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끝이 났다. 예비후보 등록으로 넉 달 여 진행된 선거운동 기간 동안 지역사회 일꾼을 자처하는 수많은 후보들이 마을로, 거리로 나와 시민들을 만났다. 투표해야 할 선출직이 많았던 만큼 유권자들의 눈길을 끌어야 하는 후보자들은 마음이 바빴다.
시흥의 지방선거에서 가장 눈길을 끈 곳 중 하나를 꼽으라면 청년 후보 두 명이 경주를 펼친 시흥시의원 가 선거구일 것이다. 20~30대 청년이 시의원 후보로 나선 것도 눈길을 끄는데 두 명이나 나섰으니 화제가 됐다. 한 명은 당시 더불어민주당의 홍헌영 후보이고, 한 명은 녹색당의 안소정 후보였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청년이라는 것 외에도 하나 더 있다. 같은 교회를 다닌다는 것. 열심히 공부해 이 지역을 벗어나는 것이 성공인 듯 보이는 시흥에서 지역을 떠나지 않고 사는 것만도 대단한데 지역을 위해 일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두 청년이 지역을 생각하게 된 동기가 궁금했다. 두 청년이 다닌다는, 신도 50여 명의 시흥 온누리 교회를 다녀왔다.
신도 50여명의 작지만 큰 교회
신천사거리에서 수인산업도로를 등지고 시흥시청 방향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편도 2차선 도로 양옆으로 상가가 즐비하고 올망졸망 낮은 아파트와 빌라들이 나타난다. 흔히 원도심이라 얘기하는 노후된 건물과 매일 주차전쟁이 벌어지는 좁은 길들이 이어져 있다. 온누리장로교회는 연희아파트 상가 3층에 위치해 있다. 상가 중심에 난 컴컴한 계단으로 올라가면 2층에는 당구장이 위치해 있고, 또 한 층 올라가면 철문이 나타난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계단이 교회의 주 출입구는 아닌데, 보통 상가 중심에 복도와 계단이 위치해 있는 것을 생각하고 3층으로 찾아 올라가면 어두컴컴한 입구에 놀라게 된다.
교회 내부는 생각보다 넓었다. 예배당과 식당, 응접실 등에서 부지런히 오갔던 사람들의 온기가 느껴진다. 그곳에서 전채성 목사를 만났다. 3면이 책장으로 이뤄진 목사실에는 책으로 가득했다. 책장에 다 꽂지 못한 책들은 곳곳에 쌓여 있었다.
"두 명 다 선거사무소 개소식에도 안갔어요"
보통 교회를 생각하면 종교 공동체 생활에 기인한 끈끈한 유대감과 상부상조 정신이다. 보통 한 교회에서 후보자가 출마하면 교회 구성원 대부분이 지지한다. 특히 교회 목사의 한 마디는 신도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출마자들이 종교 지도자들을 만나 인사를 ‘올리’거나 대형 교회 앞에서 선거운동을 하는 이유다.
“헌영이가 개소식한다고 오라고 전화가 왔던데 내가 그랬어요. ‘야 내가 소정이 개소식에도 안갔는데 너 개소식이라고 어떻게 가냐?’ 이랬더니 ‘아 네’하더라고요. 그러고 안갔어요. 하하”
교회를 다니는 청년 중 두 명이 정당을 달리해 같은 지역구에 나섰어도 전 목사를 비롯한 교회 구성원들은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그저 개인의 선택을 존중했을 뿐이며 잘 되기를 기도해주는 것 뿐이었다. 후보자들도 교회 안에서 선거운동을 하지 않았다. 도움이 필요하면 후보가 개인적으로 연락해 도움을 요청했고, 판단은 개인의 몫이었다.
종교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삶에 과도하게 개입하지도, 의견을 일치시키지도 않았다. 한사람 한사람 개성과 그의 선택을 존중하고 지지했다.
녹색당 후보로 나왔던 안소정씨의 경우 7살부터 이 교회를 다니기 시작해 대학 진학과 졸업, 진보정당 활동까지 스스로 선택했다. 교인들은 정치적 성향이 다를지라도 안씨의 선택을 존중하고 지지했다. 또한 한 사람 한 사람 개성을 존중하는 분위기다.
교회, 사업회를 추구하지 말고 삶의 문제를 고민해야
이 교회가 다른 교회와 다른 것은 공격적인 전도를 통해 신도를 늘려 교회의 대형화를 추구하는 교회들을 비판하고 다른 길을 걸어가기 때문이다. 그것은 성경에 대한 해석에서 차이가 드러난다. 전채성 목사는 “그것은 제국적인 방식이다”라고 잘라 말한다.
대형화, 사업화를 추구하는 한국교회를 비판하고 성경을 제대로 해석하자고 강조한다. 즉 성경을 이해하는 것과 세상을 이해하는 것이 다르지 않다는 것, 핵심은 삶의 실천이다. 그렇기에 세월호 문제에 침묵하지 않고, 지역사회에도 관심을 갖는다.
10여 년 전 전채성 목사가 시흥에 왔을 때 이곳에 정착하겠다고 결심한 것도 할일이 많아 보여서다. 저소득 저학력의 사람들이 팍팍한 세상살이에 작은 시비에도 거칠어지는 것을 보며 무엇이든 해야한다는 생각을 했다. 복지사업으로 섣불리 접근하지 않았다. 가장 힘을 많이 쏟은 것은 교회가 성경과 교회 안에만 갇히지 않고 지역사회를 위해 일해야 한다고 교인들과 합의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예민하고 거친 사람들을 위해 교육을 시작했다. 한글교실부터 글쓰기까지. 교육은 자존감과 직결된다. 오히려 신도가 더 떨어졌다. 100명 가까운 신도가 10여 년 세월동안 절반으로 줄었다.
교회 신도들은 차라리 전도를 해서 교회를 키우자고 하지만 지역에 밀접한 목회활동을 향한 고집과 신념은 그대로다.
지난 10년 간은 지역에 적합한 활동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시도하는 과정이었다. 아직도 적절한 방법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는 전 목사는 “그래서 기사거리는 안될텐데요”라며 오히려 기자를 걱정했다. 교리를 제대로 해석해야 하며, 근간은 ‘삶’이어야 한다는 전 목사는 그러다보면 진보적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시흥 사람들은 대부분 잠깐만 살다가 서울로 이사갈 것이라고 말한다. 혹은 서울에서 살다가 부천으로, 부천에서 좀더 집값이 저렴한 시흥으로 오게됐다고 말한다. 시흥을 벗어나는 것이 성공적인 삶인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교육청이나 시흥시 관계자들은 교육예산 많이 투입해도 결국에는 서울시민 만든다며 자조섞인 이야기를 했다.
한 아이가 성장하는 과정을 지켜보고 지역에서 뿌리내리며 살 수 있도록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는 교회. 교회 내 더 많은 친구들이 지역에서 성장하길 기원한다.
* 이 기사는 마을잡지 슬슬 6월호에도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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