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 따라 돌고 도는 다락밭이야기-곡우

2018년 4월20일 곡식에 고마운 비, 곡우穀雨!

느림 | 기사입력 2018/05/04 [22:30]

절기 따라 돌고 도는 다락밭이야기-곡우

2018년 4월20일 곡식에 고마운 비, 곡우穀雨!

느림 | 입력 : 2018/05/04 [22:30]

2018420일 곡식에 고마운 비, 곡우穀雨!

 

그제가 곡우였는데, 어제 꽤 많은 비가 내리더니, 오늘까지 비가 내린다. 넘치지도 않게 부슬부슬 내려서는 이틀을 꼬박 땅을 적시니, 땅속 깊이 빗물이 스며들 것 같아 기분이 좋다. 곡식을 키우고 새싹을 돋우니, 가물기 쉬운 봄에는 곡우비만큼 반가운 손님이 없다.

 

곡우穀雨. 곡식을 위한 비라는 뜻으로 양력 4월 하순에 들었고, 여섯 번째 절기다. 절기란 일 년을 스물넷으로 분절해 놓은 것이니 한 계절 당 여섯 절기씩이다. 봄 절기는 입춘부터 우수, 경칩, 춘분, 청명, 곡우까지이니 봄의 마지막 절기다. 입하부터는 여름이 일어선다.

아직 꽃샘추위가 간간히 온다. 입하가 오면 도시인들은 갑자기 여름이 닥쳤다고 또 난리법석일 거다. 가만히 살피면 봄도 제 할 일 다 하고 가는 것을.

 

몇 해 동안의 농사기록을 돌아보면 딱 곡우날에 맞춰 비가 내렸다. 곡우날 비가 올 거라는 내 예언에 텃밭교육을 같이 하는 아이들에게서 느림은 점쟁이라는 말이 돌았다. 내가 점쟁이가 아니라 우주의 정확한 운행원리와 이치를 옛사람들이 빠르게 눈치 챈 덕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절기는 그저 임의로, 편의에 의해 15일씩 나눈 것이 아니다. 15일정도 마다 분절되는 지구의 기후특성을, 그리고 365일마다 반복되는 순환을 제대로 고찰하고 만들었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곡우가 되면 절기를 공부하고, 알아가는 재미의 극치를 만나곤 한다.

올해는 곡우날에 맞춰 비가 오지 않고 이틀 뒤가 돼서야 비가 왔다.

 

 

곡우밭일

땅콩, 생강 심기

들깨 심기(깻잎 거두기용)

토종 열매 씨앗 곧뿌림하기

녹두 심기

열무 심기

완두콩 버팀목 해주기

풀매기 시작

 

 

새싹잔치

비닐을 치지 않고 농사를 짓다보면 비닐 치는 밭보다 새싹이 느려서 옆집 밭을 보다 다락밭을 보면 속이 터진다. 앞집 밭을 보다 다락밭을 보면 조바심에 새싹을 찾으러 땅을 쑤셔보기 일쑤다.

 

해마다 씨를 심으면서 드는 생각이 과연 싹이 올라올까 하는 의심이다. 요 쪼그맣고 메마른 알갱이들이 땅속에서 부풀어 올라 떡잎이 땅을 뚫고 올라오는 모습을 씨를 뿌릴 때마다 상상해 본다. 그리고 중얼거리곤 한다. 믿을 수가 없다니까. 날씨가 좀처럼 따뜻해지질 않는, 황량한 들판에 씨를 뿌릴 때면 더욱 그렇다.

 

드디어 감자 싹이 올라왔다. 심은 지 23일 만에. 눈을 씻고 봐도 딱 한개 올라왔지만 얼마나 반가운지. 반가운 마음에 감자의 첫 싹은 매년 다락밭 사진모델이 된다. 곡우가 지나면 약속한 듯 감자싹이 우르르 올라온다. 곡우비의 능력이다.

 

▲     ©느림

 

텃밭수업을 하는 학교 담당교사들한테도 소식이 온다. 사진과 함께 "이거 감자싹이 맞나요?"하고 묻는다. 어떤 것은 맞고 어떤 것은 그저 들풀이다. 아마도 아이들도 교사도 학교 텃밭에 바짝 엎드려 자세히 들여다보고, 또 보면서 구석구석 새싹을 찾았을 것이다.새싹을 만나면 아마도 기다렸던 만큼 반갑겠지.

 

호박 심은 데 호박 나고, 대파 심은 데 대파 나는 텃밭의 광경은 당연하지만, 재밌고 신기하다. 어떤 것은 들풀의 새싹과 아주 비슷해서 새싹의 본 잎이 나오기 전에 풀을 매면 안 된다. 그리고 풀매는 일을 초보에게 맡겨두었다간 애써 싹튼 채소의 새싹이 수난을 겪을 수도 있다. 시금치의 떡잎은 시금치 잎과는 전혀 다른 길쭉한 모양이다. 들풀로 오해하기 딱 좋다. 또 토마토의 새싹과 명아주의 새싹은 아주 비슷하다.

