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싶었던 지인들을 만났고, 웃었고, 또 먹었을 뿐인데 한 달이 훌쩍 지나갔다. 모두들 행복해 보였고, 모두들 변함없이 그 자리에서 착실히 뿌리를 내려가고 있었다. 나만 빼고. 삼년 반이란 세월동안 해외생활을 한 내겐 특별한 경험이었고, 그에 동반한 성숙의 기회가 주어졌다. 성숙이라 함은 내적인 기반다짐이라던가 좀 더 여인다워졌다는 얘기가 아니고, 세상을, 같은 동포를 다시 새겨보는 또 다른 하나의 눈을 달게 해준 계기가 되었다는 거다.
팔월이 문을 열자마자 추억의 장소로 달려갔다. 그곳은 내게 가을의 쓸쓸함, 고요함을 가르쳐 준 아주 작은 섬이다. 늦가을 갯갈대가 서걱대고, 듬성듬성 갯개미취가 보라색 꽃을 피웠다가 하얗게 씨방을 날리는 전형적인 가을 정취를 안고 있는 곳이다. 여름의 한가운데를 뚫고 달려갔으니, 가을 느낌은 일지 않았고, 대신 나지막하게 땅에 깔려 있는 참골무꽃을 만났다. 날은 뜨거웠고, 땀은 흘렀지만 쪼그려 앉았다가 다시 적당한 자리를 봐서 털썩 주저앉아야만 자세히 눈맞춤을 할 수 있는 키가 작은 아이다. 옹기종기 모여 앉아 갯벌을 바라보며 규방에서 있었을 법한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었으리라. 참골무꽃 저들끼리.
참골무꽃은 꿀풀과의 여러해살이풀이다. 주로 바닷가 모래땅에 자리 잡고 살면서 키는 아담하다. 꿀풀과 꽃들이 모두 그렇듯 입을 활짝 벌리고 혓바닥을 길게 내밀어 누군가를 약올리는 표정이 일품이다. 곧잘 나는 그 모습을 사오정 닮았다고 표현 했었다. 예전에 손오공과 저팔계랑 같이 만화에 나왔던 사오정의 그 입모양이 천상이다. 뭔가 덜떨어진 이야기를 하면서, 나름 심오한 진리를 하나도 심각하지 않게 풀풀 잘도 풀어내던 그 사오정의 목소리가 귀에 쟁쟁하다.
골무꽃의 종류는 참 많다. 골무꽃, 참골무꽃, 산골무꽃, 그늘골무꽃, 광릉골무꽃 등등 몇 개가 더 있다. 꽃이름의 접두어는 그 식물에 대해 뭔가 덧붙여 말하고 싶을 때 붙이는데 그 방법도 여러 가지다. 자생지를 나타내는 말(갯, 골, 구름, 두메, 벌, 물, 돌, 바위, 산, 섬), 진위를 나타내는 말(참, 나도, 너도, 개, 뱀, 새), 식물 기관의 모양이나 특성을 나타내는 말(가는, 가시, 갈퀴, 긴, 끈끈이, 선, 우산, 털, 톱), 색을 나타내는 말(금, 은, 광대), 식물의 크기를 나타내는 말(각시, 땅, 애기, 왜, 좀, 병아리, 큰, 왕) 등이 있다.
참골무꽃의 참은 진위를 나타내는 말의 진짜라는 의미에서 유래 되었으니, 골무꽃의 종류 중에서 진짜, 진짜 골무꽃이란 뜻일 게다. 또 하나 참골무꽃의 이름이 생기게 된 유래는 보라색꽃이 지고 난 후에 열매가 바느질할 때 쓰는 골무와 같아서 그리 붙여졌다. 손끝에 끼고 바느질을 하게 되면 바늘귀를 밀어 넣기도 쉽고, 또 이부자리 꿰맬 때 적격이다. 꽃이름 하나하나에도 참 지혜롭다는 생각이 든다.
진짜라는 의미가 무엇일까? 삼년 반, 중국에서 내가 만난사람들은 모두 한 꺼풀 진심의 차단막을 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물론 내 기준으로 봐서 몇몇은 아니었지만. 해외 생활이 팍팍하다는 거, 그리고 근거 없이 불안하다는 거 다 감안 한다 해도, 우리들이 입을 모아 조심해야 한다고 말하곤 했던 중국인들이 더 살갑고, 더 진짜였을 거란 생각이 지배적이다 아직까지도 나는. 한국엔 금송아지가 처치곤란이고, 한국에선 천재소리 들었고, 한국에선 아주 잘나가는 일인이었다. 해외에 사는 한국인 모두는.
같은 한국사람인데, 사용하는 언어는 같은데, 어찌 그리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갑갑할 때가 많았다. 비행기표 끊고, 기다렸다 탑승하고, 그 땅에 내릴 때까지 모두 합해봐야 네다섯 시간이면 족한데, 그 짧은 시간동안 어쩌면 본인의 정체성을 분산시켜 공중에 분해해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서로 보듬어 주고, 타국에서의 애환을 달래주어야 하겠지만, 남의 땅에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참다운 한국인의 긍지도, 참다운 나의 모습도 모두 벗어버리고, 낯선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나 보다. 참골무꽃의 [꽃말은 나를 건드리지 마세요]라고 했는데, 어찌 보면 이국땅에서 살아가야 할 사람들에게 너무나 잘 어울리는 말인 거 같다.
참골무꽃!
골무꽃중에서 참골무꽃이 있다고, 우리 사람들도 참사람이란 분류를 둔다면 더없이 치사하고, 형평성에 어긋나는 일일게다. 우리 모두는 진실 되게 살아가야 하고, 참으로 사람다운 사람으로 참으로 괜찮은 사회를 만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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