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3월 8일 영응대군 사당(경효사)에서 552주기 기신제(제사)를 올렸다.
영응대군(1434~1467)은 조선시대의 왕자로 자는 명지, 호는 서곡, 이름은 염이다. 세종의 8남으로 세종 23년(1441)에 영흥대군, 세종 25년(1443)에 역양대군, 세종 29년(1447)에 영응대군으로 개봉되었다. 세조 12년(1467) 2월 2일에 서울 견지방 자택에서 사망하여 이해 3월 19일에 양주 군장리에 예장을 치른 후, 연산군 4년(1498)에 신도비를 세웠다.
그 뒤 광무 4년(1900) 9월 17일에 대군의 첫 부인 춘성부부인 해주 정씨와 둘째 부인 대방부부인 여산 송 씨의 묘를 현 위치로 천장한 후 1968년에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에 있던 셋째부인 연안부 부인 연안 김씨 및 아들 청풍군과 손 화림정, 그리고 증손 흥선부정, 흥정부수의 묘를 옮겨 봉안하였다.
묘 입구에는 대군의 시호 명을 취한 재실(경효재, 1969년경 건립)과 사당(경효사, 1997년 건립)이 각각 위치해 있다. 영응대군 묘 및 신도비는 1988년 5월 31일 시흥시 향토유적 제9호로 지정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세조실록 41권, 세조 13년 2월 2일 무술 1번째 기사에서 영응대군 이염의 졸기를 다음과 같이 적었다.
"영응 대군(永膺大君) 이염(李琰)이 졸(卒)하였다. 염(琰)은 세종(世宗)의 여덟 째 아들로서, 겨우 말을 할 줄 알 적에 어린아이를 조각(雕刻)하여 만든 화촉(花燭)을 보고 놀라며 말하기를, "초[燭]가 타면 반드시 〈초에 조각한〉 어린아이에게 미치게 될 것이니 차마 보지 못하겠다."하니, 세종(世宗)이 이를 크게 기특하게 여기었다. 처음에 영흥 대군(永興大君)에 봉하였다가 뒤에 영응 대군(永膺大君)으로 고쳤다. 세종이 매우 사랑하여 일찍이 염(琰)을 세조(世祖)에게 부탁하였으므로, 세조가 보살펴 주기를 여러 아우들보다 특별히 하였다. 염이 일찍이 병이 드니, 세조가 매우 염려하여 무릇 병이 나을 수 있는 것은 해 보지 않은 것이 없었고, 중사(中使)044) 의 왕래(往來)가 길에 끊이지 아니하였다. 염은 천자(天資)가 순후(醇厚)하고, 글씨와 그림에 뛰어나며, 음률(音律)에 밝았다. 세종이 일찍이 내탕고(內帑庫)의 진귀한 보물을 염에게 모두 주려고 하다가 이를 하지 못하고 훙(薨)하였으므로, 문종(文宗)이 즉위(卽位)하고 얼마 있다가 내탕고의 보물을 내려 주어 그 집으로 다 가져갔다. 이로써 어부(御府)의 대대로 전해 내려오던 보화(寶貨)가 모두 염에게로 돌아가니, 그 재물(財物)이 누거만(累巨萬)이 되었다.
그러나 자못 검소(儉素)하고 절약(節約)하여 사치를 일삼지 아니하고, 입시(入侍)하여서도 겸공(謙恭)하고 근각(謹恪)하여 조금도 과실(過失)이 있지 아니하므로, 세조가 매우 중히 여기었다. 세종이 일찍이 송복원(宋復元)의 딸을 택하여 배필(配匹)로 삼았는데, 송씨(宋氏)가 병이 있어서 세종이 명하여 그를 버리게 하고 정충경(鄭忠敬)의 딸에게 다시 장가들게 하였다. 세종이 승하(昇遐)하자, 염이 송씨를 그리워하여 정씨를 내쫓고 〈송씨와〉 다시 합하여 살았다. 처음에 군부(君父)의 명령 때문에 송씨를 버렸고, 정씨는 또한 버릴 만한 죄(罪)가 없는데도 사랑과 미움으로 내쫓고 받아들였으므로 당시의 의논들이 이것을 단점으로 삼았다. 시호(諡號)를 경효(敬孝)라 하였으니, 밤낮으로 경계(警戒)한 것을 경(敬)이라 하고, 도덕(道德)을 지키고 어기지 아니하는 것을 효(孝)라 한다. 측실(側室)에 아들 하나가 있다."
종친 회장은 인사말을 통해 “이곳은 그린벨트 지역이어서 규제를 많이 받는다. 진입로가 파손되어 복구공사를 하려해도 힘들다. 그러나 금년에 시흥시에서 1억 원을 지원해서 방부목으로 계단을 만들어 주기로 했다.”며 “4차선도로 황고개가 역사성을 지니고 있는 영응대교로 변경하는 것을 추진하고 있다.”고 했다.
영응대군 18대손 이상태(1944년생)씨는 “구준물에서 태어나서 군자초등학교를 다니고 서울서 살고 있다. 구준물에서 사시던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오고 가며 농사를 짓고 있다. 어려서 부모님이 영응대군 기신제나 시제 때 참석하셨던 모습이 떠올랐다. 잊고 있던 고향을 찾은 느낌”이라고 했다.
이상길(1957년생) 제관은 “당진에서 올라왔다. 제관으로서 책임감과 전통을 이어가는 것에 보람이 있다. 그러나 종교 등으로 제사나 차례에 참여해도 절을 안 하는 것은 물론이고 음식도 먹지 않는 것을 보면 마음이 불편할 때도 있다.”고 했다.
마을주민은" 어머님이 이런 날이면 집안 어르신들과 함께 일을 돕고 떡을 이고 가시던 모습이 떠오른다.”며 옛일을 회상했다.
영응대군 18대 종손 이명열(1947년생) “구파발에서 와서 초헌관을 했다.”며“원근각지에서 오셔서 고맙고 집행부에서 노력해서 발전하는 모습이 종손으로 감사하다.”고 했다.
522년 동안 영응대군 기신제를 지내는 것을 보면서 왕손가의 품위를 보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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