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 말하자면 삼년을 기다린 셈이다. 세 번의 간절함을 보내고 사년 만에 그 기다림의 소원을 이뤄 보려 내심 기대가 컸었다. 밤마다 이웃마실의 남정네들만 불러내는 것이 아니라, 남녘에서 소문 따라 건너 왔다는 소리도 들리고, 밤마다 이 여인네 웃음이 그리워 그야말로 여름밤이 너무 짧다는 풍문은 익히 들었다.
나도 오늘 밤, 이 여인이 뭇 남정네들을 어떻게 데리고 노는지 두 눈으로 꼭 지켜보리라는 맘에 까닭 없이 뛰는 내 가슴을 진정시키며 남정네들 사이에 섰다.
오후 세시쯤, 하루 전에 흰꽃으로 피었던 여왕님은 둘째 날의 잔치를 위해 연분홍에서 붉은 치마로 갈아입기 시작을 했다. 꼬옥 오므렸던 치마끈을 하나 둘씩 벗겨냈다. 슬그머니 치마 끈을 푸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툭, 툭 소리를 내며 모았던 꽃잎들을 뒤로 젖혔다. 한 잎 뒤로 젖힐 때마다 수많은 진사들은 우와!! 와!! 연발 감탄사를 터뜨렸다. 눈앞에서 여왕님의 묘기를 보고 있는 내 입에서도 꽃잎 벌어질 때마다 추임새를 넣고 있었다.
처음 흰색의 꽃봉오리가 첫 밤에 피었다가 다시 둘째 날부터는 연분홍꽃봉오리에서 꽃잎을 차례차례 펴면서 붉은 색으로 변하고, 거기에서 또 다시 속고갱이 꽃잎이 약 구십도 정도 뒤로 젖히면서 왕관 모양을 만든다.
말하자면, 여왕님이 머리에 쓴 왕관 모양이 되면 여왕님은 그 모습을 고이 간직한 채 물속으로 들어가 생을 마친다는 것이다. 둘째 날 화려하게, 또한 찬란하게 장식하고 나서 자신의 최후를 맞는 여왕님이다.
요즘, 관곡지에 이변이 생겼다. 밤마다 전국의 남정네들이 몰려들어 여왕님을 알현하려 하지만, 그 여왕님은 왕관을 잃어버려 우아한 밤의 행진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보름 전에 관곡지에서 밧데리가 부족하여 포기하였던 하이라이트를 보려고 간밤에 다시 남정네들 틈에 끼여 긴장을 했었지만, 그 우아한 포즈는 볼 수 없었다.
밤이 이슥해지자 여기저기서 남정네들의 푸념이 터지기 시작했다. 저녁도 못 먹고 단숨에 달려 왔다는 둥, 밤마다 저렇게 배신을 때리면 어찌하냐는 둥.
처음엔 나도 서운하였다. 도대체 뭣이 불만이어서 저리 애간장만 태우게 할까? 하나 둘 카메라를 챙기며 그 자리를 뜨는 남정네들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모아 봤더니, 그 빅토리아여왕님이 화사한 왕관을 쓰고 우아하게 한 번 쓰윽 웃어주는 일은 어려울 거 같은 예감이 들었다. 미스코리아처럼 예쁜 옷 입고 왕관 쓰고 한 바퀴 행진을 해 주면 그 밤, 관곡지에 있는 남정네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여왕님, 만세!!~!!!”를 부르겠지만, 그럴 확률은 희박해졌다.
누군가가 그랬다. 상림의 연지에는 관리자가 있어서 불빛을 조절해 준단다. 관리자가 여왕을 향해 불빛을 주면 일제히 셔터를 누르고, 또 얼마간은 쉬었다가 또 한 장 씩 찍는단다. 그런데 관곡지에는 그 불빛을 관리 하는 사람도 없을뿐더러 다 제각기 전등을 하나씩 들고서 저 필요할 때만 비춘다.
야간이다보니 셔터 속도가 느려 불빛을 고정해야 하는데 여기저기서 번쩍 거렸다가 다시 어두워졌다가 난장판이다. 그러다보니 서로 짜증을 낸다. [제대로 비춰라.] [하나만 비춰라.] [불빛 번들거리게 하지 마라,] 누군 야밤에 도착해서 렌즈 초점 맞춘다고 백열등보다 밝게 비추고, 또 누군 카페 모임을 관곡지에서 하느라고 전국에 계신 회원들에게 관곡지 상황을 실중계 한다. 그야말로 아수라장이다.
내가 빅토리아여왕님이라해도 그 난장판에 나서고 싶지 않겠다. 포근히 접었던 꽃잎 캄캄하게 어두워오면 소리 없이 펼치며 우아하게 왕관을 만들어 쓰고 인당수에 안겨야 할 텐데, 밤인가 싶어 치마끈 풀다가 번쩍 비춰지는 후레쉬 빛에 깜짝 놀라 다시 오므리고, 그래도 다시 본연의 임무를 다하자 싶어 꽃잎 열어보다가 멈추는 일이 잦다보니 빅토이라여왕님의 완성된 왕관은 여왕님 스스로 포기하고 생을 마감하는 일을 우리 인간들이 만들고 있는 것이다.
빅토리아(큰가시연꽃)는 가이아나와 브라질의 아마존강(江) 유역이 원산지이고 1801년경 남아메리카의 볼리비아에서 처음으로 식물학자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 이후에 아르헨티나와 아마존강 유역에서도 발견되었고, 1836년에 영국의 식물학자 존 린들리가 빅토리아여왕을 기념하여 학명을 Victoria regia로 명명하였다.(네이버백과사전)
귀한 것을 귀히 여길 줄 알고, 그 귀함에 감사할 줄 아는 우리들이 되어야 한다. 관곡지에 행사가 있어 연이틀 야밤에 연밭에 머물렀었는데, 그 이틀 동안 더욱 깊은 외로움을 느꼈다. 식물은 낮 동안 꽃도 피고, 광합성작용도하고, 나름대로 그들의 임무에 충실하고, 밤엔 휴식을 취해야 하는데, 무슨 축제, 무슨 축제를 핑계 삼아 연밭의 야밤을 낮처럼 밝히고 있으니, 연꽃들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그 밤에, 여왕님의 왕관을 꼭 보고 싶어 하면서도, 그 자리에 있었음이 부끄러웠다. 며칠 전 지인이 물었다. “왜, 여왕님 사진 안 보여 주세요?” 그래서 더욱 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나름 자랑하려고, 이젠 왜 내게 여왕님의 왕관 사진이 없는지 해명할 필요도 없어졌다. 관곡지 사정이 이미 그 이유가 되어버렸으니. 정말 보고 싶다 나도. 그 밤, 관곡지에 있었던 모든 남정네들과 모두 함께 여왕님의 왕관을 볼 수 있는 지혜를 모았으면 좋겠다.
그 자리, 시끌벅적한, 인공불빛이 난무한 그 자리에 함께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 여왕님의 왕관 보기를 포기 못 하는 이 맘. 불빛 관리하며 여왕님의 맘을 달래 줄 왕자님을 간절히 기다려볼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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