처음 농사를 지을 때, 한 번은 부추를 뜯어와 무쳤다. 아무리 씹어도 질긴 것이 부추 맛은 나질 않고 날내만 난다. 가물어서 그런가보다 하고 꼭꼭 씹어 삼켰다. 지금 돌아보면 부추 옆에 부추로 위장을 하고 나온 뚝새풀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내가 심은 채소와 들풀을 기가 막히게 잘 분간한다. 먹을거리를 알아보는 능력이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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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비 만들기

다락밭, 처음 농사짓던 해.

푸나님이니 입이 귀에 걸려 틈으로 달려오며 하는 말.

"정말 귀한 걸 얻어왔어요!"

하고 내려놓은 스티로폴 박스를 열어보니…… 여는 동시에 사람들은 모두 줄행랑을 쳤다. 생선찌꺼기가 가득 들었다. 퇴비 만들기에 그렇게 좋다는 생선찌꺼기를 어렵게 얻어왔다는 푸나님 앞에서 5미터 전방까지 진동하는 생선 썩은내를 난감해하며, 모두들 영혼 없이 던진 말.

"잘됐네요. 수고하셨어요. 어디서 이렇게 귀한 걸……."

이 귀하다는 생선찌꺼기에 설탕을 11로 섞어 발효를 시키면 생선액비가 된다. 다들 생선찌꺼기 통 옆으로는 얼씬도 안하려 하니 설탕에 버무리는 일은 내 차지가 됐다. 3일이면 냄새도 안 나고 발효가 완성된다더니 일주일이 넘게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물론, 냄새도 일주일째.

 

▲     ©느림

 

그리고 며칠 뒤 푸나님이 다시 싱글벙글 웃으며 나타나서는 품속에서 뭔가 꺼내 놨다. 생수 페트병에 노란 액체. 그렇다, ‘ㅇㅈ이었다. 열심히 모았다며 한 달 넘게 숙성시킨 상태 좋은 오줌이라는 말도 즐겁게 전해 줬다. 물론, 물조리개에 10:1로 섞어 오줌액비를 만드는 일도 내 차지가 되었다.

뭐 이렇게 귀한 걸 다 …… 바쁘실 텐데…….”

 

그 순간, 물조리개에 오줌을 타다가 그만 오줌이 내 신발로 튀고 말았다. 난감하다거나 불쾌하다기 보다 깊은 좌절감이 들었다. 이게 삶인가. 이래야 되나. 유기농사에 우아함이란 진정 없는가. 우아하게 살진 못해도 오줌통에 코를 쳐 박고, 그것이 신발에 튀는 불행함은 내 선택인가, 운명인가. 난 왜 도망가지 못하고 이걸 하고 있는가. 이론적으로는 앞으로도 계속 이러고 있어야만 유기농사가 지속되는 것 아닌가. 다시 말하지만 그건 좌절감이었다.

화학비료 세게 주고 농사짓던 땅에서 유기농사로 전환하면 첫해에는 무엇도 잘 안 자란다. 그래서 콩이나 팥을 심어 땅을 먼저 정화시키고, 땅심을 키워줘야 한다. 다락밭도 첫해에 그 무엇도 제대로 자라는 것이 없었다. 짜리몽땅한 옥수수 싹에 오줌을 부어 주었다. 투철한 실험정신으로 딱 한 군데만 오줌액비를 주었다. 작물 옆에 구멍을 파고 듬뿍 부어주고는 스미면 다시 흙을 덮는다.

며칠 후. 다락밭 농부들이 옥수수 밭에 모였다. 모두 기립박수를 쳤다. 오줌 먹은 옥수수만 쑤욱 자란 것이다. 거름기 없는 옥수수 싹은 노리끼리 볼품이 없는데, 오줌 먹은 놈만 색도 윤기 나는 연두빛이다.

그래! 우아함 보다는 소출 아닌가. 먹고살고 봐야지. 그때부터 양변기 옆에 대야를 두고 오줌을 모으고, 눈만 마주치면 사람들에게 오줌을 모아오라고 주문을 했다. 지금은 생태화장실 청소당번으로 살면서 오줌통과 똥통 관리의 노하우가 생겼으며, 텃밭교육을 할 때면 똥 이야기로 시작해서 돌고 도는 순환의 이야기로 마무리한다. 신발에 튀는 오줌정도야 못 본척하기가 일수고 가끔 얼굴에 튀는 오줌은 옷으로 쓱 닦아 두었다 나중에 씻지 뭐 그런다.

