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옛날 마을 풍경
■ 구불구불한 금오로(지방도 제397호선)
지방도 제397호선은 서울특별시 구로구 천왕동과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안양1동 서안양우체국을 잇는 경기도의 지방도이다. 시흥시 금이동 금이사거리에서 논곡동까지 구간은 국도 제42호선과 중첩되며, 서안양우체국 앞에서 국가지원지방도 제57호선과 교차한다. 시흥시 금이동과 서울시 오류동 구간을 잇는 도로라하여 ‘금오로’라고 한다. 이 금오로는 능안말 사람들이 버스를 타고 오류역과 오류시장, 영등포역과 영등포 시장을 가던 주요 도로이다.
마을 앞에 이거 다 아무것도 없었어. 다 논이었어. 전철이 오류동역에 내려서. 버스 한 시간에 한 대 다녔어. 포장도 안되었고. 길이 구불구불했구.(김창욱 구술, 1958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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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오로에 걸려있는 추석관련 펼침막 © 심우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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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H클럽
4H클럽의 4H는 머리(Head), 마음(Heart), 건강(Health), 손(Hands)을 의미하는 영단어의 머리글자를 의미한다. 이 단체의 로고는 네잎 클로버이며 각각의 잎사귀는 4개의 H인 지(智), 덕(德), 노(勞), 체(體)를 상징한다. 실천을 통하여 배운다는 취지로 설립된 세계적인 청소년 단체로서 우리나라에서는 1947년부터 농촌 마을과 학교를 단위로 조직하였다. 새마을 운동이 전개되면서 청소년 활동으로서 마을에서 활성화되었다. 능안말에서도 4H활동이 매우 적극적으로 전개되었다. 공동퇴비장을 만들고, 마을 환경정화 활동을 하고. 4H비석 건립은 마을 청소년들의 자부심이었다.
시멘콘크리트 쳐가지고 4H비석을 만들었어. 그걸 지금 마을회관 옆에 마을 들어가는 입구에 세워놨었지. 비석이 있어서 마음가짐도 틀려지지. 4H가 그땐 엄청나게 활동을 많이 했어. 풀을 베어가지고 퇴비도 했다구. 그걸 마을사람들이 공동으로 만들었어. 우리도 참여했지. 그럼 사진도 찍어가구 해서 잘한 마을에는 상도 주고 했다구. 그때는 교육도 세었다구. 마을에서 몇 명씩 뽑아가지구. 처음 4H들어오는 사람을. 나도 열심히 했는데, 그때가 1980년대야. 그때 우리마을에서 20~30명이 했어. 마을내에서 단합대회도 자주 하고. 마을 청소도.(이수덕 구술, 1963년생)
■ 우시장 가기
1770년에 발행된 『동국문헌비고』에 보면, 인천의 향시(鄕市)로 사천(蛇川)이 거론되고 있다. 이 사천(蛇川)이 뱀내장터이다. 뱀내장터는 지금의 시흥시 신천동 북시흥농협 본점의 남쪽 일원을 지칭한다. 뱀내장은 정기시장으로 1일과 6일에 열렸고, 주요 거래품목은 소였다. 번성했던 뱀내우시장은 1980년대 후반에 자취를 감추었고, 다만 뱀내장이라는 명칭만이 사람들 입에 오르락 내리락 할 뿐이다. 능안말 사람들도 소를 사기 위해서, 그리고 팔기 위해서 뱀내장을 보러 갔었다. 능안말에서 70~80년대 축우를 했던 이윤희씨의 구술을 통해 당시 뱀내장을 비롯한 우시장의 풍속도를 파악할 수 있다.
