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학당에서 졸업여행을 다녀오다

-송시열, 조선의 주자(朱子)를 꿈꾸다

최영숙 | 기사입력 2016/07/08 [08:34]

맹자학당에서 졸업여행을 다녀오다

-송시열, 조선의 주자(朱子)를 꿈꾸다

최영숙 | 입력 : 2016/07/08 [08:34]

 

▲ 맹자학당 졸업여행을 다녀오다. 화양구곡에서     ©최영숙

 

 맹자학당에서 201672일부터 3일까지 송시열, 조선의 주자(朱子)를 꿈꾸다.’라는 주제로 졸업기행을 다녀왔다. 이번 기행은 조선시대 당쟁의 중심에 있던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리될 때 소론의 영수로 추대된 윤증과 노론의 영수 송시열의 발자취를 따라 가는 것이었다. 늘 철저한 준비로 학동들을 안내하는 심우일 맹자선생님과 8명의 제자들은 소래고등학교에서 오전 7시 명재 윤증고택 답사를 위해 출발했다.

 

맹자학당은 맹자를 공부하는 모임으로 201032일 첫 수업을 시작으로 2016623일 마지막 수업을 했다. ‘맹자학당은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만들고 공부했던 모임이다.

 

기행 일정표에는 72일 윤증고택 답사 죽림서원 답사 속리산 법주사 및 정이품송 답사 73일 화양구곡 및 송시열 유적 답사로 되어 있었다.

 

▲ 느티나무 아래에서 명재고택을 바라보다     ©최영숙

 

중요민속자료 제190호인 명재 윤증고택으로 출발했다.

 

윤증(尹拯 1629 인조 1714 숙종)은 본관 파평(坡平). 자는 자인(子仁), 호는 명재(明齋유봉(酉峰). 성혼(成渾)의 외증손이며 아버지는 선거(宣擧)이다. 어머니는 공주 이씨(公州李氏)로 장백(長白)의 딸이다.

 

1642(인조 20) 아버지 선거와 유계(兪棨)가 금산(錦山)에 우거하면서 도의(道義)를 강론할 때 함께 공부하며 성리학에 전심하기로 마음먹었다. 1647년 권시(權諰)의 딸과 혼인하고, 그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이후 김집(金集)의 문하에서 주자(朱子)에 관해 배웠고, 1657(효종 8) 김집의 권유로 당시 회천(懷川)에 살고 있던 송시열(宋時烈)에게서 주자대전을 배웠다.

 

효종 말년 학업과 행실이 뛰어난 것으로 조정에 천거되었고, 1663(현종 4) 공경(公卿)과 삼사(三司)가 함께 그를 천거하여 이듬해 내시교관(內侍敎官)에 제수되고 이어서 공조랑·사헌부지평에 계속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1682(숙종 8) 호조참의, 1684년 대사헌, 1695년 우참찬, 1701년 좌찬성, 1709년 우의정, 1711년 판돈녕부사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나가지 않았다. 1699년 아버지가 죽자 거상(居喪)을 주자의 가례에 의거하여 극진히 하였다. 학질을 앓다가 1714년 정월 세상을 떠났다.

 

숙종은 그의 부고 후 조회를 파하여 애도하였으며 친히 조시(弔詩)를 지어 보냈고, 2300여 명의 문상객이 방문했다 한다. 저서로 명재유고, 명재의례문답 (明齋疑禮問答), 명재유서등이 있다.

 

▲ 명재 윤증선생이 살던 곳     ©최영숙

 

 

윤증은 평소에 입지(立志)와 무실(務實)을 중요시하였다. ‘무실(務實)’의 실심실학(實心實學)이다. 그의 손자, 윤동원(尹東源, 1685-1741)도 윤증의 이와 같은 점을 전하고 있다입지(立志)의 독실함에 있어서는 성인의 성()도 나의 성과 같다. 배워서 성인에 미치지 못한다면 내 성에 힘을 다 쏟지 못한 부분이 있는 것이다.” 라고 하였고, 무실(務實)의 지극함에 있어서는 모두가 실리(實理)여서 사물마다 근간이 되지 않는 것이 없으니, 무실은 위로도 통하고 아래로도 통하는 공부이다.”고 했다.

 

윤증의 연보에서도 그가 입지와 무실을 (학문의) 근본으로 삼았는데, 이것은 곧 그의 가전지결(家傳旨訣)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점은 그의 학통이 성혼과 이이의 학문을 계승하는 우율(牛栗) 계통이었음을 상기하더라도 학통상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윤증은 초학자들에게는 이이의 격몽요결(擊蒙要訣)과 성혼의 위학지방(爲學之方)및 성혼이 발췌 편찬한 주문지결(朱門旨訣)을 반드시 추천하였다고 하는데, 이 책들에서 공통으로 역설하는 것이 성인(聖人) 지향의 입지이다.

 학통과 상관없이 윤증은 이황(李滉, 退溪)의 성리학도 위기(爲己)의 측면에서 존숭하였다. 그는 근래 퇴옹(退翁)이 편집한 이학통록(理學通錄)과 사우(師友) 간에 문답한 것을 읽어 보았더니, 위지기학(爲己之學)으로서 심신에 절실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고 하면서, 타인에게 이황의 글을 읽도록 권하였다. 그의 노강서원(魯岡書院)에는 자신이 지은 재규(齋規)와 이이의 석담서원재규(石潭書院齋規) 및 이황의 성학십도(聖學十圖)를 걸어 두고 후학들로 하여금 익히도록 하였다. 이는 모두 입지를 출발점으로 한 수양을 그가 매우 중요시하였음을 알 수 있는 사례들이다.

 

윤증의 실심실학(實心實學)은 출발에서 무실의 구호를 내세웠고, 그 무실은 행위의 결과가 실질·실효·실용 등 실제적 효과를 거두는 데 목적을 둔 것이었다. 이런 효과를 거두기 위한 무실 추구의 과정에는 성(() 등에 의거한 실심(實心)을 갖추는 일’, 수기(修己)의 조건에 대한 충족이 매우 강조되고 있었다. 그리고 실심을 갖추는 그의 수기는 무엇보다도 유학의 전통적 예()와 오륜(五倫) 도덕의 실천을 위한 수단으로 논해졌다. 이러한 것이 그의 실심을 중심에 둔 그의 성리학적 실학의 특징이었다.

 

이러한 시대 상황에서 윤증은 우율의 학문적 전통을 계승하여 무실이라는 차원으로 발전시켜 기호학파의 중요한 한 축을 이루었다. 그가 표방했던 실심실학은 후대의 탈성리학적인 실학과 구별되는 것으로써, 성실과 같은 실심을 바탕으로 실공의 효과를 목표로 삼았고, 소론의 현실주의·합리주의적 특성을 대표하였다.

 

윤증의 무실정신은 예의 실천에도 적용되었다. 그는 학술적인 시비 논쟁은 충분히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전제하면서도 그것을 정쟁으로 비화시키는 개인이나 세력에 대해서는 준엄한 비판을 가하였다. 실심을 갖추기 위한 수기를 완성할 수 있는 도덕적 행위로서의 예의 실천을 강조하면서도 예를 절대시하지 않았던 그의 사유 또한 무실 정신의 소산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조정에서 스무 번이나 벼슬을 권했으나 86세로 생을 마갈할 때까지 청을 수락하지 않았다. 선비정신을 높이 평가한 왕은 팔순이 넘은 명재에게 우의정을 자리를 권하였을 때에도 사양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의 생애에 조선시대 인조부터 숙종까지 4대 임금이 있었는데 군왕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않고 삼공(三公)의 지위에 오른 유일한 인물이라 그를 백의정승(白衣政丞)’이라 불렀다.

 

▲ 윤증 선생의 영정을 보다     ©최영숙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그의 죽음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숙종실록 55, 숙종 40130일 임신 2번째기사

 

1714년 청 강희(康熙) 53년 행 판중추부사 윤증의 졸기

 

행 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 윤증(尹拯)이 졸()하니, 나이 86세였다. 임금이 하교(下敎)하여 애도(哀悼)함이 지극하였고, 뒤에 문성(文成)이란 시호(諡號)를 내렸다. 윤증은 이미 송시열(宋時烈)을 배반하여 사림(士林)에서 죄를 얻었고, 또 유계(兪棨)가 편수(編修)한 예서(禮書)를 몰래 그 아버지가 저작한 것으로 돌려 놓았다가 수년 전에 그 사실이 비로소 드러나니, 유계의 손자 유상기(兪相基)가 이를 노여워하여 편지를 보내 절교하였다. 윤증은 젊어서 일찍이 유계를 스승으로 섬겼는데, 이에 이르러 사람들이 말하기를, ‘윤증이 전후로 두 어진 스승을 배반했으니, 그 죄는 더욱 용서하기 어렵다.’고 하였다.

