 UN군과 휴전회담을 진행하면서, 김일성의 "철원의 오성산은 1개 군단을 준다고 해도 바꿀 수 없다."는 지시에 따라 휴전의 조건으로 철의 삼각지대의 북쪽 평강지역을 북한군이, 남쪽 철원, 김화 지역을 UN군과 국군이 나누어 관할하기로 하고 현재의 분사분계선(MDL: Military Demarcation Line)을 확정하여 휴전협정을 맺게 되었다. 그 휴전협정으로 인해 서해안에서 동해안에 이르기까지 약 3억 평에 달하는 넓이의 땅이 ‘비무장지대’란 이름을 달고 지금까지 유배 아닌 유배자의 신세가 되어 있다. 북한의 오성산은 지금 현재 전쟁 준비가 다 끝나 있는 산이라고 한다. 이 산엔 많은 동굴과 북한군이 판 땅굴에 비행기 격납고, 1개 연대의 수용 시설, 무기고, 탄약고 등을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전쟁이 휴전된 지 벌써 60년 이상이 지났건만 여전히 우리의 삶은, 현실은, 내일은, 아슬아슬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 아슬아슬함 속에서도 삶은 계속되고 피로 물든 역사의 흔적들은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
버스 왼쪽으로 보이는 들판에 천연기념물인 두루미가 보였다. 일명 학이라고 불리는 새다. 두루미는 세계적으로 15종이 있으며 겨울마다 우리나라를 찾아오는 두루미는 3종류인데 그 중 2종류가 철원을 찾는다는 해설사의 설명을 들었다. 더불어 멀리 산과 들에 세워진 빨간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는데 항공기의 ‘월경방지 표지판’이라고 했다. 한가로운 두루미와 월경방지 표지판이 전혀 이질적인 모습인데도 또 그 풍경이 조화를 이룬 듯 느껴지는 이 느낌은 뭘까, 싶었다. 평화로운 땅 깊숙이 들어앉은 전쟁, 몸속 기생충처럼 그 이물감이 머릿속에서 자꾸만 꿈틀거렸다.
철원의 다양한 해설을 듣는 사이 제 2땅굴 앞에 도착했다. 군사분계선 비무장지대에서 발견된 ‘철원제2땅굴’은 북한의 남침용 땅굴로써 견고한 화강암층으로 이루어진 지하 50m~160m 지점에 위치해 있다. 굴속으로 들어서자 습한 공기가 온몸을 감쌌다. 북한 쪽 방향을 향해 맑은 물이 흐르고 천장에서도 물이 뚝뚝 떨어졌다. 한참을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 땅굴은 북한에서 군사분계선까지 2,400m, 군사분계선에서 남한 쪽으로 1,100m로 뻗은, 무려 총 3,500m 길이에 달한다. 어느 국군 초병이 경계근무 중 땅속에서 울리는 폭음을 듣고 땅굴을 의심하게 되었다고 하며 시추작업으로 땅굴의 존재를 확인했다고 한다. 수십 일 간의 끈질긴 굴착 작업 끝에 1975년 3월 19일, 우리나라 지역에서는 두 번째로 이 땅굴을 발견했다. 땅굴의 규모는 높이 2m 정도의 아치형 터널로써 시간당 중무장한 병력 약 3만 명의 대규모 병력 침투가 가능하도록 특수 설계돼 있어 북한의 도발 현장임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같은 민족끼리 온 나라를 피비린내로 뒤덮은 전쟁으로도 모자라는 그 무엇이 남았을까, 그 참혹한 비극을 넘어서야 할 것이 또 뭐가 있어 땅굴까지 판 것일까, 싶었다. 인간 욕망이 낳은 피도 눈물도 통하지 않는 비정함의 극치, 알 수 없는 불안과 상실이 낳은 거대한 광기의 현장이 거기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광기의 현장인 제2땅굴은 철의삼각전적지 개발 계획에 따라 안보 여행지로 개발되었으며 해마다 많은 여행객들이 찾고 있다.
제2땅굴을 벗어나 모노레일카를 타고 ‘평화전망대’에 오르는 동안 왼쪽의 저수지가 눈에 들어왔다. 저수지가 마치 가을 햇살을 받아 퍼덕이는 거대한 한 마리 물고기 같았다. 국내 최대의 저수지인 토교저수지, 철원평야를 살찌우며 물고기가 많다고 한다. 전망대에서는 대형 화면으로 근처의 지명과 지형, 전쟁 당시의 상황을 들었다. 또한 당시 치열했던 한국전쟁을 상상하며 멀리 보이는 김일성고지와 휴전선 비무장지대(DMZ) 낙타봉 고지와 평강고원. 북한 선전마을을 눈으로 훑었다. 먼 시선으로 저 북녘 땅에서 여전히 고통 받고 있을 알 수 없는 이들에게 마음으로 안부를 물었다.
