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림동史(3)

과림1통(3)

최분임 | 기사입력 2018/04/13 [11:16]

과림동史(3)

과림1통(3)

최분임 | 입력 : 2018/04/13 [11:16]

  

전쟁이 할퀴고 간 마을

19506.25 전쟁은 전국을 폐허로 만들었다. 전쟁의 파편은 작은 시골 마을이라고 해서 비켜가지 않았다. 인천상륙작전이 있었을 당시 은행동은 인민군 주둔 지역이었다. 인민군들이 들어와서 마을 사람들에게 총부리를 겨누며 밥과 잠자리를 요구했다. 사람들은 무서워 벌벌 떨며 닭도 잡아주고 밥을 해대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마을 장정들은 모두 산으로 올라가 숨어 지냈는데 마을에서 빨래를 해 바지랑대에 높이 널어놓으면 그걸 보고 집으로 돌아와 밥도 먹고 필요한 물건도 가지고 다시 산으로 올라가곤 했다. 바지랑대에 걸린 빨래가 통신수단이었던 것이다. 전쟁을 실감하지 못하는 아이들은 포탄이 쌓여 있는 사이로 화약으로 장난을 치며 뛰어다니는 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밤이면 인민군들이 안양 박달동을 향해 박격포를 쏘아댔다.

9.28 수복이 되어 국군과 유엔군이 이 마을로 들어왔을 때 이 마을 20여 호 되는 농가는 후퇴하던 인민군이 지르고 간 불로 다 타버리고 겨우 4채의 가옥만 남았다. 그 중 한 집에서 터키군인들이 방안에 숨어 있던 사람의 다리에 총을 쐈다. 남아 있던 집들마저 혹시 인민군이 숨어 있을까 염려한 유엔군이 비행기로 기름을 뿌리고 불을 질렀다. 당장 거처가 없었던 사람들은 방공호에서 근근이 목숨을 이어갔다. 다행히 죽은 사람은 없었지만 공포와 배고픔에 전율해야 했던 시절이었다. 시간이 지난 후 불탄 집들을 재건하게 됐는데 정부에서 일부 원조를 받았다. 전쟁이라는 미명하게 인간들이 저지르는 폭력과 광기가 낳은 미친 시간들을 겪고 지켜봤을 사람들, 그들의 눈물이 일궈낸 세상을 마을을 둘러본다. 이 땅을 딛고 살아가는 또 다른 삶들을 돌아본다. 인간의 시선이 존재하는 한 세상은 변할 것이고 살 만 하다, 라는 누군가의 말처럼 마을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 여전히 이곳이 살 만한 곳임을 일깨운다.

 

▲ 과림1통,거리의 간판들     © 최분임

 

공동체 신앙, 가정신앙, 무속신앙

이곳 마을들은 도당제 같은 게 없었다고 했다. 아마 서양문물이 일찍 들어오다 보니 그러지 않았을까 싶다. 개인이 무당을 불러 푸닥거리하는 건 더러 있었다고 했다. 크게 하는 집은 3일 정도 하고 작게는 몇 시간 푸닥거리하는 걸 5~60년 전에는 더러 볼 수 있었지만 이후에는 본 적이 없다고 했다. 키를 엎어놓고 젓가락으로 긁어 장단 맞추는 걸 구경하기도 하고 또 터줏가리라고 뒤란에 신주항아리를 모셔놓고 고사를 지내던 풍경도 오래전 이야기란다. 무당이 날을 잡아주면 시루떡을 해서 고사를 지내고 정한수(정화수) 떠놓고 비는 모습이며 그 떡을 집집이 돌렸던 기억도 나이 드신 어르신들조차 아득한 일이라고 했다. 떡이 잘 익거나 썰거나 한 걸로 한 해 운수를 점치기도 했다. 떡이 잘 익으면 쌀가루가 묻어 나오지 않는데 안 익으면 쌀가루가 묻어 나오는 걸 보고 한 해 운수가 나쁠 거라고 어른들이 말하곤 했단다. 마을 사람들의 복과 번영을 위해서 마을의 수호신에게 드리는 굿인 도당제며 마을을 지켜주는 동신에게 무병과 풍년을 빌며 공동으로 지내는 제사인 당제堂祭 없이도 여전히 평화롭고 건강한 마을, 과림1통의 현주소다.