 

숙종실록보궐정오 55, 숙종 40130일 임신 1번째기사 1714년 청 강희(康熙) 53

 

판중추부사 윤증의 졸기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윤증(尹拯)이 졸()하니, ()86세이었다. 부음(訃音)을 알리자,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윤 판부사(判府事)는 산림(山林)에서 덕()을 길러 일찍이 중망(重望)이 있었으니, 과인(寡人)이 존숭하여 신임(信任)함과 사림(士林)이 존경하고 본받음이 그 어떠하였겠는가? 정승에 오름에 미쳐 돈소(敦召)함이 더욱 간절했지만, 다만 정성이 부족하여 멀리 떠나려는 마음을 돌리지 못했으니, 결연(缺然)한 생각이 조금도 풀리지 않았다. 그런데 한 질병이 고질이 되어 갑자기 흉음(凶音)이 이를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했겠는가."

 

하고, 인하여 전례(前例)에 따라 예장(禮葬)을 내리도록 명하였다.

 

윤증의 자()는 자인(子仁)이고 파평인(坡平人)으로 문정공(文正公) 윤황(尹煌)의 손자이며, 문경공(文敬公) 윤선거(尹宣擧)의 아들이다. 천부의 자질이 화수(和粹)하고 깊고 중후하였으며, 어려서부터 가정의 학문을 이어받아 한 번도 외부의 유혹에 빠지는 일이 없었다. 소학(小學)으로부터 대인(大人)의 학문에 이르기까지 순서를 따라 올라갔으며, 오로지 내면 수양(修養)에 힘써 깊은 연못에 임하고 살얼음을 밟듯 삼가고 조심하며 80평생을 하루같이 지내왔다. 그 덕성(德性)을 충만하게 길러 화순(和順)한 모습이 외면에 나타남에 미쳐서는 보는 자들이 심취(心醉)되어 비록 평일에 미워하고 질투하던 자들도 스스로 모르는 사이에 마음을 돌려 존경하고 복종하였다. 대개 용모와 자태가 청수하고 위연(偉然)하였으며 기상이 높고도 깊어서 그 앉은 모습은 마치 소상(塑像)과 같았는데, 접촉하면 봄볕과 같았으니, 그 하늘에서 품부(稟賦)한 바가 이미 빼어났고 성경(誠敬)으로 함양(涵養)한 탓으로 용모(容貌)에 나타나는 바가 자연 그러하였던 것이다. 그 진실한 심지(心地)와 독실한 공부는 이 문순공(李文純公)001) 이후 오직 한 사람뿐이었으며, 문장(文章)은 온후(溫厚)하고 간측(墾惻)하여 중화(中和)의 명성(名聲)이 있었으니, 후세에 덕을 아는 자는 이에서 고징(考徵)할 바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간에 어버이와 스승의 망극한 변고(變故)를 만나 처신(處身)함이 간혹 절도(節度)에 어긋남이 있었으므로, 군자(君子)가 이를 애석하게 여기고 그 뜻을 슬퍼했다고 한다. 세상에서 명재 선생(明齋先生)이라 일컬었다. 그 아우 윤추(尹推)는 돈후(敦厚)하고 청엄(淸嚴)하여 집에 있어서는 순독(純篤)한 조행(操行)이 있었고 고을을 다스리매 특이한 치적(治績)이 있었으며, 만년에 장령(掌令)으로 징소(徵召)를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내용이다.

 

 

▲ 명재고택에서 단체사진을 담다     © 최영숙

 

 

백의정승(白衣政丞) 명재 윤증 고택은 산을 뒤로 하고 고즈넉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김경란 문화해설사 선생님의 설명을 들었다. “명재 윤증 선생님은 이곳에서 살지 않았다. 사셨던 곳은 이곳에서 7~8분가면 있는 쓰러져가는 초가집에 살았다. 아드님과 제자들이 지어드렸지만 과분하다고 살지 않았다. 아들도 들어오지 않았고 손자 대에서 들어와 살았다. 현재까지 종택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고 했다.

 

사랑채의 사랑방과 골방에 있는 여닫이 미닫이 문은 미닫이로 열고 다시 문틀과 뭍짝이 맞물려 여닫이로 열리는 구조이다. 사랑방 안에는 여자가 들어올 수 없었다. 안채에서 음식 등을 골방을 통해서 방 사이의 칸막이를 완전히 열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문을 열고 닫고 다시 원위치로 만드는 모습이 즐겁게 했다. 또한 문에 걸리지 않도록 기둥사이에 모두 들어가게 하고 사랑채 바깥문은 서로 맞닿는 부분에 홈과 돌출로 만들어 바람을 차단한다고 했다. 명재고택의 독특한 양식은 대한민국에서 이곳밖에 없다.”고 했다.

 

안채로 들어갈 때도 내외벽이 있었다. 내외벽의 아랫부분을 통해서 안채에서 누가 왔는지를 가늠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또한 시댁에서 언제나 이었을 며느리가 개인공간을 가질 수 있도록 올캐와 시누이 등이 집안에서도 따로 만날 수 있는 작은 공간이 있었다.

 

김경란 문화해설사 선생님이 질문했다. 아들과 며느리는 어느 방향에서 살았을까요?

동쪽이요. 좋은 기운이 와서 자손이 번창하라고요.” 시흥의 문화해설사 박종남 선생님이 답했다.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과의 여행은 늘 충만하다.

 

명재고택의 세세한 아름다움은 끝이 없었다. 굴뚝의 위치도 문을 살짝 비켜나가 시야를 방해하지 않고 있었다, 창문하나 하나가 밖의 풍경을 볼 수 있게 액자 역할을 하고 있었다.

 

▲ 명재고택의 항아리와 망초     ©최영숙

 

마당 한 그득 있는 항아리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물을 정화시켜주는 향나무 아래에 있는 물을 사용해 만든 명재고택의 종갓집, 간장, 된장, 고추장들이며 전국적으로 유명하다고 했다.

 

윤증 고택은 그냥 지나치면 일반 사대부가문의 집이었다. 그러나 설명을 들을수록 장인의 솜씨로 실용적이고 과학적으로 지음과 동시에 섬세하게 여인들을 배려해서 지은 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을 떠나는 것은 늘 새로운 풍경을 만나는 것이다. 맹자기행은 큰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 유동성이 있다.

 

▲ 계룡도령 춘월의 처소에서 차를 마시다     ©최영숙

 

맹자기행 예정에 없었던 윤증선생이 실제로 살았던 곳이며 현재는 영정과 제향을 올리는 유봉영당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명재고택에서 만났던 계룡도령 춘월 조현화 씨를 만났다. 조현화 씨는 유봉영당 아래 있는 성모당에서 거주 한다고 했다. 조현화씨는 윤증 선생이 생전에 살았던 곳을 알려주었다. 이제는 잡풀이 무성하게 자라고 작은 표지석만이 보였다. 유봉영당에서 놀라운 영정을 만났다. 유증 선생의 영정은 놀라웠다. 눈에서 빛을 쏘는 것 같았다. 현현히 살아 있는 그 눈빛은 범접하기 어려웠다. 선비의 칼 같은 기개를 보는 듯했다. 조현화씨에게 성모당에서 차를 대접받았다. 감사했다.

 

▲ 죽림서원(황산서원)     © 최영숙

 

회니시비(懷尼是非)로 서인(노론/소론)분열이 첫 시작된 죽림서원(황산서원)으로 출발했다.

 

1653(효종4) 금강의 지류가 흐르는 죽림서원(황산서원)에서 송시열과 윤선거가 만나 윤휴 문제를 두고 밤늦도록 논쟁을 벌였다.

 

윤휴는 논어, 맹자, 중용, 대학, 사서의 경전을 주희와는 다르게 해석을 내렸는데 송시열은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비판했다.

 

논쟁 대상이었던 윤휴는 '중용해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기가 처음 생기는 것을 태극이라 하고 음양이 나뉘는 것을 양의라 하며 기가 합해서 형태를 이룬 것을 사상이라 한다. 태극이 생기면 음양과 양의를 주관하고, 나뉘면 태양.소음.소양.태음이 된다. 사상은 합해지면 음양과 체용을 겸하니 태극은 기이다." 태극을 기라고 규정한 것은 태극을 이라고 해석해 온 주자학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윤휴는 만물의 근원에 대한 생각에서부터 주희와는 다른 견해를 가진 독창적 사상가였다.

 

논쟁은 송시열과 윤선거 사이에서 벌어졌다. 송시열이 사문난적으로 규정한 윤휴를 윤선거가 옹호하고 나선 것이었다.

