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 따라 돌고 도는 다락밭이야기-하지2018년6월21일 농부허리 꼬부라지는 하지
절기 따라 돌고 도는 다락밭이야기-하지 2018년6월21일 농부허리 꼬부라지는 하지
하지夏至. 여름에 이른다, 곧 한여름이라는 뜻이다. 한 해중 해가 가장 긴 때로, 양력 6월 하순에 들었고 열 번째 절기다. 해가 가장 길다고 가장 더운 때가 아니다. 땅의 기후는 복사열로 인해 하늘보다 한발 늦게 찾아온다. 소서, 대서, 입추에 진정한 무더위가 기다리고 있으니 맘을 단단히 먹으리라. 하지에는 어김없이 꿉꿉한 장마가 찾아온다. 이 장마가 땅을 흠뻑 적셔줘야 비로소 고온다습의 무더위 조건이 완성된다. 장마철은 여러모로 고되지만, 그렇다고 농부가 돼서 마른장마를 바랄 수도 없다. 장마도 다 때가 있고, 이유가 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해마다 한 번씩 이맘때 드는 장마철에 맞춰 자연이 진화했으니 사람도, 사람의 먹을거리도, 먹을거리의 먹을거리도 적절한 장마가 있어야 일 년을 무탈하게 보낼 수 있다. 마른장마가 들면 이듬해 감당할 수 없는 가뭄을 겪을 수도 있다.
밭일과 살림 □ 늦콩 심기 □ 들깨 심기 □ 쪽파씨 갈무리하기 □ 감자, 마늘 수확하기 □ 강낭콩 수확하기 □ 고추 수확 후엔 목초액 뿌려 소독하기 □ 고추 윗단 줄 매주기 □ 장마 대비 풀매기
요즘은 아홉시가 다 되어서야 해가 완전히 넘어간다. 긴긴 해에 농부 허리가 남아나질 않는다. 인정머리 없는 야속한 모기떼에 뜯길 만큼 뜯기고 겨우 안으로 들어오면 눈물이 나도록 더욱 야속한 풍경이 나를 기다린다. 까야할 마늘, 정리해야 할 감자, 다듬어야 먹을 수 있는 부추, 빈 전기밥통. 내일 캐도 되는 당근은 굳이 왜 오늘 캤을까……. 이 풍성한 걷이들을 두고 라면을 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 지친 농부는 오늘도 고민에 빠진다. 난 왜 이렇게 산단 말인가!
장마 장마를 앞두면 농부는 바빠진다. 정말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분명 장마가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아차! 하는 순간 봄내 공들인 작물을 순식간에 버릴 수 있다. 그러면 허망한 마음 달랠 길 없어 잠도 오지 않는 밤, 불량한 치맥으로 정신을 달래게 될지 모르니까. 게으른 농부에게 뜨거운 해보다 무서운 게 장마다. 의지대로 밭일을 할 수도 없고 놀 수도 없고 맘은 무겁고, 수확 때를 놓쳐 썩어가는 작물을 봐야하는 심정이란……. 이럴 땐 앞일을 내다 볼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뿐이다. 하긴, 부지런한 농부가 앞일을 내다볼 줄 알아 미리미리 대비할까. 미래를 내다보는 비결은 부지런함 뿐!
감자캐기 다락밭도, 학교텃밭도 감자 캐느라 정신이 없다. 축복 받은 땅을 가진 p초등학교 텃밭에서는 기대 이상의 감자알이 쏟아졌다. 아이들은 연신 감탄사를 쏟고, 입 꼬리가 내려올 줄을 모른다. 평소 웬만한 일에 무표정한 사춘기 아이들 얼굴에도 이날만큼은 흥분한 표정을 감추질 못했다. 이런 흥분된 와중에도, 날카로운 어린이 농부 하나는 감자를 캐낸 자리에 이젠 무엇을 심을 거냐는 기특한 질문을 잊지 않았다. 덕분에 봄 농사를 마무리하며 여름방학이 지나면 가을농사로 넘어갈 거고, 감자 캔 자리에 김장배추를 심게 될 거라는 예고편을 자연스럽게 날릴 수 있었다.
