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래산 오르던 사람들은 전쟁 중에도 안죽었어

대야동 사람들 구술생애사 2

민정례 | 기사입력 2019/07/09 [11:41]

소래산 오르던 사람들은 전쟁 중에도 안죽었어

대야동 사람들 구술생애사 2

민정례 | 입력 : 2019/07/09 [11:41]

▲ 뱀내장터 옛 모습    ©민정례

 

해방이 뭔지도 몰랐지만 하여튼 기뻤어

해방의 기쁨이란건 말도 못했죠. 그때 제트기가 떴어요. 제트기인지 뭔지 하여튼 떴는데 비행기는 안보이고 하얀 연기 그것만 보이는 거야. 우리는 비행기를 처음 보는 거니까. 해방되던 날 연기만 뱅뱅뱅뱅뱅 돌았지. 근데 옆에서 누가 저 앞에 가는게 비행기라는 거야. 요만한게 진짜 가면서 연기를 뿜더라고. 그때 처음 봤어요. 비행기라는 것을.

 

그렇게 해서 해방이 됐다는 걸 알았죠. 우리는 어려서 잘 몰랐죠. 해방이라니까 그런가보다 했지. 하여튼 어른들은 생기가 돌았죠. 일본놈들은 잘살았잖아요. 해방되던 날 어른들이 전부 몽둥이 들고 일본놈들 집집이 다니면서 다 그냥 패죽일려고 쫓아갔는데 다 도망가고 없는 거여. 그놈들은 라디오가 있고 우리는 라디오가 없잖아요. 그놈들은 라디오로 항복했다는 거 듣고 벌써 다 도망갔지.

 

어른들은 태극기 들고 나와 만세 부르고. 북시흥 농협이 우전마당이었어. 자리가 제일 넓으니까 전부 그리로 모였죠. 집도 그 앞이어서 다 봤지.

일본 군사 물러나라, 조선 군사 들어간다~ 이런 노래가 있었는데. 엄청 많이 불렀는데. 

 

“걸음 높여 척척 조선 군사 들어간다. 일본군사 물러나라. 동대문을 열어라. 남대문을 열어라.” 

 

양조장에 사이토라는 사장이 있었어. 해방되고 나서 일본인들이 도망가는데 한국 사람들이 몽둥이 들고 찾아다닐 때여. 때려 죽인다고. 지금 보건소 뒤에 개울이 있었어요. 거기 시커먼 흙이 나와요. 그걸 가지고 찰흙처럼 뭘 만들고 그러거든. 아 그걸 캐러 갔는데 거기서 만난거야. 사이토를. 나 혼자 갔는데. 그 사람도 놀라고 나도 놀라고. 사람들한테 들키면 맞아 죽으니까. 도망가던 일본놈이 무슨 해코지할까봐 나도 무섭고. 모르는 척 했지 그럼. 나도 무서운데. 소리라도 지르면 때려 죽일텐데. 아휴. 그런 적이 있었어요. 사람들이 소래산을 싹 뒤졌는데도 못찾았대. 인천으로 해서 도망갔다는 소리를 나중에 들었어요. 

 

소래산 오르던 사람들은 전쟁 중에도 안죽었어

소래산은 옛날에 신라하고 당하고 나당연합군이 여기를 지나가다가 소정방이가 저 산을 들렀거든요. 전라도 가면 내소사라고 있지, 내소사. 소래, 내소 똑같은 거에요 글자가. 거기도 소정방이 왔다 갔다 그래서 내소사라고. 

 

6.25때 연합군 탱크들이 와서 포사격을 했어. 영남 아파트 위 사거리에 탱크를 세워놓고 병풍바위가 납작하고 표적이 좋으니까 거기다 대고 포 사격 연습을 한거야. 마애불상 바위에다가. 그래서 그때 두 발인가 세발인가 명중을 해서 바위가 이렇게 깨졌었어. 지금은 흔적만 있어요. 마애상 아래쪽으로 박혔지. 정 중앙에는 포탄이 안떨어졌어. 

 

그때는 마애불상이 없었어요. 옛날 노인네들 말로는 소정방이가 바위에다 자기 그림을 그렸다고 해서 말을 탄 장수가 있는 그림이 있어요. 그 후에 동국대생들이 와서 바위 청소한다고 펜스 쳐놓고서 뚝딱하더니 마애불상이 생겼지. 대학생들이 와서 펜스치고 석달을 작업을 했는데 소정방이가 말타고 있던 상을 지워버리고 마애불상을 새겨 놨어요. 예전에는 말탄 장수 상이 있었는데. 6.25 사변 후에 그렇게 만들어 놨다니까. 625 사변 전에는 소정방이 상이 있었다고. 내 죽은 친구 하나가 역사의 흔적을 없앴다며 (분노했지). 몰랐지 주민들은. 