 

"윤휴는 성인에 가까울 만큼 학문이 고명한 사람이어서 나는 그의 학문을 다 측량할 수 없습니다." 즉 윤휴가 성인의 경지에 이른 고명한 학자이므로 경전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지 않느냐는 말이었다. 송시열이 이를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이 논쟁은 나중에 윤선거의 아들 윤증과 송시열의 회니시비(懷尼是非)로 발전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그 후 회니시비는 조선후기 숙종 때 윤증과 송시열이 서로를 비방했던 사건이며, 집권세력이었던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파되는 계기가 된 사건이다. 이러한 논쟁의 지역적 배경이 된 곳이 논산이다. 송시열이 살던 곳이 회덕(懷德)이고, 윤증이 살던 곳이 이성(尼城)이어서 그 첫 자를 따라 회니시비(懷尼是非)라 했다.

 

송시열과 윤증의 부친인 윤선거는 김장생의 수하에서 수학한 동문이었다. 하지만 병자호란에 강화도 사건이 일어나면서 둘 사이의 관계는 조금씩 바뀌게 되었다. 청군을 피해 강화도로 피난 갔던 윤선거가 절의를 지키지 못하고(친구와 부인이 자결) 청군에 항복했던 것이다. 송시열을 비롯한 조정에서는 의리를 버리고 목숨을 부친 윤선거를 비난했고, 이로 인해 윤증은 부친을 따라 과거도 단념하고 평생을 자숙하며 재야에서 지내게 되었다. 중앙에서는 몇 차례 명망이 높았던 그를 불러냈지만 끝내 조정에 나아가지 않았다.

 

맹자기행을 하면서 여러 방면의 자료들을 읽으면서 의문점이 들었다. 죽림서원에서 서인학자들과 논쟁을 벌였던 시점이 1653(효종4)이었다. 병자호란 후에도 죽림서원에서 만나 윤휴에 대하여 토론을 했다. 그렇다면 그때까지는 송시열와 윤선거의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는 것이다. 죽림서원에서의 논쟁 후에 사이가 벌여졌다고 봐야 할 듯했다.

 

▲ 죽림서원에서 심우일 선생님이 설명하다     ©최영숙

 

1669(현종 10) 아버지 윤선거가 사망하자 아들 윤증이 스승 송시열을 찾아 묘갈명을 부탁하였다. 당시는 선비가 세상을 떠나면 지인들이 묘갈명을 써 주는 것이 관례였다. 하지만 송시열은 비문에 윤선거가 윤휴를 옹호했던 점을 비판하는 내용을 모욕적으로 담았으며, "나는 다만 기술만 하고 짓지는 않았다."고 마무리를 하여 무성의한 태도를 보였다. 또 송시열은 윤선거가 병자호란 때 자결한 처를 두고 도망쳐 나온 일을 가지고 야유하는 뜻을 적었다. 이에 윤증이 송시열에게 수년에 걸쳐 장문의 편지를 보내거나 직접 찾아가 비문의 개찬을 청했음에도 불구하고 송시열은 비문의 요지에 전혀 손대지 않은 채 글자 몇 군데만 고쳐 보내고는 했다. 이 일로 사제지간이었던 두 사람의 관계는 멀어지게 된다. 그러나 두 사람이 서로를 비방하며 적대시하게 된 원인은 비단 아버지 윤선거의 묘갈명뿐만이 아니라, 당시 최고의 석학으로 평가되었던 윤휴에 대한 평가를 두고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와 송시열 사이에 의견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회니시비는 주자학 도통주의에 입각하여 정국을 운영하려 했던 노론계와 이의 경직성을 비판하고 현실적으로 정치를 운영하고자 했던 소론계의 대립이 송시열과 윤증 간의 감정과 얽혀 일어난 사건이었다. 이후로 노론과 소론은 경종(景宗영조(英祖정조(正祖) 대로 이어지며 격렬히 대립했으나, 18세기 중반 이후에는 노론이 승리하면서 노론 일당의 전제정치 체제로 굳어졌다.

 

병신처분(丙申處分)1716(숙종 42) 송시열(宋時烈)과 윤증(尹拯) 사이에서 발생한 회니시비(懷尼是非)에 대해 국왕이 판정한 처분을 말한다. 병신처분은 이 시비에 대해 윤증의 잘못이라고 판정한 사건이다. 병신처분은 사제 간의 옮고 그름에 대한 판정을 넘어 양인을 영수로 하는 노론과 소론 사이에 정치적 입지에까지 영향을 미쳐, 정국에서 소론 세력의 입지가 위축되게 되었다.

 

서인에서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선 배경이 된 죽림서원에서 심우일 선생님이 윤증과 윤휴, 송시열의 신념으로 무장된 사상과 애증에 얽힌 개인사가 역사적인 붕당정치로 이어지는 과정을 설명했다. 시절은 흘러 사람들은 그들의 치열했던 이념 싸움을 옛이야기로 듣고 대나무 숲은 무심하게 바람에 일렁이고 있었다.

 

▲ 달봉가든에서 식사를 하다     © 최영숙

 

늦은 점심을 들기 위해 강경읍에 있는 맛 집 달봉가든으로 갔다. 강경에서는 해산물이 풍부해서 개도 조기를 물고 다닌다.”는 말이 있다고 한다.

 

속담을 반증하듯 밥상에 이렇게 많은 젓갈이 오르는 줄 몰랐다. 접시에 젓갈 이름들이 적혀 있었다. 칼칼하면서도 깔끔한 점심을 들었다.

 

달봉가든은 황해도젓갈도 함께 운영하고 있었다. 어머니 박종순 씨 뒤를 이어 이현달 씨가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

 

이현달 씨는 올해는 새우젓이 많이 올랐다. 240Kg 한 드럼이 1200만원에 경매됐다. 남은 재고들이 많지 않아 가을까지도 비싼 가격을 유지할 것 같다.”젓갈류가 달작지근하면 그건 미원을 넣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좋은 새우젓은 껍데기가 입천장에 붙는다.”고 했다. 멸치액젓과 새우젓을 샀다.

 

▲ 정이품송     ©최영숙

일행들은 속리산으로 향했다.

 

천연기념물 103호인 600년 된 정이품송이 우리를 맞이했다. 1464년 세조가 속리산에 행차할 때 가마가 소나무 아래가지에 걸릴까 염려하여 연 걸린다.”고 하자 가지를 들어 어가를 통과시켰다고 한다. 이에 세조가 정이품송 벼슬을 주었다고 전해진다. 20043월 중부지방 폭설시 소방용수를 살수하여 제설작업을 하는 중 좌측 2개의 가지가 부러지는 피해를 입었다. 정이품송 앞에서 사진을 담았다.

 

▲ 법주사의 풍경     ©최영숙

 

숙소에 짐을 풀고 법주사로 갔다.

 

법주사는 신라 진흥왕 14(553)에 의신조사가 창건하였다. 의신조사(義信祖師)가 천축(天竺, 印度)에 갔다가 흰 노새에 불경을 싣고 와서 절을 지을 터를 찾아다니는 길에 흰 노새가 지금의 법주사 터에 이르러 발걸음을 멈추고 울었다고 한다. 의신조사가 노새의 기이한 행적에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니 아름다운 경치에 비범한 기운도 느껴져서 그곳에 절을 지은 후 절 이름을 인도에서 가져온 경전 즉, 부처님의 법이 머물렀다는 뜻에서 법주사라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고려시대에는 뛰어난 고승대덕들이 차례로 법주사에 주석하며 수차례에 걸쳐 중창이 이루어졌다.

 

조선시대 세조 임금도 법주사에 들러 복천암에 머물던 신미대사를 도와 절을 크게 중창했다. 조선 중기에는 60여 동의 전각과 70여 개의 암자를 지닌 대찰이었는데, 임진왜란 때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었다. 이후 1605(선조 38)부터 1626(인조 4)에 걸쳐 사명대사와 벽암각성 스님이 팔상전 등 전각을 중건했다.

 

▲ 국보 팔상전과  1964년 완공된  미륵불상 알에서 단체사진을 담다     ©최영숙

 

1939년에 당시 주지였던 장석상 스님이 의뢰해서 당대 최고의 조각가였던 김복진이 법주사 미륵불상을 조성했으나 한때 중단되었다가 1964년 완공했다.

 

법주사에는 대한민국의 유일한 목탑인 팔상전(국보 제55)이 목탑으로서는 유일한 지정문화재가 되었다. 팔상전 옆 사방이 트인 전각 안에 모셔진 희견보살상(보물 제1417)도 법주사에만 조성되어 있는 보살상이다. 부처님께 향불을 공양할 것을 서원한 보살이 희견보살로 뜨거운 향로를 머리에 이고 있는 모습이다.

 

법주사 국보는 쌍사자 석등: 국보 제5, 팔상전: 국보 제55, 석련지: 국보 제64호이다.

 

▲ 복천사 입구의 '이뭣고 다리'를 지나다     ©최영숙

 

복천암으로 들어서는 다리 이름은 이뭣고였다. 일상생활 속에서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그것'. 아침에 눈을 뜨고 잠들 때까지 견문각지(見聞覺知)하는 이것이 무엇인고(이뭣고)'라는 화두는 혜능 대사의 어록인 육조단경에 처음 등장한다.

