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룻밤 같이 잘래요?"

'無心村'에 들다

이정우 | 기사입력 2011/09/11 [08:19]

"하룻밤 같이 잘래요?"

'無心村'에 들다

이정우 | 입력 : 2011/09/11 [08:19]

 

팔월의 끄트머리이자 여름의 끝자락에 몇몇의 지인들과 자연에 들었다. 모두가 일상이 바빴고, 모두가 시흥이라는 밭을 일궈 나가는데 한몫씩 하고 있는 여인들이다 나만 빼고. 몇 번의 날짜 고름이 있었고, 조율 끝에 내린 결론은 토요일 저녁 9시에 떠나는 거다.
 

▲ 장마끝, 파란하늘 시작     © 이정우

 
저녁 여덟시 반쯤 전화가 왔다. 그녀들은 모두 준비가 되었으니 나만 태우면 된단다. 난 아직 땀범벅이었고, 아침부터 화악산에 오르며 메고 다닌 배낭에선 쉰내가 나고 있었다. 부리나케 씻고 합류했다.
 
너무 반가운 얼굴들, 편했고 푸근했다. 중국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나에게 만나자 마자 제의를 했다. “우리 자연 속에서 하룻밤 같이 잘래요?” 마다할 나도 아니지만, 그렇게 먼저 손을 내밀어 준다는 것 또한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 마당에 스스로 잘 자라고 있는 수까치깨     © 이정우


까만밤 속을 달렸다. 질주하는 차들을 바라보며, 불빛 꼬리가 짧아져감에 따라 우리들은 산속으로 점점 들어가고 있음을 짐작케 했다. 신호등이 사라지고 전봇대가 희끗희끗 불빛을 반사하면서 우리들의 쉴 곳으로 안내를 했다. [無心村]이 보였다. 이제 우리는 아무 생각도 안 할뿐더러 속세와는 절연된 곳으로 안내를 받게 되는 것이다.
 

▲ 산책하다 만난 싸리나무     © 이정우


통유리를 통해 들어오는 별빛보다, 그 산촌에 갑자기 켜진 환한 불빛을 보고 나방이 먼저 몰려들었다. 유리인줄 모르고 날아들어 헤딩을 하는가 하면, 느긋하게 통유리 속에 든 우리들을 구경하고 있는 나방도 있었다.
 
우리 중 누군가는 그 나방을 찍는다고 카메라를 들이대기도 했고, 또 누군가는 거실 마룻바닥에 누워 별을 보겠다고 갑자기 집안의 불을 다 끄기도 했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별빛이 갑갑했던지 현관문을 열고 마당에 나서서 별을 헤기도 하면 우리들의 밤은 익어갔다. 

▲ 지인이 제일 많이 보여주고 싶어 했던 동자꽃     © 이정우


부자다, 그 순간엔. 도심에선 볼 수 없었던 별이 무수히 쏟아져 치마폭으로 안기기도 했고, 풀벌레악단의 [여름에서 가을로 가는 길목] 연주를 듣는 순간 귀가 맑아짐을 깨닫기도 했으니까. 창밖에 별들을 불침번으로 세워 두고 잠이 들었다. 화악산에서 낮에 만났던 아이들과 자연에 들어서 만난 별들과 한바탕 미팅을 주선하면서 꿈나라 여행을 했다.
 

▲ 산책 중 잠시 휴식 시간에 하늘보기     © 이정우


아침을 먹고 주변 나들이를 했다. 잣나무 숲이 울창해서 그늘도 좋고, 호흡할 때마다 숲에서 건네주는 피톤치드를 받아 마셨다. “아흥아흥....” 아주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걸었다.
 
천지가 꽃이다. 길가에 함초롬히 미소 띠며 웃어주는 아이들. 너무 반갑다. 매일 봐도 절대 질리지 않는 아이들이다. 우리 다섯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둘이 나란히, 다섯이 한 줄로 서서 걷기도 하면서 산속을 누볐다. 두어 시간 남짓 걸었나본데 마주친 사람이 한 명도 없다. 온전히 그 산을 전세 낸 거다. 그 시간엔.
 

▲ 이웃집 마당에 핀 함박꽃나무     © 이정우


지인의 언니네 밭에서 고추와 깻잎, 그리고 호박잎, 늙은 오이를 따고 돌아와서 점심 준비를 했다. 온통 먹거리인 것이 행복 그 자체다. 산속에서의 낮잠. 정말 기가 막히다. 오수를 즐기지 않는 편이라 잠이 안들 거라 생각했던 거와는 달리 꿀잠을 잤다.
 
잠깐 눈을 붙였나 싶었는데 뉘엿뉘엿 해가 산마루턱에 걸렸다. 잠도 깰 겸 개울로 나가 발을 담갔다. 그야말로 탁족이다. 예전에 산행에서 내려오다 마지막 도랑을 건너면서 양말을 벗고 발을 씻었던 느낌처럼 온 몸의 노폐물이 발가락 새로 빠져 나가는 느낌이다.

▲ 지금쯤 활짝 피었을 물매화(마당이 훤해졌겠지)     © 이정우


저녁을 먹었다. 푸른 풀을 참 많이 먹었다. 풋고추에 된장을 찍어서, 찐 호박잎에 된장 얹어서, 노각무침을 젓가락으로 집어 올려 입 속으로 가져가면서 그 산의 공기를 쑥쑥 내 안으로 집어넣었다. 중국땅에서 먹었던 기름진 음식으로 불균형을 이뤘던 내 몸속의 요소요소들이 지들끼리 정렬하느라 바쁘고, 울긋불긋 얼굴에 돋았던 여드름이 한 풀 기가 꺾이는 소리를 들었다.

▲ 조붓한 오솔길에서 웃어주던 이질풀     © 이정우


누군가와 함께 한다는 거, 그 누군가가 다정히 웃으며 어깨에 손을 얹어 줬다는 거, 사람 살아가는데 참 중요한 일이다. 함께 이야기 할 수 있고, 또 알게 모르게 서로에게 힘이 되어 줄 수 있다면 더 없이 소중한 관계가 될 수 있다. 오랫동안 못 이뤘던 그 관계에 허기져 있었기 때문에 순간순간이 소중해 놓칠 수 없는 인연의 고리를 짜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 지인의 언니네 마당     © 이정우


삶이 팍팍하다고 느낄 때, 외부로부터 오는 어떤 압박감이 나를 지배하려 들 때, 내가 권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모든 것을 일시정지 시켜놓고, 자연으로 들어보라 감히 말하고 싶다. 꽃을 보며 마주 웃어주기도 하고, 바람의 손길에 그냥 맡겨 놓고, 그 바람을 타 보기도 한다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가슴에 든 응어리가 녹아내림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 주방에서 내다보이는 풍경, 벌개미취가 만발이다     © 이정우


함께 했던 순간들, 그리고 고마운 언니들. 난 참 복이 많다. 일일이 만나 차 한 잔 대접 못해 드리고, 밥 한 끼 사드리지 못 했는데 그들 맘속에 내가 있다니 참 뿌듯하다. 캄캄한 어둠을 헤치고 그 산속을 빠져 나오는데 자꾸 창문을 열고 하늘을 봤다. 초롱초롱 뜬 별들, 저들도 아쉬웠던지 자꾸 따라 나오고 있었다. 홍천을 지나 서울외관순환도로에 올라섰을 즈음, 다리 아픈 별들은 집으로 돌아갔고, 씩씩한 별들 몇은 희미한 전등 애써 비춰가며 우리들의 귀가를 안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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