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 따라 돌고 도는 다락밭이야기-경칩2018년3월6일-놀라 깨는 驚蟄경칩2018.3.6. 놀라 깨는 驚蟄경칩
경칩은 24절기의 세 번째 절기이며, 양력3월 초순에 들었다. 놀란다는 뜻의 驚! 숨어 지낸다는 뜻의 蟄! 직역하자면 '숨은 것들이 놀란다'는 뜻? 길게 풀자면, 겨울이 되어 추위를 피해 숨어 겨울잠을 자던 벌레나 개구리가 봄기운에 놀라 깨어난다는 뜻이다.
같이 봄맞이 청소를 하기로 한 날, 구슬씨가 나타나서는 “날이 너무 따뜻해서 깜짝 놀랐어요.” 한다. 아무리 따뜻해진 날이라지만 아직은 솜외투로 몸을 돌돌 싸고 있는 나는 구슬씨의 반바지에 깜짝 놀랐다. 이렇게 다락밭 농부들은 봄을 경칩스럽게 맞이했다. 경칩에 놀라면 벌레거나 개구리거나 혹은 다락밭 농부이거나. 봄이 시작되어 이일 저일 힘쓰려면 먹는 게 제일 중요하다. 밭일에 앞서 함께 쓰는 부엌청소를 좀 해야겠다. 겨울이라 괜찮겠거니 하고 구석구석 방치해둔 먹을거리들이 썩어가는 꼴이 볼만하다. 지난 가을부터 정리 안 된 냉장고에서 먹을 수 있는 거라곤 감자와 김치 정도. 죄다 끄집어내 퇴비통으로 넣었다. 바닥에 먼지도 닦고, 동파방지로 막아두었던 수도도 다시 연결해 시원스럽게 물청소도 하고. 청소하다 나온 묵은 술은 아까우니까 버리지 않고 홀짝홀짝 마시고.
봄 깨우기
간만에 먼지가 걷히고, 제법 청명한 날 오후 창밖을 보자니 햇살이 따스하니 포근하다. 저 귀한 봄볕을 그냥 흘려보내기가 아까웠다. 이러고 있다간 봄이 나만 피해가는 것은 아닌지,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강박관념이 들었다.
주말이라고 옆에서 뒹굴뒹굴 하고 있던 아이 하나를 꼬드겨 뒷산에 올라갔다. 도심 속에 있는 산속에도 시냇물이 있다니. 일급수에만 산다는 도롱뇽서식지역이란 말에 혹시나 싶어 돌멩이를 들춰보니 놀랍게도 들춰보는 돌밑마다 도롱뇽이 숨어있다. 시끄러운 사람소리에도 멍하니 정지자세로 있는 것을 보니 아직 겨울잠에서 깨나지 않은 것 같다. 근처를 살펴보니 투명하고 긴 관모양의 도롱뇽 알도 보인다. 어떤 곳에는 개구리 알도 보인다.
기념사진 좀 찍겠다고 아이한테 손 좀 냇물에 담그고 있으라고 했더니 얼어터지겠다며 빨리 찍으란다. 그래도 싫다고 안하고 고분고분 포즈를 취해준 사춘기 소년이 예쁘고 고맙다.
돌멩이가 많은 길을 걸으며 발바닥에도 근질근질 산의 봄기운을 넣어보겠다고 정성을 다해 걸었다. 그래봐야 약수터 코빼기만 보고 힘들다며 내려왔지만 말이다.
봄나물
고랑 곳곳에 냉이가 깔렸다. 예전에 다락밭에는 냉이가 별로 없었다. 일부러 꽃을 피우고 씨를 맺을 때까지 뽑아버리지 않고 잘 보존한 덕이다. 밭을 매면서 작물 사이사이 먹지도 못할 쇤 냉이를 뽑지 않고 살려두는 일은 여간 성가신 게 아니다. 풀을 하나하나 살피며 죽일 것과 살릴 것을 구분하니 시간이 두세 배는 더 걸리지만, 이듬해 봄을 내다보는 소농의 빅피쳐라고나 할까. 이젠 다락밭 곳곳에 냉이가 심심찮게 깔렸다. 내가 그런 노력을 하는 줄도 모르고, 동네 할머니들은 절로 나서 자란 냉이겠거니 생각하는 건지 신나게 캐간다. 작년에도 씨 뿌린 사람은 구경도 못하게 누군가 싹 캐가 버려 여간 서운한 게 아니었는데, 올해는 웬일로 동네 할머니들보다 한발 앞서 지천에 깔린 냉이가 내 차지가 됐다.
벌써 괭대 나물도 파릇하게 올라왔다. 광대나물은 생으로 무치면 깨소금 맛이 난다. 냉이와 광대나물을 뜯어 엄마네로 갔다. 손 빠른 엄마가 어느새 냉이를 다듬으며 사이사이 광대나물을 싸악 골라 죄다 버리셨다. 애써 뜯어온 것을 왜 버렸냐니까 그런 잡풀은 너나 먹으란다. 다시 뜯어야지.