 

남악회양(南岳懷讓· 677~744) 스님이 육조 혜능 스님을 맨 처음에 뵐 때 육조 스님이 물었다.

"그대는 대체 어디서 왔는고?" 숭산(오조홍인 대사가 중생을 제도하던 곳)에서 왔습니다."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육조 혜능과 그의 수제자 중 한 분인 남악회양 스님과의 대화에 등장하는 '습마물 임마래'가 바로 '이뭣고' 화두의 연원인 것이다.

 

문헌에 오른, 화두가 1700여 가지인데, '이뭣고?' 화두 하나만을 타파하면 1700공안이 일시에 투과 된다는 것이다.

 

법주사에서 내려올 즈음 늦게 출발한 도반이 도착했다는 전화가 왔다. 서둘러 내려왔다.

 

비는 오는 듯 마는 듯 흐린 날씨였지만 상쾌한 기운이 도는 저녁이었다.

 

▲ 감자전, 호박전을 부치다     ©최영숙

 

저녁은 돼지고기와 감자전, 호박전을 곁들여 저녁을 먹고 이야기들을 했다. 맹자를 같이한 소회를 물었다. 심우일 선생님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이라고 했다.” 어찌 선생님뿐 이겠는가? 함께 공부한 시간들과 그 진지하면서 흥미진진했던 질문과 각자의 답들을 했던 시간들을 오래도록 기억할 것이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201673일 맹자기행의 마지막 날, 정조대왕이 존경한 우암 송시열의 얼이 남겨있는 화양구곡으로 떠났다.

 

▲ 화양구곡 만동묘 앞에서 단체사진을 담다     ©최영숙

 

송시열(宋時烈 선조1607 ~ 1689숙종)은 자()는 영보(英甫)이고 호()는 우암(尤庵), 우재(尤齋), 화양동주(華陽洞主)이며, 시호(諡號)는 문정(文正)이다. 본관(本貫)은 은진(恩津)으로 아버지는 사옹원봉사(司饔院奉事) 송갑조(宋甲祚), 어머니는 선산곽씨(善山郭氏)이다.

 

1607(선조 40) 그의 외가가 있는 충북 옥천군 이원면 구룡리(, 충북 옥천군 이원면 용방리)에서 출생하였다. 8세 때부터 회덕(懷德)[현 대전광역시 대덕구 송촌동]에 있는 친척인 송준길(宋浚吉)의 집에서 함께 공부하게 되면서 훗날 양송(兩宋)이라 불리는 특별한 교분을 맺게 되었다. 송시열은 19세 때인 1625(인조 3)에 청주의 주성동(酒城洞)에서 한산이씨 이덕사(李德泗)의 딸과 혼인을 하였으며, 1630(인조 8)에 충남 연산(連山)의 김장생(金長生)에게 나아가 성리학과 예학을 배웠고, 1631년 김장생이 죽은 뒤에는 그의 아들 김집(金集)의 문하에서 학업을 마쳤으며, 다음해에 회덕으로 돌아왔다.

 

27세 때에 1633(인조 11)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하면서부터 그의 학문적 명성이 널리 알려졌고, 최명길(崔鳴吉)의 천거로 관직에 나아갔다. 그리하여 경릉참봉(敬陵參奉)을 거쳐 1635년에는 봉림대군의 사부로 활동하였는데, 이듬해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왕이 치욕을 당하고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이 인질로 잡혀가자 낙향하여 학문에 몰두하였다. 1649년 효종(孝宗)이 즉위하면서 다시 벼슬길에 나아갔지만 다음해 김자점(金自點) 일파가 청나라에 조선의 북벌계획을 밀고함으로써 송시열은 다시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 뒤 10년 가까이 향리에서 은거하면서 송준길과 함께 서적편찬 및 후진양성에 몰두하였다.

 

그는 주자학의 대가로, 조광조(趙光祖)[1482~1519]·이이·김장생으로 이어지는 기호학파(畿湖學派)의 학통을 계승하여 발전시켰다. 이황(李滉)의 이원론적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배격하였고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하였다. 예론(禮論)에도 밝아 복제(服制)와 중요한 국가 전례 문제에 깊이 관여하여 두 차례의 예송논쟁을 겪기도 하였다. 성격이 독선적이고 강직하여 교우관계가 원만하지 못했고 그것이 붕당의 요소가 되기도 했다. 그의 문하에서 권상하·김창협(金昌協이단하(李端夏이희조(李喜朝정호(鄭澔) 등 많은 인재가 배출되어 조선 후기 기호학파 성리학을 이끌어갔다.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당파간의 칭송과 비방이 무성하였으나, 1716년의 병신처분(丙申處分)1744년의 동국 18현의 한 명으로 문묘(文廟) 배향되어 그의 학문적 권위와 정치적 정당성이 공인되었고 영조 및 정조 대에 노론의 일당 전제가 이루어지면서 그의 역사적 지위는 더욱 견고하게 확립되고 존중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살아서 1000번 죽어서 2000번 기록되었다는 송시열과 인연이 깊었던 화양구곡으로 들어섰다.

 

▲ 명나라 황제를 모시고 있는 만동묘에 오다     ©최영숙

 

송시열과 화양동(華陽洞)과의 인연은 매우 깊다. 문헌상에 기록된 것을 바탕으로 볼 때 송시열이 화양동을 처음 찾은 것은 1651(효종 2)이었으며, 1666(현종 7) 화양동에 계당(溪堂)을 짓고 본격적으로 거처한 이래 1688(숙종 14) 4월 마지막으로 화양동을 떠날 때까지 무려 23번이나 왕래하며 기거하였다.

 

송시열은 암서재(巖棲齋)에 거처를 마련한 이후 화양동 곳곳에 명나라에 대한 존모(尊慕)의 자취를 남겼다. 바위마다 만절필동(萬折必東)’·‘비례부동(非禮不動)’ 같은 선현의 필체나 제왕의 어필을 새겼다. 특히 비례부동은 민정중이 연경에서 구해와 송시열에게 선물한 것으로 명나라 의종 황제의 필적이었다. 송시열은 이를 바위에다 새겨 놓고는 그 곁에 환장암(煥章庵)’이란 암자까지 지어 그 진본을 보관하게 했다.

 

화양구곡(華陽九曲)의 유래는 주자(朱子)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본떠 송시열이 지정하고 그의 수제자인 권상하(權尙夏)가 이름붙인 것이라 한다. 구곡 중에서 읍궁암(泣弓巖)은 효종이 승하하자 송시열이 새벽마다 크게 울었던 바위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서원(書院)에서 가장 많이 제향된 인물이 송시열이다. 그는 총 70여 곳의 서원과 사우(祠宇)에서 제향되고 있으며, 그가 모셔진 서원 중 37개소가 사액을 받았다는 것은 그의 높은 위상을 말해준다고 하겠다.

 

많은 서원중에서 가장 존중되었고, 막강한 권력을 행사한 곳이 바로 화양서원이었다. 화양서원은 1695(숙종 21) 그의 수제자였던 권상하에 의해 창건되어 기호사림의 구심점으로서 사론(士論)을 형성하며 조선 후기 사회에 군림하였던 서원이었다.

 

▲ 송시열의 글과 영조대왕의 친필이 들어간 송시열의 영정     ©최영숙

 

정조는 송시열에게 각별한 존경심을 표했다. 송시열 영정(왼쪽 상단이 송시열의 친필 '자신을 경계하는 글'이고, 중앙 상단이 정조의 친필 어필이다)에 기록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정조는 평소 우암 송시열을 존경하여 그의 영정에다가 친히 어제시를 남겼다. 이는 송시열 생전인 1683년에 작성된 영정들 중 송시열 자신이 자신 스스로를 경계하는 사자성어를 쓴 영정의 중앙부 상단에 친필로 기입하였다. 즉위 후 정조는 송시열을 송자(宋子), 송부자(宋夫子[40])라 하여 국가의 스승으로 추대하고 송시열의 문집과 자료를 모아 국비를 들여 송자대전으로 간행하였다.

 

송부자(宋夫子 우암 송시열) - 정조대왕 御製

 

큰 인물은 하늘이 낸다 하였다. 대성 공자를 하늘이 내리시었고 그 뒤를 이을 주자도 하늘이 내셨다는 것이요. 주자의 학문을 송자가 이었으니 송자도 또한 하늘이 내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자가 아니면 공자의 도를 전할 수 없었고 또한 송자가 아니면 주자의 도가 이 땅에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 그렇다면 공부자와 주부자와 송부자의 도는 천지사이에 날과 씨와 같고 우주의 기둥과 대들보처럼 우뚝하니 이 세 어른 중에서 한분만 안 계셔도 아니 된다는 것이다. 지금의 시대는 홍수가 범람하여 산허리를 싸돌고 언덕에 오르는 급박하고 질서 없는 시대에 처했으니 어찌 분주히 노력하여 세 부자의 도학을 취하지 않겠는가?