뱀내장 규모는 보통은 됐어. 수원이나 오산에 비해 적었어. 김포장보다 크고. 소사도 장이 있었는데 아주 적었어.백령도, 영종도에서 소도 오구. 어떤 소가 좋은 소냐면. 덩치도 떡 벌어지고, 등이 처지지 않고 일자로 곧고. 소는 등심이 좋아야 가격을 받고, 도축을 해도 등심이 좋아. 소가 일직선이고 앞뒤가 딱 벌어진게 좋은 소야. 입도 긴 것보다 뭉뚱한게 좋은 소야. 보는 눈은 몇 십년을 보면서 생긴거야. 4~5년 되니까 내 눈이 생기더라구. 10년하면 도통햐. 같이 다니던 분이 이용대씨야. 인천에 살았는데 우리 집으로 와서 있어 달라구 했지. 그래서 온거야. 수원장, 오산장, 발안장, 이천장, 강화장, 뱀내장 등을 자주 갔지. 아래쪽은 소가 많이 나니까. 가끔가죠. 어찌 보면 직접 가서 사오는 거지.(이윤희 구술, 1938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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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70년에 간행된 동국문헌비고에 나타난 뱀내장(蛇川場) © 심우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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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고내 광산
현재는 경기도 광명시에 위치한 폐광산으로 ‘시흥광산’ ‘가학광산’ ‘도고내광산’으로 불렀다. 광산은 일제강점기인 1912년에 개발되어 아연, 납, 은, 동을 채굴하였다. 1972년에 폐광되었는데, 과림동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이 광산에 여러 사람들이 다녔다. 능안말에서도 잠시나마 이 광산에서 종사하신 어르신께서 당시의 상황을 증언해주었다.
도고내 광산 다니구. 몇 살때 다녔냐면. 어려서. 도고내 광산이라구. 해방후에 다녔어. 설월리로 뚫렸어. 굴안에 수십갈래로 또 나뉘여있어. 왜정때는 금 은 철을 캤어. 우리 다닐 때는 철광석을 캤어. 돌을 나오면 기계가 씹어. 갈아서 그 밑창에 내려가면 싸이나를 넣어서 부글부글 끓이면 왠만하면 다 떠. 연이런 것. 갈아 앉는 것은 삽으로 파서 철판에 지게를 지어 올려서 불때가 가지고 말려. 볏 가마 묶듯이 묶어서 일본으로 갔어. 조립을 일본에서 했어. 우리가 못하니까. 한 20살 때 다녔어. 얼마 못다녔어 1년 다니구 못 다녔어. 쇠도 없구. 나오는게 없으니까 한국 사람이 그만뒀어. 페광되어서 그만뒀지. 다닐 때 걸어서 다녔어. 목감천 냇갈은 좁고 구불구불했어. 월급은 며칠에 한 번씩 현금으로 줬어. 사장은 몰라. 구르마질 조금 하다가, 철판에 쇠를 지게로 지어서 올리는 것을 했어. 사흘했는데 코피가 줄줄 나더라구. 정말 힘들었어. 지금도 저 굴뚝보면, 고생한 생각이 절로 나.(이철재 구술, 1936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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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전시회를 개최하는 도고내 광산(광명가학광산동굴홈페이지 갈무리) © 심우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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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호 자가용
1955년 8월. 서울 종로에서 최무성씨가 4기통 엔진에 전진 3단·후진 1단 변속기를 장착해 만든 6인승 지프형 승용차를 선보였다. 국산 1호차이다. 차 이름은 첫 출발을 뜻하는 ‘시발(始發)’이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1975년 12월. 현대자동차는 우리나라 최초의 고유모델 차량인 ‘포니’를 개발하여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자가용 시대를 여는 서막이었다. 능안말의 도로 상황이나 교통편은 80년대 중반까지만해도 극히 안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당시 자가용을 소유했던 사람도 거의 없었다.
교통은 영등포에서 고잔까지 소신여객이 다녔는데. 그중 헌차만 오는 거야. 돈벌이가 안되는 지역이니까. 처음에는 타이탄을 산 거야. 80년대초에 마크5를 사구. 나보다 먼전 산 사람이 한상호 이사장이 처음 산 것이구. 내가 2호야. 병나서 환자가 생기면 우리차가 다 나가는거야. 전화두 이장하구 우리집만 있구. 능안말 사람들이 전화를 쓰러 왔었지. 그때 쓰던 축사는 지붕만 바꾸었어. 스레트가 삭아서.(이윤희 구술, 1938년생)
■ 천수답
조선후기에 벼 재배 방법에 혁신이 일어났다. 기존의 직접 파종 하던 방식인 직파법에서 옮겨 심는 방식인 이앙법(移秧法)이 전국적으로 확대 보급된 것이다. 이에 따라 물이 필요하였고, 물을 확보하기 위한 제언, 보 등 수리시설을 확충해 갔다. 하지만 하늘에서 내리는 빗물에만 의존해야하는 천수답(天水畓) 같은 경우에는 물을 확보하기 어려워 농사를 짓기가 쉽지 않았다. 거의 천수답은 벼 수확량이 미미하였고 이는 자연히 가난과 결부될 수 밖에 없었다. 아래의 구술을 통해 볼 때, 능안말의 논도 거의 천수답이었으며, 밭도 척박하여 경작을 해도 곡식 생산량이 현저히 낮았던 것으로 보인다.