다시 버스를 타고 ‘월정리역’으로 이동했다. 경원선의 간이역이었던 월정리역은 남방한계선이 가장 근접한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철원안보관광의 대표적인 경유지라고 한다. 월정리라는 지명은 아주 먼 옛날 강원도 산골마을에 이름 모를 병으로 고생하는 아버지와 소녀가 살고 있었으며, 소녀는 아버지 병환을 낫게 해 달라고 밤마다 달에게 빌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밤 소녀가 달에게 소원을 빌다가 깜박 잠이 들었다. 꿈에 달신이 나타나 “집 뒤에 가 보면 바위가 있는데 바위 밑에 물이 고여 있을 것” 이라며 “달이 지기 전에 그 물을 손으로 떠서 아버지에게 천 모금을 먹이면 병이 나을 것”이라고 말했다. 잠에서 깨어난 소녀는 집 뒤 아주 작은 우물을 발견하고 달신의 말대로 정성스럽게 두 손으로 물을 떠다 수백 번 아버지의 입에 넣었다고 한다. 소녀는 물을 떠 나르느라 넘어지고 나뭇가지에 살을 찢겨 피가 나는데도 아버지 병을 고치기 위한 일념으로 열심히 물을 떠다 아버지에 먹였다. 천 번째 물을 떠다 먹이는 순간 아버지는 병이 완쾌되고, 달은 서산으로 기울었으나 기진맥진한 소녀는 그만 쓰러져 세상을 뜨고 말았다고 한다. 그 후 마을 사람들은 바위 아래 우물을 '달의 우물(月井)'이라 부르고, 마을 이름도 월정리(月井里)라 불렀다고 한다. 지금은 폐역이 된 월정리역 앞 동판에 새겨진 전설이 가슴에 오래 남았다. 오래된 전설이 살벌하고 불안한 땅에 대한 느낌과는 또 다른 아픔으로 다가왔다.
| ▲ 월정리역의 녹슨 철로와 객차 잔해들 ©최영숙 |
|
월정리역에는 객차 잔해가 오래된 동물의 뼈처럼 흉물스럽게 남아 있고 ‘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팻말이 분단의 역사를 선명하게 되새기고 있었다. 경원선은 한일합방 이후 일제가 당시 러시아(구소련)의 10월 혁명으로 추방된 러시아인을 고용하여 1914년 8월 강원도 내에서 제일 먼저 설치하였다고 한다. 서울에서 원산까지 221.4km를 연결한 산업철도로써 철원에서 생산되는 농산물과 원산의 해산물 등을 수송하는 간선철도 역할을 했다고 한다. 월정리역 옆 두루미관 2층에는 철원지역이 철새도래지가 된 배경과 번식지와 월동지를 오가는 철새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3층 두루미관은 천연 샘물이 겨울에도 얼지 않고 솟아나는 샘통과 철원평야를 재현, 민통선을 찾아오는 두루미, 독수리 등 희귀조류를 직접 관찰해 볼 수 있다. 전시된 조류와 동물들은 철원군청과 철원군 조류보호협회에서 보유하고 있는 박제로 관람객들에게 사실감을 안겨준다. 박제는 약 50종 90여점에 이른다.
버스는 다시 움직여 ‘노동당사’로 이동했다. 노동당사는 해방 후부터 6.25 전까지 사용한 북한 노동당 철원군 당사로 현재는 건물이 포탄을 맞아 군데군데 구멍 뚫린 골조가 전쟁의 참상을 증언하며 묵묵히 서 있었다. 해방 후 북한이 공산정권 강화와 국민통제를 위해 건립한 노동당사는 건물을 지을 당시 건축비로 1개 동리당 백미 200가마씩 착취했다고 한다. 철원, 김화, 평강, 포천 일대를 관장하면서 양민수탈 등 수많은 만행을 저질렀던 현장이기도 하다. 그 죄업을 뒤로 한 채 지금은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제22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고 한다. 앙상하게 남은 구조물이 인간이 벌인 이념의 대립이 얼마나 허약하고 공허하며 또한 잔인한 것인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동당사 관람 후 ‘고석정’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고석정은 한탄강 변에 있는 정자인데 말로만 듣다가 처음 보는 풍광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고석정은 세운 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내용에 따르면 신라 진평왕(재위 579∼632)과 고려 충숙왕(재위 1294∼1339)이 여기에서 머물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한다. 고석정이란 이름은 원래는 정자를 의미했으나 오래된 정자가 소실되고 나서 그 주변을 모두 고석정이라 부른다고 한다. 한마디로 표현하기 어려운 절경 한가운데 있는 우뚝 선 바위, 그 화강암이 고석이라고 한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의적 임꺽정이 고석정 앞에 솟아 있는 고석바위의 큰 구멍 안에 숨어 지냈다고 하는데, 이 바위에는 성지, 도력이 새겨져 있고 구멍 안의 벽면에는 유명대, 본읍금만이라고 새겨져 있다. 현재 2층 정자는 한국전쟁 때 불타 없어져 1971년에 콘크리트로 새로 지은 것이라고 한다. 별 생각 없이 버스에서 내려 맞닥뜨린 풍광은 마치 누군가가 몰래 숨겨놓았다가 불쑥 절경을 펼쳐 보이는 듯 한동안 숨이 막혔다. 오전 내내 전쟁의 참상에 대해서 보고 들은 탓에 먹구름만 잔뜩 꼈던 머릿속으로 차츰 햇살이 비집고 들어오고 있었다. 누군가는 이곳에서 도를 닦고 누군가는 詩를 짓고 누군가는 칩거를 하고 누군가는 이곳에서 세상의 번잡함을 잠시 내려놓고 머물렀다는 안내문을 읽으면서 그 모든 이들을 지켜보며 어루만져주었을 풍경의 넉넉함에 잠시 숙연해졌다. 수천 년 동안 그 어떤 인간사에 참견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숨찬 역사를 지켜봤을 저 강과 나무와 바위들. 그 위대한 힘은 자연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 아닐까, 싶었다. 자연에 대한 경외감으로 잠시 몸이 떨렸다.