 

숙종 대에 사사받은 송시열은 정조 대에는 영정에 칭송하는 임금의 시를 하사 받았다. 송시열의 문하 사람인 김종수(1728)가 세손 시절의 정조의 스승으로 그를 지도하였고, 노론의 당론에 저항하여 세손을 보호한 바 있다. 스승이 추앙받기 위해서는 후학을 잘 키워 그 힘이 커야 한다고 했던가? 그런 의미라면 조선에서 가장 추앙받던 공자와 더불어 송자라는 칭호를 받은 송시열을 따를 학자는 없었다.

 

▲ 만동묘에 임진왜란 때 원군을 보내준 신종과 명나라 마지막 황제 의종의 위폐가 모셔져 있다.     © 최영숙

 

 

화양서원과 함께 자리 잡고 있는 것이 만동묘(萬東廟)에 왔다, 만동묘는 임진왜란 때 구원병을 보내준 명()의 신종(神宗)과 마지막 황제인 의종(毅宗)을 기리며 청에 대한 북벌의 대의를 간직하고 있었던 송시열의 유지를 받들어 1703(숙종 29) 권상하 등에 의해 건립된 것이다. 만동묘는 임진왜란 때 조선에 원군을 보내준 중국 명나라 황제 신종(神宗), 명나라 마지막 황제 의종(毅宗)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일제강점기 때 만동묘 앞에 있던 비석은 정으로 모두 쪼여졌다. 일제는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운 명나라 황제를 추앙하는 글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맹자기행에서 와서 만동묘를 바라보는 심정이 복잡했다. 계단은 모두 의미가 있었다. 3단은 천지인, 5단은 인의예지신, 맨 윗 단의 9개 계단은 황제가 있으니까 가장 큰 수를 표한다고 했다. 층계는 바로 서서 오를 수가 없었다. 옆으로 기어서 올라가는 구조였다. 도포를 입은 우리의 선조들이 조심조심 기다시피 올랐을 생각을 하니 당대에는 그 또한 명분이고 의였으나. 현대에는 철저한 사대주의가 아닌가 싶었다. 명나라가 조선에 원군을 파견해서 멸망한 원인도 있지만 국가 간의 도움이란 최우선적으로 자국의 이익을 위하기 때문이다. 조선이 명나라에 앞서 왜의 침략을 받은 것도 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후에도 명나라에 대한 지나친 의리 때문에 병자호란을 맞아 백성들이 잡혀가고 도륙당하지 않았는가 싶었다. 우리의 위정자들은 백성과 명나라 중 누구를 위한 의인가 싶었기 때문이다.

 

화양서원은 우암 송시열이 은거하였던 곳에 세워진 서원으로써 조선시대 학자들의 결집장소였으며, 1999년 국가지정문화재(사적) 지정 후 2002~2004년까지 유지가 남아있는 건물 8동을 복원 정비하였다.

 

▲ 송시열이 만녀에 은거하면서 제자를 가르치던 암서재     © 최영숙

 

암서재는 송시열이 만년에 화양동에 은거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 외에도 화양동에는 충효절의(忠孝節義), 비례부동(非禮不動) 등 많은 애각사적이 산재해 있어 송시열의 북벌애국사상과 민족자존정신이 깃든 유적의 성격과 조선성리학의 중심지로서 일제에 의하여 철저하게 파괴되고 왜곡된 사적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맹자기행를 통해 송시열을 기록한 글들을 읽으면서 다시 보게 되었다.

 

송시열은 유교 예법을 고수하여 매우 보수적이라고 평가를 받고 있지만 실제 사회문제에도 관심을 가지고 여러 대안을 제시하였다. 양반에게도 군포를 부과하는 호포제의 실시를 주장하였다. 양반의 노비증식을 억제하고 양민이 노비화되는 것을 막는 노비종모법을 옹호하였다. 평안도와 함경도의 인재의 등용하고 서얼에게 관직을 줄 것을 주장하고, 절개를 지킬 것을 지나치게 강요하는 것은 비인간적이라고 하여 양반부녀자들의 개가와 재혼을 허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양반들이 군비부담을 회피하자 양반들의 군비 부담을 연구했으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판단, 양민들의 군비부담을 줄이는 호포제의 실시하는 것이었다. 군포를 납부하면서 납부 수를 대장에 기록, 문서화하여 군비 부담의 비리, 폐단을 없앴다.

 

그는 반역과 배신, 훼절을 미워하였고 경멸했다. 의리를 저버리는 것, 배신하는 것, 절개를 훼손하는 것을 가장 수치스럽게 여겼다. 1669(현종 10) 우암 송시열에 의해 신덕왕후 복위가 건의됐다. 또한 소현세자빈 강씨의 복권 여론을 조성했고, 사육신의 신원과 명예 회복, 생육신의 포상을 주장하였으며, 노산대군과 여산군부인을 다시 왕과 왕비로 복위시켜야 된다고 주장했다. 결국 송시열의 그와 같은 노력으로 1691년 사육신은 충절의 상징으로 복권되고 1694(숙종 20) 갑술환국 직후에는 노산군이 대군으로 승격되었다가 곧 추복되었다. 노산군은 묘호를 단종(端宗)이라 하고, 능호를 장릉(莊陵)이라 했다.

 

우암 송시열에 의해 조선의 왕에 대항했던 또는 핍박받았던 사람들은 복원되었다.

 

그는 자신의 유배를 순교라고 확신했다. 자손들과 질손들에게 남긴 유서에서 '맹자와 주자가 사설(邪說)을 물리치되 죽도록 미워하기를 마치 원수처럼 여기는 데에 이르렀던 것이다. 처음에는 털끝만큼의 어긋난 것도 나중에는 천리 거리만큼 어긋나게 되는 것인데, 더구나 처음부터 크게 어긋난 것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느냐. 그 사람[윤선거를 가리킴]인들 종말이 이 지경에 이를 줄이야 어찌 알았겠느냐. 애석하기 그지없다. 나는 변변치 못한 하찮은 사람으로 망녕되이 맹자와 주자가 사설(邪說)을 배척한 일을 본받아, 난신적자(亂臣賊子)는 누구든지 그를 죄줄 수 있다는 교훈을 독신(篤信)한 소치로 결국 유배되는 참사(慘事)를 당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나는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유배와 1689년 사형에 이르러서는 그는 자신의 사형을 고통이라 생각하지 않고 의를 위한 당연한 순교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송시열은 유언을 통해 <학문은 마땅히 주자를 종주로 삼고, 사업은 마땅히 효묘(孝廟)의 대의를 종주로 삼으라> 고 했다.

 

▲  풍천제에 학생들이 공부하다 © 최영숙

 

 

송시열의 묘로 이동했다.

 

숙종실록 21, 숙종 1563일 무진 2번째기사

 

1689년 청 강희(康熙) 28년 송시열의 졸기

대신과 비국(備局)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引見)하였다. 이때 우의정(右議政) 김덕원(金德遠)이 또한 새로 일을 보면서 같이 입시하였는데, 임금이 돌아보며 이르기를,

 

"지난 날의 일은 대신을 대우하는 도리에 어긋남이 있었으니, 마음속으로 항상 미안하게 생각한다."

 

하고, 이어서 위로하고 효유(曉諭)하기를 심히 지극히 하였다. 영의정 권대운(權大運)이 말하기를,

 

"이현일(李玄逸)은 박학 군자(博學君子)이니 마땅히 자주 강연(講筵)에 입시(入侍)하게 하고, 인하며 국자 좨주(國子祭酒)를 겸하게 하면 사자(士子)의 긍식(矜式)377) 이 될 만합니다. 그가 이부(吏部)378) 를 면하려고 하는 것은 거짓말이 아니므로 만약 그 원에 따라 오로지 경학(經學)에만 책임을 맡기면 반드시 보탬이 있을 것입니다."

 

하고, 좌의정 목내선(睦來善)과 김덕원이 또 말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가하다."

