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확 띄는 빨간 등대다. 빨간 등대는 마치 유명 연예인처럼 인기 있다. 빨간 등대 주변에서 연인들은 추억으로 남길 사진도 찍고, 중년의 아저씨들은 어시장에서 떠온 회로 소주를 벗 삼는다. 빨간 등대 맨 위층이다. 상쾌한 기분이 든다. 먼발치 바다 건너에 빌딩들이 들어서고 있는 [송도신도시]가 지척이다. 바다를 바라보며 길 옆으로 즐비한 조개구이와 회를 파는 가게들은 손님맞이에 바쁜 모습이다. 바지락칼국수를 어느 집에서 먹어야할지 고민하는 듯 자동차 브레이크를 밟으면서 멈칫멈칫하는 자가용도 눈에 띈다.
선착장이다. 추석연휴라서 북새통을 이룬다. 좌판에서는 방금 배에서 내린 게를 판다. 살아있는 게가 1kg에 1만 5천원이다. 해산물을 흥정하는 사람, 구경하는 사람이 한데 어우러져 왁자지껄하다. 선착장에 가득한 배들 사이로 해는 자꾸만 서쪽으로 기울어가고 시원한 가을바람을 벗 삼아 다정한 이야기를 나누는 관광객의 얼굴은 웃음이 가득하다. 오늘 같은 연휴이면 더욱더 많은 사람들에게 마음의 휴식을 주는 장소, 이곳은 서해의 섬 아닌 섬, 시흥시 정왕동 [오이도]다.
| ▲ 선착장에서 바라본 빨간 등대와 오이도 모습 © 심우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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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명유래
문헌에 [오이도]에 관한 명칭은 《세종실록》121권(1448년)에 처음 등장한다. 여기서 [오이도]를 [오질이도 吾叱耳島]라고 표기하고 있다. 이후 [오질애][옥귀도] 등 약간씩 다르게 불러왔고, 현재는 [오이도]로 통칭하여 부르고 있다. 명칭에 대하여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다. 섬 모양이 까마귀의 귀를 닮아서 [오이도]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이는 한자를 해석한 것에 불과할 뿐이다. 마을의 어르신들은 토박이말로 [오이도]를 [오끼섬]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오이도]라는 명칭은 토박이말인 [오끼섬]을 의미와 상관없이 한자로 바꾼듯하다. [오]를 [오 烏], [끼]를 발음이 유사한 [귀 이耳]로 하고, [섬 도島]를 붙여서 [오이도 烏耳島]라고 한 것이다.
◆ 천지개벽이라
이곳은 섬이었다. 1925년 일제는 소금 생산을 목적으로 오이도 주변 바다에 제방을 쌓아 천일염전을 축조하였으니 [군자염전]이다. 603정보(180만평)의 염전에서 소금을 생산하여 멍텅구리 배와 수인 협괘 열차를 이용하여 수송하였다. [군자염전] 제방을 축조하게 되면서부터 [오이도]는 섬이 아닌 섬이 된다. 커다란 변화가 아닐 수 없다.
다시 [오이도]는 변화의 소용돌이에 빠져든다. 1987년 시화방조제 공사를 실시함으로써 시화국가산업단지와 배후도시인 시화신도시가 [군자염전]을 밀어내고 자리를 차지한다. 아울러 기존의 [오이도]내의 마을인 [안말][고주리][신포동][가운데살막]도 개발에 사라지고 [오이도] 사람들의 삶의 터전은 현재의 [오이도 해양단지]로 새롭게 바뀌었다. 천지개벽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살던 곳, 살던 방식의 뒤바뀜이 컸던 이곳이었다.
◆ 오이도 앞바다는 금잔디였다네
박복일(85세) 할아버지는 “얼마나 고기가 많은지 [오이도] 앞바다는 금잔디였어”라고 말씀하신다. [오이도]의 어장이 좋다는 의미를 완곡하게 표현하신 것이다. 이곳에선 배를 타고 나가 고기를 잡는 방법보다 바다의 갯벌에 참나무 말짱(말뚝)을 박고 그물을 매는 건강망으로 고기를 잡았다. 한 달에 2번, 조금때에 그물을 끌어내고 사리때에 맸다. 게, 대하, 밴댕이, 숭어, 민어 등이 그물에 주렁주렁 걸렸다. 어떤 때는 처치하기 곤란할 정도로 많았다.