중림은 과림저수지 때문에 수리안전답이라 농사를 잘 지어, 여기는 3년에 한번씩 모를 못내. 천수답이라. 동네 사람들이 전부 가난해. 2년 농사짓구 1년은 못지구. 빚지구 빚갚구 빚지구. 살기가 힘들구. 밭도 돌만 많구 거름이 없으니까 농사가 안돼. 소똥을 동네사람들이 리어카나 경운기 끌고 오면 그냥 주고, 외지 사람들은 돈 받고 팔었어. 그러니까 밭이 걸어져서 좋아졌지. 냄새나서 안좋기도 했겄지만. 동네사람들은 거의 그냥 가져갔어. 외지 사람들은 자동차를 가져와서 사가니까. 거름이 귀할 때라. 제법 받았어요. 대부도 포도밭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가져갔어요. 80년대 말부터.(이윤희 구술, 1938년생)
■ 개발제한구역 단속
1971년 1월 19일 법률 제2291호로 개정된 도시계획법에 개발제한구역 제도가 도입되고, 같은해 7월에 최초로 서울시 주변에 법정 개발제한구역이 지정 고시 되었다. 시흥시 과림동 지역은 1972년 8월 25일 건설부고시 제385호 지정 고시되고, 1973년 6월 9일 건설부고시 제241호 지적 고시되어 인천․부천권역으로 개발제한구역 3차 고시되었다. 시흥시에서 유일하게 과림동 전지역이 개발제한구역으로 규제를 받고 있었다. 능안말 사람들은 그린벨트로 인해 재산권 행사 불가능, 건물 증개축 제한 등 생활에 많은 불편을 느꼈다. 정부에서는 그린벨트 침해에 대해서 아주 엄격하게 단속하였다. 건축물 강제철거, 이행강제금 부과, 행정대집행 등. 아래의 구술 속에서는 그린벨트 규제로 소를 키우는데 힘들었던 점이 잘 나타나있다.
처음에는 축사가 없었고. 집에 외양간이 있고, 앞뒤로 내다 짓고 마당에 기르고 했지. 축사허가 나고서 본격적으로 했지. 이 근방에서 축사를 제일 먼저 지었을꺼여. 허가를 맡은 것이 1984~5년경이야. 그전에도 허가를 내주고도 축사에 방 들이고 그랬으면 읍사무소에서 와서 부셔버렸어. 그린벨트여서. 방에다가 벽돌 쌓아가지고 관리사식으로 조그맣게 지으면 오함마로 때려 부셨어. 엄격했어. 굉장히. 집을 짓다가도 추녀가 조금 나와도 부셨어. 굉장히 단속이 심해. 벽돌 쌓으면 벌써 알어.(이점균 구술, 1961년생)
■ 안양축협 사료 공장
1992년 12월 안양축협 사료 공장이 안산시 성곡동의 반월공단으로 신축 이전하였다. 이에 사료 생산량은 많고 이를 소비해야 하는 축협 입장에서는 고객인 양축농가에게 홍보가 필요하였다. 당시 400여 마리의 비육우를 기르던 과림동 최대의 유한농원을 시범농장으로 정하여 견학을 하도록 하였다. 전국각지에서 선진지 농장을 보기 위하여 몰려 들었다.