처음 감자 농사를 지었을 때는 가관이었다. 이웃의 노련한 농부들 밭에서는 굵은 감자알이 쏟아지듯이 나오는데, 다락밭에서는 주로 강낭콩만한 감자알이 쏟아졌다. 거름부족에 제 때 풀을 매주지 않은 결과다. 북도 제때 주지 않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감자알이 커지질 않으니 좀 더 기다렸다가 캔다는 게 장맛비를 맞춰서 다 썩히기도 했다. 혹 동네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까 싶어 풀더미에 숨겨 나르기도 했더랬다. 그렇게 캔 감자를 바닥에 널어 두고 며칠을 놀러나갔다 왔더니 그나마 알량한 양의 감자의 반은 쥐가 먹어버리고, 남은 감자는 썩어가고 있었으니 머리를 쥐어박으며 미련한 농부라고 욕을 해댈 밖에.
지금은? 유기농사를 짓기에 만만치 않은 작물이 많지만, 그래도 그 와중에 감자는 제법 자신 있는 작물이 되었다. 물론, 수확량은 비닐을 씌우고 화학비료를 주는 밭의 반 정도밖에 안되지만. 적절하게 유기농사 밭의 수확량 기대치도 감을 잡아 가는 것 같다. 유기농사는 어쩔 수 없이 그 해 기후조건에 많이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매해 잘되는 작물이 다르다. 모든 것을 다 많이 먹겠다는 것은 자연의 흐름에 반하는 욕심이지만, 그래도 농부란 자연조건을 어떻게든 극복해 작물마다 대풍을 노리는 간절한 마음이기 마련이다.
2016년은 감자농사가 가장 잘 된 해다. 조그만 밭에서 100키로가 넘는 감자를 얻었으니 경이로운 해였다. 작년엔 가뭄으로 2016년의 2/3밖에 수확을 못했지만, 맛은 어느 해보다 최고였다. 가뭄으로 인해 분이 많아져서 맛이 잘 들었던 것 같다.
유기농으로 감자농사를 성공적으로 짓기 위해서 알아야 할 것들! 1. 씨가 좋아야 한다. 적당한 크기의 씨감자에 싹이 굵고 튼튼한 놈으로 심어야 한다. 씨앗 자립을 위해 먹다 남은 감자로 씨를 하다 보니 비실비실한 씨를 쓰기 일쑤였는데, 튼튼한 싹을 넣은 두둑과 시원찮은 싹을 넣은 두둑의 줄기 자라는 형편이 매우 달랐다. 2. 감자가 거름을 많이 먹는 작물이란 것도 최근에 알았다. 밑거름에 욕심을 내서 충분히 해야 한다. 3. 유기농법으로 감자를 키울 때는 헛골에 심는다. 키우면서 북을 올려 처음 골이 나중에는 두둑이 되는 방식이다. 심어 본 바로는 견종법(두둑의 한쪽 어깨에 심는 방법)이 가장 감자 싹이 빨리 나고 튼튼하게 자라는데, 아마도 두둑의 아랫부분에 씨감자가 위치하니까 수분이 잘 유지되지 때문인 것 같다. 줄기를 빨리 키워낼수록 감자알이 제때 영근다. 4. 제때 웃거름을 하면서 북을 올려야 한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풀을 맨다. 감자는 땅속에서 맺히지만 씨감자가 있던 위치로부터 위쪽으로 알을 맺는다. 감자는 뿌리가 아니라 덩이줄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땅을 한껏 북돋으며 키워야 한다. 복스럽게! (견종법은 감자두둑을 줄기쪽으로 이동하며 북을 준다.) 5. 감자는 가지를 튼튼하게 키워야 알도 튼실하다. 그러니 처음에 잎과 줄기가 잘 자라도록 오줌으로 웃거름을 해주는데, 입하 전에 해주는 것이 좋다. 웃거름을 해주면서 북을 준다. 6. 알이 잘 맺히도록 입하 즈음엔 쌀뜨물로 웃거름을 한 번 더 한다. 물론, 북을 주면서. 7. 하지 감자라고 하지에 공식처럼 캐지 말고, 감자 줄기가 누렇게 떠서 쓰러질 때까지 기다린다. 감자가 늦돼서 줄기가 아직 튼튼하다면 장맛비를 한 번 맞춰도 썩지는 않는다. 콩알 만한 감자에 실망했다가 장맛비 한 번 맞고 캐면 더욱 굵어진 감자를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장맛비가 너무 길게 오면 썩을 수도 있고, 물기를 머금어 감자를 캐면 저장이 잘 되지 않고 썩을 수 있다. 감자캐기는 장맛비와 눈치 보기가 그야말로 관건이다. 가장 좋은 것은 장마 들기 전에 빨리 키울 것.