궁내부(宮內府) 내장원(內藏院)에서 펴낸 훈령조회존안(訓令照會存案)에 “안산군(安山郡) 소재 소어소(蘓魚所)와 오이도(烏耳島) 어기(漁基)는 진상어물(進上魚物)로 책봉(責捧)하니 이에 대한 해세(海稅)는 거두지 말라는 훈령(訓令) 제7호(1903년 6월13일)”는 [오이도]의 어장이 어떠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오이도] 앞바다에서 생산되는 어물은 임금의 수라상에 올라가는 진상용이었던 것이다. 더 이상 [오이도] 앞바다에서 생산되는 해물의 가치를 논할 필요가 없으리라!
| ▲ 선착장 방파제에서 바라본 오이도 앞바다 - 멀리 보이는 빌딩은 송도신도시 © 심우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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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이도 패총, 이유가 있었네
갯벌에서 조개를 채취하는 것, 이것 또한 [오이도]가 최적지였다. 썰물이 되면 [오이도] 앞바다는 그야말로 가무락, 동죽 천지였다. 주로 아낙네들이 갯벌에 나가서 조개류를 채취해왔다. 강인구(77세) 할아버지는“갯벌에서 잡은 조개를 실어 나르기 위해 무려 10대의 우마차를 사용했어”라고 하시면서 당시의 번성했던 조개채취 작업을 귀뜸해 주신다. 이런 생활을 선사시대부터 해온 까닭인지 [오이도] 내의 6개 지역 12개 지점에서 패총이 발견되었다.
패총(조개무지)은 사람이 먹은 조개의 껍데기가 바닷가에 퇴적되어 있는 유적을 지칭하는데, [오이도] 패총은 서해안에서 제일 큰 패총으로 갯벌지대의 신석기인이 어떻게 해안 생활에 적응해 가는지를 알려주는 유적으로 의의가 큰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오이도] 패총에 관해 1960년 고고학자 윤무병 교수가 [고고미술]지에 발표함으로써 그 존재가 학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본격적인 학술조사는 1988년에 명지대 박물관과 서울대 박물관에 의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한편, 학술조사 후에 한국수자원공사에 의해 시화지구개발사업 일환으로 [오이도] 패총이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 시흥YMCA 등 시민단체와 [오이도] 주민들이 ‘오이도 선사유적 보존을 위한 시민대책위원회(위원장 이화섭)’를 조직하여 시민건의서 제출, 토론회 개최 등의 대대적인 보존활동을 전개하게 된다. 이런 노력의 결실로 마침내 문화재청은 2002년 4월1일 경기 시흥시 정왕동 오이도 선사 유적지(총 면적 43만4,981㎡)를 사적 제441호로 지정하기에 이르게 되고 소중한 문화유산이 우리 곁에 머물러 있게 된다. 작은 관심이 힘이 되어 커다란 결실을 맺는 전형적인 과정이었다.
| ▲ 오이도의 [가운데살막]에 서있는 선사유적지 알림 표지판 ©심우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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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 되는 힘
[오이도]에서 제일 높은 산봉우리, [당봉(당산)]이다. 당고사를 지내던 곳이라 그렇게 부른다. 3년에 1번씩 음력 2월에 고사를 지낸다. [오이도]에서 가장 큰 마을이었던 [안말]의 [큰우물]에서 고사는 시작한다. 이어서 [배가죽나무]에 지내고 밤12시가 되면 [당봉]의 당집에서 당제를 올린다. 무당을 불러 도당굿을 하고 [잿배기]에서는 줄타기 공연도 한다. 이런 의식을 사흘 동안 진행한다. 고사 규모가 매우 컸다. 김학복(60세)님은“고사 지낼 때면 외지에서 사람들이 많이 왔어. 안산의 [둔배미], [삼거리], [구지정] 마을에서도 왔거든.”