목장이름은 유한농원이야. 구로동의 두부공장이름이 유한식품이였거든. 손위 동서가 지었어. 능안말 사람들은 당시에 일소 밖에 없었지. 나 때문에 십여 마리 이상 기르는 사람이 생기기 시작했어. 안양축협에서 우리 목장을 선전 목장으로 간주했어. 관광차가 3대까지 와. 안양축협사료를 쓰는 시골 사람들이 와서 보고 가는 거야. 귀찮기도 하였지. 선진지 견학이라고 할 수 있지. 안양축협에서 시화공단에 공장을 짓구 팔아야 하니까. 사전에 연락이 오지. 오늘 관광버스 2대가 들어가요 라구. 공장장이 전화하지. 시화에 공장이 들어오면서 공장이 크고 생산량이 많으니까 팔아 먹어야 하니. 몇 년을 그랬어. 90년대 초중반이후지. 그전에는 공장이 작아서 생산이 거의 없으니까 이런 것을 안한거지.(이윤희 구술, 1938년생)
14. 능안말의 버스와 생활권 변화
인간의 생활 욕구를 충족시키는 일정의 통합된 행동영역을 ‘생활권’이라고 하는데, 이 생활권은 행정구역이 아닌 교통의 발달과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있다. 교통이 발달할수록 생활권은 더욱 확대되고, 교통에 따라 생활권도 변화되기도 한다. 능안말은 버스 교통 노선에 따라 생활권의 변동이 심했던 지역이다. 버스는 우리나라에 대구에 1920년에 처음 등장하였고, 1928년에는 서울에 버스가 등장하였다. 하지만 당시에 서울에 등장한 버스는 전차를 타는 비용보다 비싸서 가격 경쟁력이 떨어졌다. 능안말에도 60년대 중반에 버스가 등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버스가 다니기에는 마을 앞을 통과하는 금오로가 좁아서 새마을 사업으로 확장하였고, 현재의 광명시 사람들도 능안말에 와서 버스를 타고 오류동, 영등포를 갔었다.
그전에는 버스가 안다녔어. 처음에는 군자 고잔하구 도일에서 서울역까지 다녔어. 금오로를 넓혀야 하는데, 부천군 장경근 국회의원일 때 소신여객을 운영했고. 나중에 화영운수로 넘긴거야. 길을 새마을 사업으로 내놓은 거야. 어떤 때는 중림까지만 왔어. 길 나쁘다고. 그러면 우리가 거기까지 걸어 가야해. 광명시 사람들은 마찻길이라서 그 사람들이 이리로 버스를 타러왔어. 광명이 더 시골이였지. 광명은 광명이라는 명칭이 떨어지고 이렇게 커진거지. 쳐주지도 않았어.(이동호 구술, 1940년생)
초창기 노선인 소신여객 3번은 오류역, 영등포역을 경유하였다. 이에 생활권은 당연히 오류동과 영등포가 되었다. 1979년 12월에 설립된 광명의 화영운수가 오류동에서 도창동간 2대의 버스를 운행하였다. 이후 37번과 37-1번이 생기면서 생활권이 광명으로 바뀌기 시작했고, 1992년 39번이 매화동을 기점으로 능안말, 광명사거리역을 지나 개봉역을 종점으로 5~10분의 배차간격으로 운행되면서 마을 사람들의 주생활권은 광명시가 되었다.
신천리 갈 때는 계수동쪽 길이 없어서 무조건 신천리 가려면 수인산업 도로쪽에 가서 금이사거리에서 빨간 직행버스를 타고 갔죠. 수원, 안양 갈 때도 마찬가지죠. 여기 분들은 오류동이 생활권이었죠. 행정적으로는 소래 쪽이었지만. 시흥시청 등 관공서가 거기 있으니까. 그러나 주생활권은 오류동이었죠. 오류시장요. 오류시장에 가서 생활필수품, 옷, 먹을 거리나 여기서 나는 채소를 팔러 가는 사람이 그리로 다 간거죠. 커다란 슈퍼가 있어 가지구. 오류동이 90%이상이 생활권이었죠. 아침에 버스를 타고 가시는 분들은 채소나 과일을 해가지고 팔려는 분들이죠. 상회에 가져가시는 분도 있고 직접 팔러 가시는 분도 있어죠.
광명은 거의 안갔죠. 광명을 가려면 오류동에서 버스를 타고 10분 이상을 더 가야하기 때문에. 저도 서울 간다면 30분에 한번 오는 3번 타구서 오류역에서 내려서. 그 당시 오류역으로 가는 차가 붐비지는 않았어요.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도로를 포장했어요. 올림픽 할 때죠. 그전에는 먼지가 뽀얗게 나는 신작로였죠. 37-1번은 중학교 3학년때 생겼어요. 고등학교를 그걸 타구 타녔어요. 그건 1시간에 1대. 내가 광명고를 다녔으니까. 신천동부터 시작해서 우리 동네 들렸다가 중림사거리에서 우회전해서 노온사동에서 좌회전해서 광명사거리에서 광명고등학교 지나면 철산동에서 회차 했어요. 광명시로 학생들이 많이 다녔든 것 같아요. 그래서 아마 이 노선을 요구해서 생긴 것 같아요.