 

대동계

과림1통 대동계는 마을 총회라는 형식으로 열렸다. 10월 마지막 날 이뤄진 대동계는 타동에서 이사 오는 사람이 떡을 해오며 대동계에 들었고 상여나, 그릇과 같은 동네 물품을 쓸 수 있는 권한을 가질 수 있었다. 그나마 유지해오던 대동계도 언제부턴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마을 상례

보통 상여는 12, 24, 32명이 메는 상여가 있는데 오래전 과림1통 마을 상여는 24명이 메는 중틀이었다. 중틀은 무겁고 부피가 커서 76~78년쯤 척사대회에서 모은 돈과 마을 사람들 찬조를 받아 12명이 메는 소틀로 바꿨다. 그 당시 종로 5가로 나가 120만원이라는 거금을 주고 장만했다. 상여집은 흙벽돌로 지은 집이었으며 감조개 쪽 공동묘지 안에 있었다. 마을회관이 지어지고 나서는 마을회관 창고에 보관했으며 1990년대 초반까지 마을에서 사자(死者)의 시신을 염하고 상여를 썼다. 이후 병원 장례식장에서 상을 모시게 되면서 바로 상여를 쓰지 않고 나중에 마을에 묘를 모실 때 상여를 태워서 지정된 장소로 가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그마저도 점점 쓰는 사람이 없게 되자 93년쯤 불태워 없앴다. 92년까지는 상여를 썼다고 했다.

 

▲ 마을회관 앞 동정게시판     © 최분임

 

마을 공동우물에서 각 가정의 우물로

은행동 애망신우물(또는 신망애우물이라고도 불림)은 무지내동 353번지 김영배씨네 집 앞에 위치해 있던 우물을 일컫는다. 무지내교회를 가다보면 유리공장(가건물) 밑 이층 건물 앞에 있는 우물이다. 물이 맑고 수량이 풍부해 빨래며 식수를 온 마을 사람들이 이 우물에서 해결했다. 물 긷는 일도 큰일이어서 두레박 두 개를 달아 번갈아가며 끌어 올렸다. 조옥분(1944년생)씨는

여기 우물물이 아주 좋았어요. 온 마을이 이 물로 살았어요.”

라며 마을 공동체적 삶의 중심에 섰던 우물을 떠올렸다.

 

▲     © 최분임 은헹동 애망신 우물터, 지금은 콘크리트로 덮여 있다.

 

지금은 콘크리트로 덮인 자리를 가리키며 그때를 아쉬워했다. 세월이 흐르며 마을 공동우물까지 가기가 번거롭고 힘들었던 박완준씨네 집에서 제일 먼저 집안에 우물을 팠다. 이후 우물 파는 솜씨가 좋았던 박완준씨 부친을 김철경씨네 집에서 불러 그 집 우물을 팠는데 지대가 높은 곳이라 아주 깊게 팠다고 한다. 이어 문형수씨네, 김상일씨네가 집안에 우물을 만들면서 차츰 공동우물에 대한 개념이 없어졌다.

무지내동 지성엔지니어링 옆에도 예전엔 공동우물이 있었으며 중동 손종열씨네 담벼락 옆에도 큰 공동우물이 있었다. 수량이 풍부해 두레박을 깊이 내리지 않고도 쉽게 물을 끌어올릴 수 있었으며 마을 사람들 대부분 이 물을 식수로 이용했다. 마을에 수도가 들어오면서 90년대 철골로 덮고 콘크리트를 쳤다가 지금은 하수구가 그곳을 통과한다는 흔적만 남아 있었다. 금오로 130번지, 라는 이정표가 붙은 담벼락 오른쪽 넓은 자리가 그 우물터다. 그 맞은편 묵정밭은 옛 정미소가 있던 자리라는 데 이제는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 중동 손종열씨댁 담 옆 우물이 있던 자리, 하수구 공사중이었다.     © 최분임

 