더 머물고 싶은 시선을 거두고 버스에 올라 중식 장소로 예약된 쌈밥 집으로 이동했다. 조금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다들 맛나게 밥그릇을 비운 후 이날의 마지막 코스인 ‘산정호수’로 향했다. 경기 포천시 영북면 산정리에 위치한 산정호수는 산세가 아름다운 명성산 감투봉 사향산 관음산 불무산 등에 둘러싸여 있으며, 한탄강의 지류들이 계곡을 타고 흘러든다고 한다. 산정(山井)이란 이름은 말 그대로 '산 속의 우물 같은 호수'란 뜻에서 붙여졌다고 한다. 산정호수는 1925년 축조된 관개용 인공호로, 제방은 천연 암벽을 이용했다. 호수를 둘러싸고 비선폭포 등룡폭포 벼락바위 등의 명승지와 자인사 운천사 동화사 등의 사찰이 있다. 서울에서 북동쪽으로 72㎞ 정도 거리에 있으며, 운천리까지 국도가 지나고 이곳에서 포장된 도로가 호수 입구까지 연결되어 수도권 주민의 주말관광지가 되고 있다고 한다.
주차장에서 사람들이 가리키는, 호수가 있다는, 산 위 방향으로 눈길을 주며 ‘설마 저 산 위에 호수가 있다고?’ 반신반의하며 산길을 올랐는데 어마어마한 호수가 막상 눈앞에 펼쳐지자 왠지 누군가에게 농락당하는 기분과 더불어 기가 막힌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닐까, 싶었다. 이 호수는 궁예가 후고구려를 건국한 강원도 철원군과 인접해 있어, 그와 관계된 전설이 많이 전해진다고 한다. 호수를 둘러싸고 있는 명성산은 궁예가 싸움에 지고 와서 크게 울었다고 해서 울음산이라고도 한다. 호수 근처에 있는 패주골은 궁예가 도망친 곳, 망봉은 왕건의 군사들이 망을 보았던 곳이라고 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궁예의 이야기, 또한 사극 드라마에서 봤던 궁예를 떠올리게 하는 캐릭터와 동상까지 세워져 있었다. 호수 속으로 연결된 다리와 둘레길을 천천히 걸었다. 호수와 호수를 둘러싼 풍경이 잠시 어느 꿈속을 걷고 있는 건 아닐까, 싶은 착각마저 불러일으켰다. 산 위에 이렇게 넓은 호수가 있다는 사실이 그저 놀랍기만 했다. 그렇게 잠시 걷다 만난 ‘김일성 별장 터’, 이곳은 동족상잔 이전에는 38선 위쪽에 속해 있어 북한의 소유였다고 한다. 명성산의 자연경관이 뛰어나고 호수의 모양이 우리나라 지도를 뒤집어 놓은 모양이라 작전 구상을 위해 별장을 지어놓고 김일성이 주로 머물렀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풍광 좋은 곳에서 그는 어떤 생각들을 했을까. 자기 자신이 아니라 정말 민족을 백성을 위한 고민을 했을까. 어쩌면 그가 꿈꾼 세상은, 그가 전쟁을 일으켜 얻고자 한 것은 이곳 같은 낙원은 아니었을까, 싶었다.
산정호수를 둘러보는 것으로 하루 일정이 마무리되고 서둘러 시흥으로 돌아오는 버스에 올랐다. 많은 생각들이 차창을 스쳐갔다. 분단의 아픔을 실감나게 들려준 땅 철원은 소외되고 쓸쓸한, 그래서 한없이 외로운, 누군가의 넓은 등을 오래 바라본 느낌이 들었다. 전쟁이란 광기에 희생된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과 절망, 가난이 음울하게 차창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또한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우리들 삶은 지금 어디로 향해 가고 있는가, 라는 질문도 누군가의 아픈 그림자처럼 떠올랐다.
* 이 글은 '예술시흥 18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