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현동 - 새재
심우일 | 입력 : 2005/06/30 [00:00]
서안산 IC에서 시흥과 부천방향으로 39번 국도를 10여 분간 타고 오다가 시흥시청 이정표를 보고 좌회전하여 벚꽃나무 가로수 길을 따라 약 200M 직진하면 마침내 시흥시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시흥시청이 눈에 들어온다. 이 시청사를 중심으로 청구·대동 아파트 등 주택단지와 장현 초등학교·차량등록사업소·농업기술센터·연성동사무소 등의 관공서, 그리고 각종 상가가 어우러져 작은 도심을 형성하고 있는데 이 일대가 바로【새재】라는 마을이다.  ■ 새재와 장현동(長峴洞) 새재(鳥峴)는「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풀(억새)이 우거진 고개」「무엇과 무엇 사이의 새(사이)재」「새(新)로 된 고개」등의 의미로 일반적으로 풀이하는데, 이 마을 사람들은 다양하게 지명 유래를 제시하고 있다. 첫째, 마을에서 장곡동 방향으로 넘어가는 고개에 새가 많았기 때문이다. 둘째, 고개의 지세가 새 형국(鳥穴)이기 때문이다. 셋째, 마을 앞이 지금은 논이지만 예전에는 바닷물이 들어오는 갯벌이었고, 이 갯벌에서 새우를 많이 잡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하간【새재】마을 명칭을 한자로는【鳥峴】이라 표기하였는데, 이는 ‘새'를 “조(鳥)”로, ‘재(고개)'를 “현(峴)”으로 바꾼 것이다. 이【鳥峴】이라는 명칭은 1912년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이웃 마을인 장상(長上)과 합쳐져 장상(長上)에서 “장(長)”, 조현(鳥峴)에서 “현(峴)”을 따서 장현(長峴)이라는 새로운 지명으로 탄생하게 되는데, 지금 우리가 부르고 있는 장현동(長峴洞)이 여기서 유래된 것이다. ■ 일논줄-이다리피-삼새재 마을 남쪽의 군자봉에서 뻗어 내린 산줄기가 거침없이 마을을 향해 내달려오다가 야트막하고 예쁘장한 봉우리를 마을 앞에 맺었으니 모범산(멀리봉)이요, 마을 남동쪽에는 하늘에서 내려온 옥녀가 삼신우물에서 목욕을 했다는 전설이 담긴 옥녀봉이 단아하게 자리한 채, 그 끝자락으로 마을을 휘감아 돌아 서쪽에서 불어오는 강한 바닷바람을 막아주며 삼태기 모양의 산세를 이루고, 장현천이 한 몫 더하여 마을 서쪽을 지나쳐 서해로 빠져나가며 앞방죽·가물치방죽·줄방죽·홍축 등의 너른 벌판을 만들었다. 이와 같은 산수를 가진 전형적인 농촌 마을인 새재에는 충주 지씨(池氏)가 처음 정착한 이래로 연일 정씨(鄭氏)와 전주 이씨(李氏)가 대성을 이루며 옹기종기 살아 왔다고 한다. 마을에는 옛 부터〔일논줄-이다리피-삼새재〕라는 말이 구전되어 오고 있는데, 이는 첫 번째는 ‘논줄', 즉 지금의 ‘시흥시 논곡동', 두 번째는 ‘다리피', 즉 지금의 ‘안산시 월피동', 세 번째는 ‘새재', 즉 지금의 ‘시흥시 장현동'으로 마을이 살기 좋을 뿐만 아니라 인심이 후하며 단합이 잘 되는 마을을 손꼽은 것이라고 하니, 이 일대에서 새재 마을이 꽤나 유명했던 것 같다.
정재국(83세) 할아버지께서는 “7월 백중에 인근에서 씨름을 하게 되면 송아지는 새재 사람거야”라고 말씀하시면서 예전부터 마을에 건강하고 힘이 센 장사가 많았으며, 사람들의 품행도 바르고 행실 면에서도 모범적이었다고 회고하셨다. 또한, 1970년대 새마을운동이 한창일 때, 마을길을 넓히고 축대를 쌓기 위해서 마을 앞의 모범산에서 젊은이들이 돌을 뜨면,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자발적으로 모두 나와 돌을 나르는 등 마을 일에 협동하며 헌신을 다했다고 한다. 아마도 이런 일련의 긍정적인 모습들 때문에〔일논줄-이다리피-삼새재〕라는 말이 전해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 마을의 새로운 주인 시흥시청 어쩌다가 소마차가 다닐만한 길로 언덕이 꽤나 높아 이를 깎아 내리려하면 어른들은 “부락에 덫 난다”면서 못하게 말렸다고 하니 대표적인 지점이 지금의 장현초등학교 옆의 천성교회 부근이라고 한다. 이는 산의 기(氣)를 끊지 않기 위해서리라. 이 고개를 넘어야 장곡동과 들판에 다다를 수 있고, 이 고개 너머를 ‘재너머'라고 불렀다. 새재 마을 사람들의 삶의 무대는 재너머에 있는 들판(장현초등학교 앞 쪽의 들)이었다. 두레를 꾸며 김을 매고, 두레 싸움도 하고, 백중 때에는 두레 파작을 하느라 마을 사람들이 마을 뒷동산의 옛 간이학교 운동장(장현초등학교 우측)에 다모여 먹고 마시면서 흥겹게 놀며 우의를 다졌고, 가을에 벼 베기 할 때에는 논과 장현천에 가물치와 거치레(게의 일종)가 정말 많아 이를 잡는 재미에 푹 빠졌었다고 하니 옛 시골 풍경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이우순(78세) 할머니께서는 “차를 타려면 시흥시 포동까지 걸어가서 타거나 밤에 서울이나 인천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려면 포동까지 와서 거기부터 걸어왔어”라고 말씀하시면서 새재 마을이 무척 교통이 불편했음을 토로하셨다.
 이러한 옛 생각과 삶의 방식이 한 순간에 바뀌었다. 바로 1990년대 말에 시행된 시흥 연성택지개발지구로 새재 마을이 편입되면서 옛 모습은 한 장의 사진으로 남고, 마을은 개발의 주 무대가 되어 시흥시청을 새롭게 맞이하게 되었다.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자연부락인【새재】마을은 사라지고, 그곳에 살던 사람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정한식(55세, 현 장현7통장)님은 “마을이 없어지기 전에 약 60가구 였는데, 약20가구만이 이 주변에서 살고 있으며, 나머지 40가구는 외지로 모두 나갔지”라고 말씀하신다. 변화는 다른 면에서도 목격된다. 이전의 주업이었던 농업이었다면 지금은 대부분 농업을 하면서 임대업이나 자영업을 하여 생계를 유지한다고 한다. 이런 마을의 획기적 변화에 대해서 현재 이곳에 살고 있는 마을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대부분은 인심 등 정신적인 면에서는 개발 이전이 좋고, 경제적 부나 편리함 등 물질적인 면에서는 개발 후가 낫다고 평가하고 있었다. 특히 시흥시청이라는 핵심적인 관공서가 마을에 들어 온 것에 대해서 자부심까지도 갖고 계신 분도 있었다.   장현 노인정 간판이 옛 모습을 간직한 채 마을 사람들의 쉼터 역할을 하고 있다. 웃음소리가 정겹다. 아파트와 상가 사이에 있는 이 마을 노인정이 새재 마을 사람들의 마음의 고향이 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저작권자 ⓒ 시흥장수신문(시민기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