봄비
반가운 봄비가 온다. 창밖에 비를 보면서, 땅이 질어져 내일 계획했던 봄 밭일을 못하겠다고 걱정했더니 엄마는 꼭 게으른 것들이 비만 오면 일 하는 시늉이라고 핀잔이다. 맹세하건데, 따뜻하고 맑은 날은 다른 일로 정말 바빴다. 잠깐 짬이 있긴 했는데, 그땐 맹세코 꼭 쉬어야 했다. 내일부터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 '내일' 비가 오고, 그 '내일'의 다음 날은 땅이 질퍽해질 줄이야.
마늘움
얼마 전에 해남에서 농사짓는 지인이 올라와 하루 묵어갔다. 다락밭을 둘러보다가 마늘밭을 보더니 깜짝 놀란다. 마늘이 왜 하나도 없냐고. 여기는 3월이나 돼야 겨우 촉이 올라온다고 했더니, 믿지 않는 눈치다. 끝내, "안 날 거 같은데……." 이러더니 고개를 흔들며 돌아선다. 그도 그럴 것이 남쪽 사람들은, 이른 봄부터 새파란 마늘밭만 봤을 테니까. 이제까지 봄에 마늘 싹이 올라오지 않은 적이 없건만 마늘 특산 지역에서 온 손님이 그리 말하니 괜히 불안해 진다. 정말 안 나면 어쩌지? 저 차가운 땅속에서 그 추운 겨울을 마늘들이 견뎌냈을까? 초록이라고는 찾아볼 길이 없는 초봄의 황량한 밭은 매년 농부의 마음을 졸이게 한다. 메마른 가지에서 매화꽃이 다시 필까? 이렇게 작고 딱딱한 알갱이에서 새싹이 날까? 오뉴월의 신록이 다시 찾아올까?
경칩이 오고 갑자기 따뜻해서 사람도 놀라는 어느 날, 혹시나 싶어 보물찾기 하듯이 허리를 바짝 숙이고 마늘밭을 구석구석 살핀다. 어김없이 두어 개 정도의 마늘 움이 올라와있다.
노란색에 가까운 여린 연두색 움이 나날이 자라서 잎이 나오고, 마늘종을 올리고, 밑이 차고……. 실속 없는 농부지만 그래도 마늘은 내가 제법 잘 키우는 채소 중에 하나다. 상상은 이미 양파만한 마늘을 캐면서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는 자아를 그리는 데까지 달려간다. 요, 귀여운 마늘 움을 사진 찍어서 해남에 보내줘야겠다. 이곳도 봄은 온다고.
월동시금치
통통하게 물오른 월동시금치를 거뒀다. 부지런을 떨어 늦가을에 씨를 뿌려두면 봄에 이렇게 횡재를 한다. 봄나물은 뿌리에 영양을 담고 있는 법이니 도시 사람들은 먹지 않고 버리는 분홍색 뿌리를 살려 잘 다듬는다. 하루 종일 같이 힘들게 일한 원농부와 사이좋게 반반 나눠 봉투에 담았다.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컴퓨터를 켜 밀린 일에 매진해 본다. 원농부한테 사진이 왔다. 윤기 좔좔 흐르는 데친 시금치, 저녁반찬 인증 샷이다. 헉! 반성하며 부엌으로 갔다. 비닐봉지에 싸서 냉장고 속으로 던져버린 시금치를 꺼내 데쳐서 정성껏 무쳤다. 월동시금치는 너무 달아서 느끼할 정도인데, 시금치를 한입 넣고 오물거리면 몸보신 되는 기분이랄까. 귀한 맛이다! 수확한 날만 느낄 수 있는 신선함까지!
밥은 새로 하기 귀찮으니 냉동 밥을 따끈따끈 데우고, 양념한 시금치나물을 듬뿍 얹고, 고추장 조금 넣는다는 게 실수로 많이 넣고, 들기름은 조금 넣는 척 하면서 욕심껏 넣고, 시골 친구가 직접 기르고, 털고, 볶고, 짠 참기름을 또 넣고, 시골 친구네 닭장에서 가져온 달걀을 하나 부쳐서 올리고, 썩썩 비빈다. 봄. 게으른 농부의 늦은 저녁을 게걸스레 해치운다.
그동안 겨울을 무시하고 살았던 것 같다. 겨울은 아무것도 안하고 있는 것만 같다. 그러나 겨울의 응축의 힘이란, 만물을 소생시키는 봄 못지않다. 마늘은 땅속에서 겨울을 나야만 움이 트고, 밑이 든다. 밀, 보리도 새파란 상태로 한겨울 혹독한 날씨를 보내야만 봄을 무리 없이 맞이한다. 대파, 쪽파 역시 겨울을 난 거라야 꽃대를 올려 씨앗을 맺는다. 봄이 내어준 시금치지만 실은 입속에서 겨울을 곱씹는 거다. 다시 겨울이 올 때 즘이면 좀 더 철든 농부의 자태로 여유 있게 시금치 씨앗을 흩뿌리리라.
글,사진: 느림 nreem@naver.com 생활문화탐구소 틈 http://cafe.naver.com/tmtm20
이 글은 매화동에 있는 ‘생활문화탐구소 틈+다락밭’에서 그간 함께 농사지으면서 기록해온 농사일지를 24절기 흐름에 따라 재구성한 것입니다. 다락밭은 화학비료, 농약, 비닐을 사용하지 않고 토종씨앗으로 유기순환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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