 

하였다. 목내선과 권대운이,

 

"청컨대 천주(薦主)379) 를 골라서 별도로 인재를 추천하게 하되, 적절한 재주를 갖추지 않았다면 천주를 좌죄(坐罪)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받아 들였다. 임금이 박정신(朴廷藎)의 옥사(獄事)를 물으니, 지의금(知義禁) 유명천(柳命天)이 대신(大臣)에게 묻기를 청하였다. 김덕원이 말하기를,

 

"박정신·김기문(金起門변이보(卞爾輔)는 모두 숨기는 정상이 있고, 한석조(韓錫祚)는 사행(使行) 때 뇌물을 준 일 때문에 나치(拿致)되었는데, 그때의 수역(首譯)이 이미 죽었으므로 한석조가 반드시 고하지 아니한 것이니, 박정신에 비하여 차이가 있습니다 하였다. 목내선이 말하기를,

 

"한석조는 진실로 세 역관(譯官)과는 다름이 있고, 또 고신(栲訊)을 세 차례나 겪었으니 용서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드디어 박정신 등은 인하여 형신(刑訊)을 가하고, 한석조는 배소(配所)로 도로 보내도록 명하였다. 병조 판서(兵曹判書) 민암(閔黯)이 병조에 당상 군관(堂上軍官)을 다시 설치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이보다 앞서 홍중보(洪重普)가 병조 판서로 있을 적에 30()을 설치할 것을 아뢰어, ()은 금군 별장(禁軍別將)에 붙였는데, 남구만(南九萬)이 정승이 되었을 때에 임금에게 아뢰어 혁파하였기 때문에 민암이 이와 같이 청한 것이다.

 

▲ 송시열의 묘   © 최영숙

 

민종도(閔宗道)가 말하기를,"전 교관(敎官) 성대경(成大經)이 일찍이 상소하여 윤선도(尹善道)를 신구(伸救)하다가 정거(停擧)된 지 10년이 되고, 또 효행(孝行)이 있으니 조용(調用)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고, 권대운이 이어서 말하니, 임금이 6품 관직에 서용(敍用)하라고 명하였다. 지평(持平) 이준(李浚)이 전에 아뢴 말을 거듭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고, 다만 허윤(許玧)은 먼저 파직하고 뒤에 추고(推考)하라고 명하였다. 민암이 말하기를"송시열(宋時烈)의 지극히 흉하고 악함은 국문을 기다리지 아니하고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조종(祖宗)께서 나라를 세움이 인후(仁厚)하여 일찍이 대신을 국문하지 아니하였으니, 대신에게 물어서 처리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자, 임금이 대신에게 물으니, 권대운이 말하기를,

 

"송시열의 죄범(罪犯)은 흉역(凶逆)하나, 나이가 80이 넘었으므로 국문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상께서 참작해 처리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목내선과 김덕원의 말도 같았다. 우윤(右尹) 목창명(睦昌命)은 말하기를"신이 대각(臺閣)에 있을 때에 국문하기를 굳이 청하였으나 의논하는 이가 모두 잘못이라고 하니, 바로 처분을 내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의 말이 이와 같으니 참작하여 사사(賜死)하되, 금부 도사(禁府都事)가 갈 때에 만나는 곳에서 즉시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이때 송시열이 제주(濟州)에서 나치(拿致)되어 돌아오는데 바다를 건너와서 중궁(中宮)을 이미 폐한 것과 오두인(吳斗寅박태보(朴泰輔)가 간하다가 죽은 것을 듣고는, 드디어 먹지 아니하고 정읍현(井邑縣)에 이르러 사사(賜死)의 명을 받자, 이에 유소(遺疏) 두 본()을 초()하여 그 손자 송주석(宋疇錫)에게 주어 다른 날을 기다려 올리게 하고, 또 훈계하는 말을 써서 여러 자손에게 남겼다. 아들 송기태(宋基泰)가 말하기를"국가에서 형벌을 쓸 때 현일(弦日)380) 을 꺼리니, 마땅히 이를 따라야 할 것입니다."

 

하니, 송시열이 들어 주지 아니하며 말하기를,

 

"내가 병이 심하여 잠시를 기다릴 수 없으니, 명을 받는 것을 늦출 수 없다." 하고는 드디어 조용히 죽음에 나아가니, 이때 나이가 83세이다.

 

송시열은 은진(恩津)사람인데 그 아버지는 송갑조(宋甲祚)이다. 일찍이 꿈에 공자(孔子)가 여러 제자를 거느리고 집에 이르는 것을 보고 송시열을 낳았기 때문에 소자(小字)를 성뢰(聖賚)라고 하였다. 천자(天資)가 엄의 강대(嚴毅剛大)하여 어려서부터 이미 성학(聖學)에 뜻을 두었고, 자라서는 김장생(金長生)에게 배웠다. 뜻이 독실하고 힘써 실천하여 더욱 채우고 밝힘을 가하니, 마침내 동방 이학(東方理學)의 적전(嫡傳)이 되었다. 대저 그 학문은 일체 주자(朱子)를 주()로 하였고, 동유(東儒)로는 이이(李珥)를 제일로 삼았다. 그 언행(言行어묵(語默출처(出處진퇴(進退)는 움직이면 주문(朱門)의 법을 따랐으며, 그 성취(成就)한 바에 대하여 논하면 그 높고 정밀하며 멀고 큼은 근세(近世)의 뭇선비들의 미칠 바가 아니다.

 

병자년381) 이후로 관구(冠屨)382) 가 무너진 것을 분하게 여겨 여러번 불러도 나아가지 아니하다가, 효종이 처음 정무(政務)를 볼 때 김상헌(金尙憲김집(金集), 여러 어진이와 더불어 조정에 나아갔다가 곧 돌아왔다. 효종이 큰 뜻을 가지고 송시열과 더불어 일을 함께 할 만한 것을 알고는, 김익희(金益熙)를 보내어 성의(聖意)를 비밀리에 유시(諭示)하니, 드디어 계합(契合)383) 이 융숭하고 중하여 선생이라고 일컬었으며, 특별히 독대(獨對)를 내리고 또 밤에 현종(顯宗)에게 명하여 친히 어찰(御札)을 전하게 하였다. 송시열이 감격하고 분발하여 스스로 춘추 대의(春秋大義)를 세웠는데, 효종의 승하(昇遐)하자 애통하고 사모하여 살고자 아니하는 것처럼 하였고, 효종의 재궁(梓宮)384) 에 부판(付板)385) 을 썼으므로 유명(遺命)으로 자기의 상()에도 부판을 쓰게 하고, 휘일(諱日)마다 어찰(御札)을 가지고 종일 통곡하였다.

 

▲ 화양구곡에서  옛그림을 만나다    © 최영숙

 

이이(李珥)의 시대로부터 조정의 선비들 이미 사정(邪正)의 당()으로 나뉘어졌는데, 김장생(金長生)은 매양 음양(陰陽선악[淑慝]의 분변에 조금도 가차가 없었고, 송시열에 이르러서는 더욱 세도(世道)를 스스로 맡아서 윤리(倫理)를 거스리고 인심을 허물어뜨리며 위험하고 간사한 자가 있는 것을 보면 반드시 마음을 수고롭게 하며 힘써 물리쳐서 원수와 원망이 세상에 넘치는 데 이르렀으나, 오히려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며, 적 윤휴의 무리에게 꺼리고 미워함을 가장 많이 입었다. 갑인년386) ·을묘년387) 의 화()에 거의 죽게 되었다가 겨우 면하고, 경신년388) 경화(更化)에 거두어 서용하고 돈독히 부르는 명이 있자, 정자(程子)의 서감(西監)의 예()389) 에 의하여 잠시 들어갔다. 곧 국휼(國恤)을 만나니, 성모(聖母)390) 께서 언찰(諺札)로 간절하게 만류함으로써 몇 달 힘쓰다가 돌아갔다. 계해년391) 에 또 부르기를 더욱 돈독히 하니, 송시열이 효묘 세실(孝廟世室)의 논의가 한 번 조정에 발론되었으나, 미처 이루지 못함으로써 항상 한()스러워하다가 이에 미쳐 명령에 응하여 맨 먼저 이를 건의하였다.

 

이때 박세채(朴世采)도 조정에 나아가니 조야(朝野)에서 좋은 정치가 있을 것을 생각하고 바랐는데, 이때 의논이 도리어 불화함을 품어서 참합(參合)392) 하고자 하기에 이르러, 을묘년의 흉당(凶黨)393) 과 더불어 같이 일하였으나, 송시열은 이미 일체 주자(朱子)의 가르침에 따라 마음으로 몹시 옳지 못하게 여겼으며, 수상(首相) 김수항(金壽恒)도 대대로 그 조부의 착함을 드러내고 악함을 징계하는[彰癉] 논의를 지켰다. 이 때문에 송시열과 더불어 뜻이 합하였으므로 당시의 무리가 김수항과 아울러 공격하여 훈척(勳戚)에게 편당을 한다고 지목하였는데, 송시열이 화()을 입는 데 미쳐서는 이것도 죄를 얽는 한 단서가 되었다.