이 노선이 여기 사람들이 광명을 직접 가는 거죠. 성택중학교 20회 동기들이 33명이었는데. 남자 17명 중에서 7명이 광명고로 가고, 진성고, 광명공고간 친구들도 있구. 2명이 한인고로 가고. 나머지 친구들은 부천고, 부천북고로 갔죠.
두 노선이 다니다가 39번으로 하나가 되죠. 오류동 생활권이 광명생활권으로 바뀐거죠. 예를 들면 저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럴 때도 오류동에 가서 먹었거든요. 당시 모든 것을 오류동에서 해결했었죠. 졸업식 끝나구, 먹고 놀고, 버스 타고 오면 되었죠. 버스노선이 바뀌면서 오류동이라는 것을 까먹게 되었죠. 무조건 개봉역, 광명시로 바뀌었어요. 옛날에는 오류역, 오류동이었는데 지금은 개봉역, 광명시가 된 거죠. 서울 간다면 개봉역에 가서 타죠. 오류역가는 버스가 없으니까. 25살에 결혼할 때도 광명시장에서 다 사왔죠. 생활권이 버스노선 때문에 바꿘거죠. 지대한 영향을 미쳤죠. 신천리는 두 번을 타니까 번거롭고. 안양쪽은 별로 안나갔죠. 광명사거리의 광명시장에 많이 갔어요. 지금은 자가용이 있으면서 각지로 가죠. 나 같은 경우도 엊그제 부천 이마트에 갔다 왔어요.(이경길 구술, 1974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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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흥시 매화동과 서울시 개봉역간을 운행하는 화영운수 39번 버스 노선지도 © 심우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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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능안말에서 학교 다니기
능안말 아이들은도창초등학교를 다녔다. 바로 윗동네인 두무절이도 마찬가지다. 모갈부터 북쪽에 있는 부라위, 중림은 계수초등학교 학구였다. 행정구역은 과림동 소속이지만 학구가 다른 두 지역 어린이들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성택중학교에 입학해서야 서로의 얼굴을 알게 되었다. 도창초등학교로 향하는 등굣길은 어린 나이의 초등학생들에게는 만만치 않은 길이었다. 돌 고개를 2개나 넘어야 하고, 문둥이가 있다는 소문에 가슴 졸여야 했다. 간혹 돌 고개에서 싸움도 하고. 학교 다녀오면 산으로 들로 다니면서 놀고. 부모님의 일을 돕는 것이 일상이었다. 소를 몰고 풀을 띠기러 냇가로 가기도 하고, 풀도 베어 오곤 했다.
초등학교 때 우리가 추억이 어딨어. 매일 일했지. 맨 풀 깍고 소 몰고 냇가 뚝방에 나가서 소 풀 띠겨 들어오구. 딴애덜 놀아도 난 아버지가 시키면 논두렁 같은 데서 풀 베오고 했지. 추석 때는 놀고 싶어서 며칠 것 미리 풀베어다 놓구. 참외 같은 남의 것 서리 해먹구. 목감천에서 미역감구. 매운탕끓여 먹으러 가자. 양은 솥단지 걸어놓고 불 때서 끓여 먹구. 손으로 붕어 같은 것을 잡아서. 대보름 때는 불 깡통 돌리다가 장절이랑 싸우고. 싸울 때는 전쟁준비처럼 했어. 자전거 체인 같은 것 구해오구. 남의 밥 훔쳐 먹고, 오곡밥 모여서 해먹구. 어려서 고추밭 매고, 논두렁 풀 깍고 그럴 때, 아버지 없으면 일안하니까. 아버지 어디 간다구 하면 제일 좋았 해었다.
7인이씨 라고 유명했죠. 지금 동사무소 근처의 자두를 서리하다가 걸려서. 전교생 앞에서 엄청나게 맞구. 도창초에서오는 애덜은 몇 명안되구, 온신초에서 온 애덜도 몇 명안되구, 주고 계수초에서 온 친구들이 많았지. 시흥시에 우리 다닐 때 고등학교가 없었어. 부천이나 안양, 인천쪽으로 많이 갔어. 공부 좀 하는 애들은 안양공고, 인천공고를 많이 갔죠. 그 당시에는 공고를 알아줬거든. 농고도 수원농고를 알아줬고.(이점균 구술, 1961년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