마지막 날에는 어촌계 회관 앞마당에서 동네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 풍물을 치며 고사를 마쳤다. 고기잡이의 안전, 풍어 그리고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기 위해서다. 이런 의식을 통해 마을 사람들은 공동체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 ▲ 오이도의 [안말]에 있는 [배가죽나무]의 외로운 모습-안타깝게도 고사 직전임 © 심우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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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사적 요충지
《世宗實錄》地理志/京畿/水原都護府/安山郡
烽火二處, 吾叱哀在郡西, 南準無應古里, 北準仁川城山。無應古里在郡西, 南準南陽海雲山。
《세종실록》지리지/경기/수원도호부/안산군
봉화가 2곳 있으니, 오질애[吾叱哀]는 군의 서쪽에 있다. 남쪽으로 무응고리(無應古里)에 응하고, 북쪽으로 인천(仁川) 성산(城山)에 응한다. 무응고리(無應古里)는 군의 서쪽에 있다. 남쪽으로 남양(南陽)의 해운산(海雲山)에 응한다.
높은 산에 일정한 시설물을 설치하여 밤에는 횃불, 낮에는 연기로써 변방의 위급한 정세를 중앙에 급히 전달하는 군사통신 조직을 봉수제라고 하는데, [오이도]에도 이런 시설물이 설치되었던 기록이《세종실록》등 문헌에 나타난다. 이런 기록을 통해 [오이도]가 서해안의 군사적 요충지 역할을 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봉수대가 있었던 곳으로 여겨지는 곳은 마을에서 당제를 올리던 [당산]으로 마을 분들은 증언하고 있다. 박정록(75세) 할아버지는“당산 꼭대기는 타원형으로 돌무더기가 성처럼 둘러 쌓여있었어. 옛날에 봉홧불을 올렸다구 들었어”라고 말씀하신다. 현재는 이곳에 군부대가 들어서서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는 아쉬움도 있다.
| ▲ 시화방조제에서 바라본 오이도 모습-가운데 솟은 산이 [당산(당봉)] © 심우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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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의 여러 모습
이전에 [오이도]에는 소가 드물어 논과 밭을 쟁기로 가는데 외지에서 소를 갖고 품을 팔러 왔다. 외지인에게 사랑방에 잠자리를 마련해주었고 거기서 묵으면서 품을 팔았다.
[오이도] 사람들은 땔감 때문에 걱정하지 않았다. 인근의 덕적도에서 땔감을 실은 배가 오면 그것을 돈을 주고 사기만 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주로 겨울철에 배들이 들어 왔다.
[오이도]에서도 사람들은 논농사를 지었다. 섬이라서 물이 부족하거나 물에 염분이 많아 논농사에 적합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물이 흔했고 염분도 없어 논농사 짓기에 충분했다.
시장은 [거모동]의 [도일시장]을 이용했다. 군자염전의 [아래데보뚝]을 따라 [터진목]을 거쳐 [새뿔]과 [도일] 사이의 농로로 다녔다.
굴양식장도 있었다. [신포동]과 [황새바위] 주변이다. 황새바위 굴 양식장은 어촌계에서 주관해서 했다. 노동력은 자부담으로, 비용은 수협에서 지원을 해줬다. 하지만 갯벌 흙에 의해 돌들이 모두 덮여버려 실패했다.
◆ [오이도]의 밝은 미래를 위하여
전통적으로 [오이도] 사람들의 주업은 주로 건강망을 이용한 고기잡이와 조개채취였다. 또한 1925년경에 군자염전이 축조되면서 염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았다. 6ㆍ25를 겪으면서 황해도 중심의 피난민들이 대거 정착하여 인구가 급증하였다. 조선시대 말엽에는 9집 만이 [오이도]에 거주할 정도로 아주 작은 섬마을이었다고 하니 이런 인구 급증은 아주 획기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세월이 흘러 기존의 자연마을이 모두 사라지고 새로운 주거단지가 들어서서 현대적인 면모를 갖췄다. 벌써 지금으로부터 11년 전의 일이다. 변화된 새로운 삶터에서 뿌리내리며 내일을 희망차게 준비하는 오이도 사람들. 최근에는 정부로부터 [오이도 정보화 마을]로 지정받아 전국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한편, 방조제 축조로 바다의 조류가 바뀌고 어족이 점차 고갈되어 큰 걱정이라고 한다. 하지만 생활해 가는데 대한민국 어느 곳도 오이도만한 곳은 없다고 마을 사람들은 말씀하신다. 자신이 땀 흘려 노력만 한다면 이라는 전제하에서 말이다. [오이도] 사람들의 열성적인 삶의 모습을 보노라면, 과거의 조그만 어촌에서 대한민국의 모든 사람들이 가보고 싶어 하는 서해안 최고의 해양 휴식처로 자리매김하는 [오이도]를 상상 해보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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