 

▲ 화양서원     ©최영숙

 

윤증(尹拯) 부자(父子)는 본래 윤휴(尹鑴)를 편들고 송시열과 어긋났는데, 윤증이 당시의 의논이 이와 같음을 보자, 갑자기 글을 보내어 송시열을 헐뜯고 배척하니, 당시의 무리가 이에 드디어 윤증을 도와서 합하여 하나가 되었다. 이에 이르러 윤휴·윤증의 무리가 두 감정을 번갈아 부채질하여 해기(駭氣)394) 가 더욱 벌어져서 드디어 극진한 화에 이르렀다. 송시열이 윤휴와 윤증을 배척할 때에 비록 송시열을 존중하는 자라고 하더라도 혹 너무 지나치다고 하였으나, 그 끝에 가서는 마침내 모두 송시열의 말과 같았으므로 세상에서 모두 그 선견(先見)에 탄복하였다. 임명(臨命)395) 때에 문인 권상하(權尙夏)의 손을 잡고 부탁하기를,

 

"학문은 마땅히 주자(朱子)를 주()로 할 것이며, 사업은 마땅히 효묘(孝廟)께서 하고자 하시던 뜻을 주로 삼을 것이다. 주자의 이른바, ‘함원인통 박부득이(含冤忍痛迫不得已)396) ’ 여덟 글자를 뜻을 같이하는 선비들이 전수하여 잃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하고, 또 말하기를,

 

"천지가 만물을 생()하는 소이와 성인(聖人)이 만사에 응하는 소이는 ()’ 일 뿐이다. 공맹(孔孟) 이래로 서로 전하는 것은 오직 하나의 곧을 ()’자인데 주 부자(朱夫子)가 문인에게 부탁한 것도 이에 벗어나지 아니한다."

 

하였다. 탐라(耽羅)에 갈 적에 일찍이 글을 지어 김장생(金長生)의 묘()에 제사하여, 당인(黨人)이 화()를 꾸민 전말(顚末)을 갖추어 진술하였고, 또 그 부모의 묘에 제사한 글에 그 평생의 출처(出處)를 두루 서술하였는데, 사실이 매우 상세하며 모두 유집(遺集)에 있다. 권상하가 그 화상(畫像)에 찬()하기를,

 

"높고 높은 산악의 기상이요 넓고 넓은 하한(河漢)397) 의 마음이라. 미쁘도다. 뭇 선비의 학문을 모은 대성(大成)이오, 울연(蔚然)하게도 백세(百世)의 사종(師宗)이 되었도다. 한 몸으로 성인(聖人)의 길이 장차 막히려는 것을 열었고, 한 손으로 하늘의 기둥이 이미 쓰러지는 것을 받들었도다. 깊은 궁중에서 비밀히 협찬한 것은, 내가 그 무슨 계책임을 알지 못하겠고, 한가로이 있으면서 깊이 탄식하는 것은, 내가 그 무슨 포부임을 알지 못하겠도다. 아아, ()가 커서 용납할 수 없으니, 내가 장차 고정(考亭)398) 을 버리고 누구를 따르겠는가?"

 

하였고, 김창협(金昌協)은 찬()하기를,

 

"호걸 영웅의 자질(姿質)로써 두려워하고 조심하는 공()이 있었고, 호연(浩然)의 기운을 가난한 집 가운데 모아서 우주(宇宙)에 채울 만하였으며, 지극히 중한 임무를 한 작은 몸으로 맡아서 화숭(華嵩)399) 의 높음과 겨룰 만하였도다. 나아가서 묘당(廟堂)에 올라 제왕의 스승이 되었으나 그 궁()함을 보지 못하겠다. 굳굳한 지주(砥柱)400) 는 홍수 속에 우뚝하고, 늠름(凛凛)한 푸른 솔은 한 겨울에 빼어났다. 만일 억만년 뒤에 이 칠분(七分)401) 의 모습을 보더라도 3백 년 간기(間氣)402) 의 모인 바를 오히려 알 것이다."

 

하였다. 뒤에 억울함을 씻고 제문(祭文)을 내렸다. 시호(諡號)는 문정(文正)이다.

 

 

▲ 송시열 선생의 묘비를 자세히 보다     ©최영숙

 

 

숙종실록보궐정오 21,

 

숙종 1563일 무진 1번째기사 1689년 청 강희(康熙) 28년 전 좌의정 송시열의 졸기

 

전 좌의정으로 치사(致仕)한 봉조하(奉朝賀) 송시열(宋時烈)을 죽였다. 송시열이 원자(元子)의 명호를 정한 뒤에 진계(陳戒)한 상소의 말이 임금의 위엄과 노여움에 거듭 저촉되어 모든 감정이 드디어 폭발하고 붕당(朋黨)의 참소가 이를 종용(慫慂)하여, 해도(海島)에 위리 안치(圍籬安置)된 뒤에 이어서 합사(合辭)의 청함이 있어, 반드시 죽인 뒤에 말고자 하였다. 금오랑(金吾郞)025) 에게 안법(按法)하기를 명하여 이미 나치(拿致)해 오게 하였는데, 문득 또 만나는 곳에서 사사(賜死)하기를 명하여 정읍(井邑) 길 가운데서 후명(後命)을 받았다. 송시열은 삼조(三朝)026) 의 원로(元老)로써 죄가 아닌 데도 죽었으므로 나라 사람이 원통해 하였다. 송시열은 영의 강과(英毅剛果)하고 기력(氣力)이 남보다 뛰어났으며 기절(氣節)을 숭상하였다. 젊어서부터 김장생(金長生)에게 배우고, 김집(金集송준길(宋浚吉윤선거(尹宣擧유계(兪棨) 등 제현(諸賢) 사이를 두루 다니면서 점차 갈고 닦아, 서로 도와서 알고 보는 것이 날마다 넓어졌다. 힘쓰고 가다듬어서 지조와 행실이 심히 확실하여 구검(拘檢)027) 에 힘쓰고 담부(擔負)028) 에 용감하여 주자(朱子)를 본받고 이이(李珥)를 존경하는 것으로 자임(自任)하여 일생의 가계(家計)로 삼았다. 지론(持論)이 준절(峻截)하고 일에 임하여 용감히 추진하여 족히 사람을 놀라게 하고 감동시켜 복종하게 하는 바가 있었고, 자신의 처사하는 사이에는 너무 지나쳐서 인정에 가깝지 아니함이 있었으나, 논하는 자가 감히 비난하지 못하였다. 복수(復讐)029) 의 대의(大義)로써 효묘(孝廟)의 지우(知遇)를 만났고, 일세(一世)의 유명한 재상과 어진 선비가 그 문하(門下)에서 많이 나왔다. 기해년030) 에 상복(喪服)을 논하였을 적에 정의(正義)를 지켰고, 갑인년031) 에 뭇 소인(小人)의 독한 모함으로 영해(寧海)에 귀양갔는데, 또 고묘(告廟)하기를 청하여 한 걸음 사이에 도거(刀鉅)가 있었으나, 사류(士流)가 더욱 마음을 기울여 복종하고 존중하여 명론(名論)이 태산(泰山북두(北斗)와 같이 높아서 유림(儒林)의 종사(宗師)가 된 지 50년이 되었다.

 

그러나 의례(議禮)032) 이후로는 자못 애증(愛憎)으로써 시비(是非)를 삼고, 또 조정의 논의에 참여하고 간섭하여 대관(大官)과 요로(要路)를 내치고 올림과 주고 빼앗는 것이 송시열에게서 말미암음이 많았으며, 또한 다시 뜻에 따라 취하고 버렸다. 한 마디 말이 회덕(懷德)033) 에서 나오면 사람들이 감히 어기지 못하였고,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바가 있으면 비록 평생을 복종해 섬긴 자라고 하더라도 곧 서로 불화하였으니, 의논하는 자가 깊이 이를 근심하였다. 경신년에 조정에 나감에 이르러, 출처(出處)에 의논할 만한 것이 많았으니, 존호(尊號)를 추상(追上)하는 논의는 식자(識者)들에게 비웃음을 당했고, 김익훈(金益勳)을 신구(伸救)한 말은 청의(請議)에 배치되므로 사류(士類)가 점점 더 실망하였다. 그 붕우(朋友)와 사생(師生) 사이에 처우하는 바가 전후에 결렬되고 위배되어 도리를 이루지 못하였으며, 만년(晩年)에 말과 의논이 더욱 창광(倡狂)하여 상도(常度)를 잃음이 많아 전혀 도덕[]이 있는 사람의 구기(口氣)가 아니었다. 드디어 선비의 추세(趨勢)가 분열되고 세도(世道)가 어지럽게 되자 송시열은 이미 명덕(名德)을 보전하지 못하고 나라와 더불어 패망하게 되었으니, 군자(君子)는 이를 시운(時運)에 돌린다.