(다락밭 생태화장실)

 

▲     ©느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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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구슬씨가 생선찌꺼기 담당이다. 거의 매일 동네 생선가게에 다녀온다. 덕분에 오이구덩이와 호박구덩이에 좋다는 생선을 사치스럽게 부어줄 수 있었다. 생선찌꺼기를 너무나 잘 챙겨주시는 생선가게 사장님에게 구슬씨 마음이 무거운거 같아, 오이가 나면 사장님께 갖다드리자고 했다. 냄새나고 귀찮은 일을 일상으로 만드는 것이 쉽지 않건만 기특하다.

무엇이 더러운가? 이 질문으로 몸에서, 생명체에서 나오는 유기물을 대하는 태도는 달라졌다. 더러운 것은 순환을 못해서 생명을 오염시키는 것이다. 강과 바다로 흘러가는 오물과 약품이 더러운 것이어서 생명을 해친다. 몸에 피와 살이 되고 남은 양분덩어리가 똥이 되고, 오줌이 되어 가스를 품고 몸 밖으로 나온 것은 더럽지 않다. 똥오줌은 땅으로 돌아가 내가 키우는 채소뿐 아니라 여러 동식물과 벌레를 먹여 살린다. 생명을 이어주는 것이다. 단절이 더럽다. 소통과 순환은 더럽지 않다.

이 사실을 머리로는 알아도 마음으로 잘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 도시인이다. 나처럼. 똥과 오줌이 키워준 윤기 나는 채소를 먹어야봐야 뭣이 귀한지 비로소 알게 된다. 다락밭 농부들처럼.

 

봄이 오면 액비만들기에 바쁘다. 쌀뜨물과 잡곡밥, 막걸리 담그고 나온 찌꺼기로 곡물효소를 만들고, 깻묵에 물을 부어 들깻묵액비를 만든다. 말통에 오줌을 모아두었다가 작물이 본 잎을 올리면 끼얹는다. 오줌은 오래 삭힐수록 귀한 거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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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파꽃

곡우의 감동적인 풍경이라면 뭐니뭐니해도 대파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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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하늘한 보자기를 둘러쓴 아가씨가 수줍게 고운 얼굴을 내미는 것 같다. 마트에서 대파를 한단씩 사먹을 때는 대파에서 이렇게 예쁜 꽃이 피리라고는 생각도 못해봤다. 당연하다. 마트의 채소코너에서 파는 먹을거리가 살아있는 식물이라는 분류 자체를 해본 적이 없다. 그저 먹을거리일 뿐.

대파꽃은 나한테 많은 것을 알려줬다. 우리가 먹는 채소가 생명이어서 어느 한 시절은 죄다 꽃을 피운다는 것. 그렇게 꽃을 피우면 씨앗이 될 열매를 맺는다는 것. 그렇게 누구나 생애가 있다는 것. 꽃은 다 예쁘다는 것. 벌이 특히 대파꽃을 좋아한다는 것.

언젠가는 대파꽃 양봉을 해보리라는 꿈도 키우고 있다.

 

이른 봄에 냉이 캐기를 졸업하고, 요즘엔 쑥 캐기에 여념이 없다.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밭에 잠깐 나가 밭을 둘러보다 보면 어느새 손에는 쑥이 한줌 쥐어 있다.

'이러면 안 돼! 너에겐 밀린 일이 있어!'

 

▲     ©느림

 

얼마 전 비온 후.

엄마한테 전화가 왔다. '비가 와서 쑥이 연해졌겠다.'라는 말은 '쑥 좀 뜯어라'라는 말과 같다. 엄마가 '쑥을 삶았는데, 쑥이 새파랗고 좋네.'라는 말은 '쑥 좀 더 뜯어라'라는 말과 같다. 엄마의 '너 좋아하는 쑥개떡을 해야겠다.'라는 말은 '개떡을 보상으로 줄 테니 힘내서 더 뜯어라'라는 말과 같다.

  

야밤에 쑥버무리에 도전했다. 캐 놓은 지 오래된 쑥을 넣었더니 쓰다. 그래도 아까워서 다 먹었다. 약을 먹는 기분으로. 일부는 생 쑥으로 갈아서 수제비 반죽을 했다. 수제비에서 쑥화장품 맛이 난다. 다음날은 또 쑥밥을 지었는데, 제법 먹을 만하다.

 

▲     ©느림

 

▲     ©느림

 

암튼, 이른 봄 쑥은 연하니 전이나 국을 끓여먹는다. 제법 쇠어버린, 곡우부터 입하 쑥은 떡을 해먹는다. 떡을 할 때는 쑥을 삶아서 갈기 때문에 쇤 것도 제법 먹을 만하다.

봄날은 갔다.

쑥 뜯다 갔다.

 

 

,사진: 느림 nreem@naver.com 생활문화탐구소 틈 http://cafe.naver.com/tmtm20

 

이 글은 매화동에 있는 생활문화탐구소 틈+다락밭에서 그간 함께 농사지으면서 기록해온 농사일지를 24절기 흐름에 따라 재구성한 것입니다. 다락밭은 화학비료, 농약, 비닐을 사용하지 않고 토종씨앗으로 유기순환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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