채소트럭 5월말 즈음부터 채소트럭에서 '햇감자요, 햇감자! 파근~~~ 파근한 햇감자요, 햇감자!' 그런다. 생각해보니 제철 채소들이 다락밭에 나올 즈음이면 한발 앞서 남쪽지방에서 올라온 햇채소 소식을 채소트럭에서 가장 먼저 알려준다. 먼저 벌마늘이 나오고, 뒤이어 햇양파가 나온다. 파근파근하다는 형용사가 쓰윽 군침을 돌게 한다. 파근파근한 게 뭔지도 몰랐는데, 어느덧 이 표현에 모락모락 김을 내며, 뽀얀 속살을 드러내고 분이 튀어 나온, 달고도 짭조름한 삶은 햇감자를 자연스럽게 떠올린다. 맛이 제대로 든 감자는 소금을 안 넣고 삶아도 적당히 짠맛과 단맛이 조화롭다. 사실 감자를 그리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 막 나온 햇감자를 충분히 즐겨야 한다. 제철이 지나면 감자는 반찬으로 쓸 뿐 간식으로는 손이 잘 안 간다. 제철인간이 점점 되어 가는 것인지, 봄 동안은 상추를 매일 먹어도 안 질리고 당기더니 요즘은 감자 맛이 그렇게 좋다. *[파근파근하다: 가루나 음식 따위가 보드랍고 팍팍하다]
마늘 마늘은 감자보다 좀 일찍 거둔다. 마늘잎이 꼬시라지면 몇 알 후벼본다. 캘 때가 된 마늘은 껍질 상태를 보고 알 수 있다.
마늘은 6월에 캐니까 마늘 사이에 한여름이나 가을에 수확하는 녹두와 들깨를 심었더랬다. 밭이 좁아지니 사이짓기는 필수가 되어버렸다. 마늘을 캐고도 빈 밭이 아니라 녹두밭과 들깨밭이 드러나니 마음이 흡족하다. 사이짓기의 매력이다. 좁은 땅에서는 사이짓기를 잘해야 수확바구니가 비는 날이 적다. 물론, 마늘을 캐면서 녹두를 많이 밟아 죽였다. 사이짓기가 힘든 게 있다면 밭일을 할 때 몸을 가누기 힘들다는 점이다.사이사이 섬세하게 일해야 하고, 공간도 좁아져서 엉덩이와 발로 작물을 밟지 않으려면 요리조리 요가 하듯이 몸을 움직여야 한다. 성격 불같은 사람은 사이짓기하다간 모조리 뽑아버릴지도 모른다. 나 같은 경우는 사이짓기로 성격이 교정됐다고나 할까.
틈 앞 공장 사장님한테 마늘 묶는 법을 배웠다. 가르쳐주신 적은 없는데 그냥 이것저것 물어보는 척하면서 어깨 너머로 배웠다. 어설프지만 제법 비슷하게 된 것 같다. 물론 실패도 했지만.
마늘을 잘 엮어 처마 밑에 매달았다. 자린고비가 굴비 바라보듯, 밭을 드나들 때 한 번씩 쳐다보면 미소가 절로 나오니, 이것이 다락밭 농부의 작품인 것이다.
* 마늘의 폭풍성장을 위한 키 포인트: 솎아주기와 웃거름주기. 잊지 말자!
당근 봄 당근은 매번심는 것을 잊어버리거나 수확하는 것을 잊어버리거나 해서 제대로 키워 낸 적이 별로 없다. 그나마 올해는 작황이 좋다. 최근엔 씨앗의 발아율이 그닥 좋지 못해 씨를 바꿨는데, 먼저 심어오던 씨앗보다 맛이 없다. 너무 말라서 그랬는지, 수확시기를 놓쳤는지 땅속에서 갈라진 당근이 나왔다. 심이 생긴 것이다. 장마중임에도 불구하고 얼른 모조리 수확해 버렸다. 완벽한 봄당근, 갖고 싶다. 역시 당근은 가을 당근이다.