*소래산에 관한 이관영 어르신의 기억은 논란이 많다.  편집자주

 

소래산이 명산이에요. 어렸을 때 엄청 올라갔지. 6.25 때 전쟁에 참전한 사람들이 거의 다 죽었잖아요. 근데 소래산에 오르내린 사람들은 안죽고 다 살았어. 그래서 어른들이 명산이라 그랬다고. 소래산에 하다못해 나무라도 하러 다닌 사람들도 안죽고 다 살았다고.

 

그때 국방부 17연대라면 대단한 부대였거든. 17연대가 거의 전멸했는데도 살아서 돌아온 사람이 있었어요. 두 사람이 있었는데 지금은 죽었을 거야. 그 사람들도 소래산 부지런히 다녔던 사람들이지.

 

소래산

소래산은 지형이 소라처럼 생겨서 유래되었다는 설과 냇가에 숲이 많다는 ‘솔내’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지형이 좁다는 뜻의 솔다(좁다)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등 여러 설이 있다. 이관영 어르신이 주장하는 소정방이 다녀간 산이라는 뜻의 소래 역시 여러 설 중 하나일 뿐이다.

 

이관영 어르신의 구술에 언급된 부안 내소사 역시 소정방이 와서 세웠기 때문에 ‘내소’라 하나 이는 와전된 것이라고 한다. 한국콘텐츠진흥원에 따르면 당나라 장수 소정방은 개전 초기에 잠시 우리나라에 체류했을 뿐, 백제의 부흥군 토벌 무렵에는 당나라에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내소사의 뜻은 불교에서 말하는 내자개소(來者皆蘇 부처님의 도량인 이절에 오는 모든 사람은 소생하리라)에서 따온 이름일 것이라 추정한다.

 

소정방과 관련된 소래산의 이야기는 소래산 마애상에서도 언급된다. 이관영 어르신의 구술에서 보면 ‘원래는 소정방이 말을 타고 있는 그림이 있었는데 동국대생들이 와서 몇 달 작업하더니 마애상으로 변해 있더라’는 이야기다.

 

이처럼 소래산의 명칭과 소래산마애상 등에서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대두된 이유는 무엇일까. 혹자는 오래 전부터 이뤄진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의 영향이었을 것으로 봤다. 또다른 혹자는 아예 근거가 없는 얘기로 실제 소정방이 인천 앞에까지만 오고 소래산에는 다녀가지 않았을 거라 주장했다.

 

또 다른 혹자는 나당연합군 결성 후 백제와의 전쟁 때 소정방이 백제를 멸망시키면서 당시 사람들에게 소정방은 두려운 존재임과 동시에 혐오하는 존재였을 것이며 따라서 관련된 이름이 오래도록 남아서 여기저기 연결되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한편 소래산 마애상은 소래산 동록에 위치한 병풍바위에 선각되어 있다. 전체 높이 13m, 대좌 높이만 3.7m에 달하는 국내 최대 규모의 마애상으로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 보물 제 1324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소래산에 이처럼 거대한 불상이 제작될 수 있었던 배경으로는 고려 초 인주지방 호족세력과의 결탁관계가 주목된다.

한편 이관영 어르신의 구술에서 대학생들이 작업하더니 소정방의 그림이 지워지고 소래상이 생겼다는 얘기는 1988년 시흥군지편찬위원회가 명지대학교 박물관에 의뢰해 탁본을 떴던 것이 와전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소래산 마애상 탁본은 1988년 서울올림픽 때 성화 봉송로에 걸 탁본을 뜨기 위해 명지대 학생들이 작업했다. 해당 탁본은 1988년 서울올림픽 때 성화 봉송로 옆 시흥시 신라예식장 전면에 걸려 화제가 된 바 있다. 이 탁본은 현재 시흥시 향토사료실에서 두루마리 형태로 보관중이며 지난 2009년 시흥시가 시 승격 20주년을 기념회 시청 로비에 전시했다. 

 

 

 

 

*구술자 소개

 

이관영

39생. 북시흥농협 인근에 살면서 6.25를 겪었고, 군 제대 후 계수동 땅을 사서 포도농사와 목장을 운영했다. 새마을지도자로 활동하면서 고소득 마을지도자 22명에 선정되어 박정희 대통령을 만났다.

 

 

*이 원고는 '대야동 구술생애사 잠깐만 살다가 이사가려고 했지'에 수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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