놀이 문화

과림1통 통장인 박완준씨는예전 농지정리 전 목감천은 물이 얼마나 맑았다고요. 피라미며 날치, 민물게인 털게도 그곳에서 잡곤 했으니까요. 그걸 잡아다가 찌개도 끓여 먹고 그랬죠. 목감천 양쪽으론 서양 아까시나무(자귀나무)가 많아서인지 붕어며 다른 물고기들도 많았어요. 개구리를 잡아서 구워먹기도 하고요. 학교에서 돌아오면 곧장 거기로 달려가서 가방 내던지고 수영하고 그랬어요. 그땐 물 뿐 아니라 모래도 맑아서 해수욕장이 따로 필요 없었다니까요. 그곳에서 해 질 때까지 놀았어요. 겨울이면 꽝꽝 언 천에서 썰매를 탔죠. 저 장저리까지 썰매를 타고 갔다 다시 올라오곤 했죠. 다른 놀이는 뭐 거의 비슷하죠. 구슬치기, 엽전치기, 사방치기, 땅따먹기, 말뚝박기, 제기차기, 가위생, 집 찾기,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쥐불놀이, 썰매타기, 고무줄놀이 등 많았어요. 봄 되면 새 둥지를 뒤져서 새알을 꺼내오기도 하고 누룽치기도 하곤 했어요. 누룽치기가 뭐냐 하면 새총, 고무줄 총이에요. 물오른 개나리나무를 장작불이나 연탄불로 살살 구워요. 안으로 굽혀 Y자를 만들죠. 그게 수분이 증발하면서 딱딱해지면 기저귀 고무줄을 실로 묶어 완성하는 거예요. 그 새총으로 새도 잡아 봤어요. 또 돼지오줌통을 어른들이 불어서 물을 넣어주면 축구도 하고 그랬어요. 대나무를 잘라 한쪽은 헝겊으로 막고 한쪽은 열리게 해 물을 넣은 다음 물총놀이도 했죠. 전차부대 뒤편으로 칡뿌리도 캐러 다녔죠. 그리고 찜봉이라는 놀이를 했죠. 찜봉은 야구랑 비슷한데요. 공을 던져주는 투수가 없는 놀이죠. 나무를 50cm 정도 팔뚝 만하게 배트를 깎아서 그걸로 치는 거예요. 피처가 따로 없죠. 내가 던져서 내가 치는 거예요. 야구랑 같이 한 바퀴 돌면 1점이 나는 거죠.”라며 시범을 해보였다. 스스로 놀이를 만들고 찾아 나섰던 시절을 듣는데 넘치는 건 모자람만 못하다, 라는 말이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넘쳐나는 시대, 먼 훗날 누군가도 2013년 오늘날 아이들의 놀이를 그리워하며 떠올리는 이가 있을까, 궁금해졌다.

 

▲ 찜봉놀이에 대해 설명하는 박완준씨     © 최영숙

 

마을 행사

과림1통의 마을 행사로는 60년대부터 새해를 맞이할 때마다 지역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는 정월대보름맞이 척사대회가 있다. 또 오래전에는 무지내교회가 주최를 한 교회 대항 배구시합도 있었는데 교회 마당이 좁아 소성고등공민학교운동장에서 하곤 했다. 향우회가 주최한 축구대회도 있었는데 무지내동 4개 부락이 모여서 즐긴 놀이였다. 그러나 그것도 20년 전 얘기란다. 지금은 마을에 젊은 사람이 없을 뿐만 아니라 세상이 많이 변해 모든 것이 사라지고 있다고 한다.

 

▲ 과림동 한마음체육대회     © 최분임



20131019일 예비군훈련장에서 펼쳐진 과림동 한마음 체육대회는 그래서 더 각별해 보였다. 시흥시가 주관하는 시흥시 체육대회가 한 해 걸러서 포동운동장에서 열리는데 그 건너뛰는 해에 각 동별로 열리는 대회가 한마음 체육대회이다. 이날 과림1통에서 5통까지 전 주민이 다 같이 모여 뛰고 즐기며 하루를 보내는 모습에서 새로운 공동체의 가능성이 점쳐졌다. 사회를 떠난 개인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아주 평범한 진리가 새삼 떠올랐다.

 

 * 이 글은 2014년도에 발행된 책 <과림동>중 일부분인 과림1통에 대한 이야기로 4편에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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