키질 장마에 눅눅해진 시금치 씨를 오늘에야 바짝 말려 키질을 했다.
동네 친구, 향미씨한테 느리고 어설프다며 엄청 구박 받아가며 배웠다. 오늘은 사뭇 회심의 미소가 나올 정도로 키질이 잘된다. 키질은 손목 움직임이 중요하다. 씨는 안으로, 이물질은 밖으로 떨어내고자 하는 의지가 손목의 움직임에 담겨야 한다. 내릴 때 약간 키를 내 앞으로 당겨주는 느낌으로 해야 한다. 캬~ 이럴 때 향미씨가 지나가며 날 봤어야 하는데. 영원히 못 할 줄 알았던 키질이었는데 말이다. 사실 아직 완벽하지 않아서 입으로 불어 떨구는게 더 많다.
땅콩은 잘 크네! 동네 어르신이 지나가다 다락밭 땅콩을 보며 칭찬했다. "땅콩은 잘 크네!" 기분이 좋은 듯, 나쁘다. 왜 “땅콩도 잘 크네"가 아니란 말인가.
하지의 다락밭 관찰 해바라기가 폈다. 이놈의 해바라기, 꽃 좀 보려고 두 그루 키우는데 어찌나 쑥쑥 크게 자라는지 주변 작물의 양분과 수분을 모두 다 흡수하는 것 같다. / 도라지꽃에 망우리가 맺혔다. / 접시꽃이 피었다. / 채송화, 봉숭아, 풍접초가 피기 시작했다. / 마디호박이 주렁주렁 달린다. / 오이가 맺히기 시작했다. / 고추도 맺히기 시작했다. / 가지도, 피망도 맺히기 시작했다. / 참외가 아주 조그맣게 맺혔다. / 옥수수 키가 제각각 자란다. 참 자유로운 옥수수들이로다. / 살구가 익어간다. / 한마디로 하지는 정신없다.
하지의 밥상 감자 밥상 예전엔 구황작물이었으나 지금은 먹을거리가 넘쳐나니 아이들도 어른도 잘 돌아보지 않는 것이 감자다. 그럼에도 찬찬히 살피면 우리 밥상에는 감자가 얼마나 적절하게 쓰이는가. 된장찌개, 고추장찌개, 감자볶음, 닭볶음탕, 감자조림, 감자밥. 여기에 서양음식까지 가면 셀 수 없이 많은 감자 요리들이 있다. 감자보다 고기를 좋아하는 나도 일년 먹을 감자 상자를 보면 마음이 든든하고, 뿌듯한 것은 감자의 이런 알찬 쓸모 때문일 거다. 수확한 감자를 크기별로 분류해서 작은 감자는 밥에 넣어먹거나 조림을 해서 먹는다. 큰 감자는 볶음 할 때 채썰기 좋다. 입맛이 바뀌고 나서는 닭볶음탕에 통감자가 떠돌아다니는 것이 좋아졌다. 적당한 크기의 감자를 통으로 푸욱 고듯이 익히면 닭고기 못지않게 인기 있는 건더기가 된다. 요즘엔 그저 찐감자를 즐긴다. 밭일 하다가 출출할 때 냄비에 몇 개 올려놓고 밭에 나갔다 오면 파근파근하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찐감자가 기다……려야 하는데, 새까맣게 탄 냄비가 활활 타오르며 기다리고 있다. 죈장!
강낭콩 엄마 집에 와서 간만에 밤늦게까지 컴퓨터질을 하고 있는데, 출출해서 부엌을 어슬렁거리다보니 반찬통에 웬 알초콜릿이? 얼굴에 화색을 띠고 달려가 보니. 강낭콩이다. 강낭콩이 언제부터 이렇게 반짝거리는 초콜릿을 닮았었나? 나는 농부인데 이 실망감은 뭐지?단 것에 너무 굶주렸던 게다. 냉동실을 뒤져 초코로 뒤덮인 하드로 민망하고 허전한 마음 달래본다.