 

▲ 화양구곡에서 산길을 걷다     © 최영숙

 

 대저 송시열은 크게 의심되지 않은 데 있었으나, 진실로 재주를 갖춘 것이 없었으며, 기질이 거칠고 학문이 허술하여, 본래 함양(涵養)함이 없고 강()함과 엄함이 지나치며, 가엾이 여기는 어짊이 적었다. 명목(名目)에 끌렸으나, 체험의 공()이 없었으며, 스스로 사문(斯文)034) 을 위호(衛護)하면서 당습(黨習)의 괴격(乖激)함으로 귀착됨을 면하지 못하였다. 스스로 대의(大義)를 발명(發明)하여 힘쓰면서도 도리어 패도(覇道)에 치우치고 인의(仁義)를 가차(假借)하는 병이 있었다. 처음에는 능히 통렬하게 갈고 닦으면서 말과 행실을 굳게 잡아서 우뚝하게 한 때 사람들이 복종하는 바가 되었으나, 군자(君子)는 본디 그 학술(學術)의 순수(純粹)하지 못함을 의심하는데, 그 혈기가 이미 쇠하게 되자, 스스로 다스림이 점점 허술하고 세상의 화()를 겪어서 분함과 미워함이 이미 치우쳤다. 인도하여 아첨함에 익숙해지고 주장이 크게 지나치고 바로잡는 힘이 이미 약하여, 집요(執拗)한 성질을 돌이키기 어려우니, 사사로운 뜻이 농간을 부리고 친당(親黨)이 그르치는 바가 되어 거조(擧措)가 낭당(郞當)035) 하고 사기(辭氣)가 분치(忿懥)036) 하여 젊은 시절에 비하면 거의 딴 사람과 같았으므로, 군자(君子)가 더욱 그 이름을 끝까지 보전하지 못함을 애석해 하였다.

 

그러나 박세채(朴世采)가 일찍이 송시열을 논하기를, ‘대의(大義)로써 나와서 사화(士禍)에 죽었으니, 심히 공격할 수 없는 것이 있다.’고 하였으며, 또 혹자는 그 말을 취하여 송시열이 죽자 비록 평일에 의논이 다른 자라도 가엾이 여기지 아니하는 이가 없었다.’고 하였다. 하물며 그 화()를 입음이 산림(山林)에서 스스로 지조를 지키는 윤증(尹拯)에게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그런데도 초사(初史)를 편찬한 자가 반드시 적휴(賊鑴)037) 와 더불어 두 사람의 감정(憾情)을 아울러 일컬어서 윤증을 화기(禍機)에 경중(輕重)이 있는 것과 같이 여김이 있었으니, 대저 경신년038) 이전에 누가 다시 윤휴(尹鑴)를 도와서 송시열을 죽이려고 하였겠는가? 그것도 크게 말이 되지 아니하며, 단지 아이의 소견일 뿐이다. 그런데도 이 같은 말을 가지고 마음에 쾌하게 할 수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여 암암리에 속이고 욕하며 거짓으로 과장하기를 이와 같이 하였으니, 공정한 눈으로 보면 자못 한 번 웃음거리도 되지 못하는 것을 알지 못하니, 또한 마음이 아프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송시열의 졸기이다.

 

▲ 유명조선으로 표기된 송시열의 묘비     © 최영숙

 

송시열의 묘에 도착했을 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묘는 편안해 보였다. 이곳의 비문은 사면이 정사각형으로 되어 있었다. 학동들은 비문을 읽으면서 송시열의 삶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맹자기행을 통해 조선시대의 거목 송시열, 윤선거, 윤휴, 윤증의 삶과 사상 등을 만났다. 이들은 인척과 동문, 부자, 스승과 제자였던 관계들로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맹자기행을 마치면서 소감을 물었다.

 

문희석 경희한의원장은 조선의 성리학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정신적 가치는 깊이 느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정신세계는 목숨을 아끼지 않을 정도로 서슬 퍼렇게 살아 숨 쉬는 걸 느꼈습니다. 선비정신의 굽힐 줄 모르는 절개와 용기는 시대의 성패결과를 떠나 본받아야할 점이라 생각합니다.”고 했다.

 

이상애 소래고등학교 사서는 맹자 졸업여행을 하면서 스승과 제자 그리고 벗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80이 넘은 나이에도 다른 길을 가는 늙은 제자 정제두를 걱정하며 편지를 보냈던 윤증은 마지막까지도 정제두에 대해 제자의 잘못이 아니라 스승인 자신의 책임이라 여겼다고 한다. 유봉영당(酉峯影堂)에서 명재 윤증 선생의 영정을 보면서 그런 명재의 성정을 느낄 수 있었다. 제자 정제두도 은둔하면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끊어갔어도 스승 윤증과의 관계는 끊지 않았다고 한다. 학문적인 논쟁을 통해 입장을 달리했던 스승과 제자로서의 그 정을 마음에 담게 된 여행이었다.”

 

 

박정란 대흥중학교 사서는 논산의 윤증고택 건축 구조 설명을 들으면서 창문으로 만든 자연액자가 되었다. 살림하는 여자들을 배려한 동선 배치, 가림막 등을 보며 집주인이 섬세한 것일까 아님 집지은 장인의 실력 있는 건축이었을까 하는 의견이 분분하였는데 윤증은 좋은 집에서 살기를 거절하였고 손자부터 거주했다는 해설사의 이야기로 가정적인 장인의 솜씨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동안 몰랐던 노론, 소론의 당리당략을 심우일 선생님의 자세한 설명으로 정리해 볼 수 있었습니다. 중간에 편입한 학생이지만 맹자졸업기행을 함께할 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박종남 문화해설사는 노론과 소론의 영수로 일컬음 받는 송시열과 윤증.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간 이번 답사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장삼이사에 지나지 않는 평범한 사람의 눈으로 보면 옳고 그름의 대의보다 니편 내편의 감정선이 오히려 더 크게 작용한듯하여 아쉬움을 느끼게 됐다. 윤증의 기개가 부러웠다. 권력. 명예로부터 초연할 수 있음이.”

 

심우일 맹자학당 선생님은 맹자기행~~ 정제두ᆞ, 송시열, ᆞ윤증ᆞ, 조식, ᆞ정도전 등등 그분들의 꿈과 좌절을 알게 되었고 그것이 내겐 생각 밖의 세계였습니다. 맹자강의와 마찬가지로 맹자기행에서도 불꽃처럼 살다간 선현들의 발자취가 내게 정문일침으로 다가왔던 것 같습니다. 그 따끔한 마음을 윤휴 선생의 시 한 수로 대신합니다ᆢ. 맹자 학우 여러분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윤휴

 

해 저물어 어룡은 동면에 들고

歲晏魚龍蟄(세안어룡칩)

차가운 하늘 매서운 서리도 많아

天寒霜露多(천한상로다)

산과 바다는 쓸쓸하기만 한데

山河正搖落(산하정요락)

군자의 뜻은 지금 어떠한지요?

君子意如何(군자의여하)

 

 

손예철 교수는 우암 송시열 선생은 열심히 살고 성실히 산 선비다운 선비였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사고가 너무 경직되었다. 윤증 선생은 학문과 세력으로는 송시열 선생을 못 따라간다. 한국 이야기는 하지 않으려고 한다.”‘며 사양했다.

 

▲ 맹자를 수업을 시작한 소래고등학교에서 마지막 졸업여행을 마무리 하다     © 최영숙

 

송시열, 조선의 주자(朱子)를 꿈꾸다.’라는 주제로 맹자학당의 졸업여행을 다녀왔다.

 

첨예한 대립을 했던 선인들을 보면서 많은 생각이 교차되었다. 당쟁은 어느 시대나 존재했다. 또한 필요하다. 그러나 사적인 감정들이 붕당을 만들고 그것이 국가운영에 까지 영향을 미쳐 국가 안위까지 위협하는 역사적 사실들로 만났다. 국내정치는 내부 사정으로 친다고 해도, 국제적인 분쟁이 발생했을 때 그 위기 상황에서 국론이 분열되었을 때는 그 참화를 백성들이 모두 안았다. 뭉쳐도 힘들 때 흩어졌다. 임진왜란 그렇고, 병자호란이 그러한 결과였다. 위정자들이 하늘 천지에 제 나라 백성들을 구하는 일 보다 더 귀한 일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당시는 서로를 죽고 죽이는 사안이었으나 후대의 사람들은 그 시대의 논쟁 등을 보면서 참,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생각을 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어떤가 보았다. 현대의 권력은 국민의 손에서 나온다. 그러나 선거가 끝나면 위정자들의 세상이 된다. 어느 정치인이 선거는 바람이 80%라고 했다. 그럼, 우리 국민들은 바람을 잡고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당에 상관없이 소신껏 자신의 일을 할 수 있는 일꾼들을 뽑지 않았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국내외적으로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많은 문제를 안고 살아간다. 위정자를 뽑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 더욱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시대 또한 지나간다. 후대의 사람들이 우리가 살았던 시대를 어떻게 기록하고 기억 할 것인지 늘 깨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맹자학당의 마지막 졸업여행은 또 많은 생각을 하게했다. 함께했던 6년이 넘는 시간들, 모든 분들 고맙습니다. 깊은 인사를 했다.

 

 

* 참고 자료는  심우일 선생님 맹자기행 -송시열, 조선의 주자를 꿈꾸다. 자료집, 조선왕조실록,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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