내일 아침 먹을 콩을 까놓고 편안히 주무시는 울 어머니. 아침밥에 알알이 들어가 있을 강낭콩들을 상상해본다. 나는 강낭콩을 별로 안 좋아하는데, 완두콩밥을 해주지. 내일은 공동경작일. 틈에 가서 나도 강낭콩을 어여쁘게 까놓고 구슬씨를 현혹시켜봐야겠다. 나만 당할 수 있나.
채소구이 햇채소들이 마구 쏟아지는 때, 이 모든 신선한 채소를 간단히 한 번에 요리할 수 있는 것이 채소 오븐구이다. 당근, 가지, 감자, 양파를 두툼하게 썰고 마늘은 통으로 넣고, 올리브 오일과 소금에 막 굴린 다음 바질 같은 허브가루를 솔솔 뿌려서 오븐에 굽는다. 친구가 틈에 버리듯 주고간 간이오븐을 이렇게 알차게 사용할 줄은 몰랐다. 이 간이오븐은 틈에서 살림보물10호 안에 드는 것이다. 구워낸 채소들을 그냥 먹어도 맛있고, 피자파이 위에 토핑으로 올려도 맛있고, 샐러드 소스를 만들어 소스를 끼얹어 먹어도 맛난다. 그 무엇을 하든 채소의 본래 맛이 살아서 꿈틀댄다고나 할까. 특히 올리브오일은 채소 본연의 맛을 가두는 역할을 해준다. 가지 구이를 못 먹어본 사람은 그 맛에 반할 준비하시길! 손가락처럼 가늘어서 요리해먹기 귀찮은 새끼 당근들은 통으로 구우면? 그 또한 별미다.
고추장찌개 햇채소들을 한번에 쏟아 넣을 수 있는 조선스타일 음식이 있다면 고추장찌개다. 고추장찌개는 알기로 충청남도 음식이다. 된장찌개에서 된장 대신 고추장을 넣는 개념이랄까. 근데 이게 맨날 먹는 된장찌개와 다르게 여름 별미다. 달큼하고, 시원하고, 걸쭉한 고추장찌개는 감자, 호박, 양파를 큼직하게 썰어 넣어 뻘건 찌개국물이 채소에 배도록 푹 무르게 끓이는 것이 포인트다. 된장찌개는 맛있는 된장만 맛있으면 그럭저럭 해먹을 수 있는데, 고추장찌개는 웬만해서 엄마가 해주는 맛을 내기가 쉽지 않다. 엄마는 고추장찌개를 맛있게 끓이는 달인이라면, 아빠는 고추장찌개를 맛나게 먹는 달인이었다. 고추장찌개가 밥상에 오르면 그야말로 밥그릇을 싹 비울 때까지 옆도 보지 않고, 침묵하셨다하니 말이다. 엄마한테 어떻게 끓이는 거냐고 물으면 그냥 고추장 넣고 끓인다고만 알려준다. 내가 봐도 그렇게 끓이는 게 맞는 것 같기는 한데…… 정녕 손맛이란 말인가? 나도 내가 만든 음식을 누군가 게 눈 감추듯, 집중해서 먹는 느낌을 느껴보고 싶다. 주로 나에게 이렇게들 말하곤 하지. “도전정신은 그만 둘 때도 됐잖아!”
며칠 째 비가 온다. 미처 대비하지 못하고 장맛비를 맞이하는 풀밭 속 고추와 호박을 보니 애처롭다. 어디선가 슬슬 곰팡내도 코끝에 경고를 날려주고 있다. 비가 좀 그친다 싶어 밭에 좀 나가보려고 고무신만 신으면 다시 비가 온다. 누가 보면 비만 오면 고무신 신고 밭에 나간다 하겠다. 내일은 집에 보일러를 한 번 돌리고, 틈에는 곳곳에 선풍기를 돌려 습기를 말려야겠다.
글,사진: 느림 nreem@naver.com 생활문화탐구소 틈 http://cafe.naver.com/tmtm20
이 글은 매화동에 있는 ‘생활문화탐구소 틈+다락밭’에서 그간 함께 농사지으면서 기록해온 농사일지를 24절기 흐름에 따라 재구성한 것입니다. 다락밭은 화학비료, 농약, 비닐을 사용하지 않고 토종씨앗으로 유기순환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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